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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제정러시아 600톤황금의 중국내 실종을 둘러싼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4. 4. 29.

글: 유작규(劉作奎)

 

동북아에서 제정러시아와 일본은 전통적인 원수지간이라고 할 만하다. 역사적으로 여러번 서로 전쟁을 치른 은원이 있는 외에, 양국간에는 아직까지 정산되지 않은 빚들이 남아 있다. 그중의 한 가지 현안은 지금까지도 러시아인들이 마음 속에서 있지 않고 있다. 바로 80여년전, 근 600톤에 가까운 제정러시아의 황금이 중국경내에서 신비롭게 실종된 것이다. 이 황금을 마지막으로 취급한 사람은 바로 일본인이었다.

 

십월혁명후 백군은 제정러시아의 비축황금을 탈취하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러시아군은 전투에서 계속 패퇴했다. 1915년에 이르러, 독일군은 이미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를 압박했다. 안전을 위하여, 짜르는 국가비축황금을 후방으로 이전하도록 명령한다. 금방, 약 600톤의 금괴와 금화는 카잔으로 옮겨진다.

 

1918년초, 이 황금은 이미 카잔에 3년여 보관되고 있었다. 이 때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이미 성립되었고, 국내정세는 안정되지 않고 있었다. 1918년 3월, 소비에트러시아와 독일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평화협약을 체결하고 제1차세계대전에서 빠져나온다. 영국, 프랑스, 미국,일본등 연합국은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에 대하여 놀라고 당황한다. 그들은 러시아가 독자적으로 평화협상을 체결했다는 것을 구실로 하여, 속속 군대를 출동시켜 소비에트 러시아에 간섭을 진행한다. 러시아경내의 반혁명세력도 이 기회에 반란을 일으켜 몇 갈래의 백군은 국토의 상당부분을 점령한다.

 

동란의 국면하에, 카잔의 이 황금은 가치가 더욱 두드러졌다. 홍군과 백군은 모두 이를 인식했다. 이들 황금은 내전의 진전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그것으로는 대량의 군사장비와 물자를 구매할 수 있고, 이로써 쌍방의 힘의 균형을 깨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18년 8월, 백군의 장교인 페트로프는 군대를 이끌고 카잔을 습격하여, 황금을 탈취한다.

 

홍군은 황금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후, 신속히 페트로프부대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황금을 지키기 위하여, 페트로프는 황금을 백군의 사령관 콜차크에게 넘겨준다. 당시 콜차크는 러시아경내의 최대의 백군사령관중 하나였다. 그는 스스로 "러시아최고총독"이라 칭했다. 그리고 서방과 일본등 국가의 승인과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황금을 얻은 후, 콜차크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그는 신속히 황금을 자신의 본거지인 옴스크로 이전한다. 당시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 황금은 모두 583톤이었다. 그러나, 이 "러시아최고총독"은 홍군의 전진을 막을 수 없었다. 금방, 홍군은 옴스크 부근까지 진격한다. 이때, 일본인은 이 황금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콜차크에게 제안을 한다. 만일 콜차크가 일본이 "러시아의 황금을 보호"하는데 동의한다면, 일본군이 홍군을 물리쳐 주겠다고. 다만 콜차크는 일본인의 '호의'를 거절한다. 1919년 11월 14일, 홍군이 옴스크를 점령한다. 그러나 자료에 따르면, 홍군은 도시내에서 겨우 몇 톤의 황금만을 찾아냈을 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황금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백군은 중국경내로 퇴각하고, 일본인은 63상자의 황금을 얻는다.

 

원래, 홍군이 옴스크를 점령하기 몇 시간전에, 콜차크와 페트로프는 기차를 타고 이르쿠츠크로 도망쳤다. 열차에는 63상자의 황금이 실려 있었다. 홍군의 추격에 직면하여, 열차위의 사람들은 중요한 순간에 금괴를 가지고 먹을 것과 총알을 살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기차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자마자 콜차크는 현지의 홍군에게 생포된 것이다. 페트로프와 열차는 요행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강도터는 강도'른 만난다. 열차가 치타에 도착했을 때 코사크백군이 가로막는다. 코사크는 황금을 몰수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쌍방간에 하마터면 교전이 벌어질 뻔한다. 결국 페트로프는 부득이 타협을 하여, 30상자의 황금을 코사크에 넘겨주고, 나머지 33상자는 그가 가지고 치타로 간다.

 

1920년초, 막다른 골목에 몰린 페트로프는 열차를 중국동북의 만주리(滿州里)로 몰고가서, 현지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보호를 요청한다. 페트로프는 콜차크를 지지했던 일본인이라면 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일본인은 거액의 황금 앞에서 그런 의리는 생각지도 않았다. 콜차크는 전혀 머리 속에 없었다. 하물며 이때는 이미 콜차크가 홍군에 의하여 처형된 다음이었다. 일본인은 한편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기차를 점거하고, 다른 한편으로 페트로프에게 가혹한 조건을 내건다: 모든 무기와 재산을 일본정부에 내놓으면, 그의 피난을 허용하겠다. 어쩔 수 없게 되어, 페트로프는 나머지 황금을 일본인에게 넘긴다. 그가 얻은 것은 겨우 누군가 서명한 영수증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30상자의 황금을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러시아 경내의 코사크백군을 습격하여 황금을 빼앗아 온다. 이렇게 하여 근 600톤에 달하는 황금은 거의 전부 일본인의 수중에 떨어진다. 추정에 따르면, 이 황금의 가치는 당시 일본전국재정수입의 2배라고 한다.

 

그러나, 만주리에 주둔한 일본군은 황금을 일본정부에 넘겨주지 않았다. 그들이 제출한 보고서에는 페트로프의 황금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 썼다: 1920년 4월 19일, 부대는 만주리 부근에서 토비를 만났다. 적군을 모조리 섬멸한 후 여러 전리품을 획득했다. 이들 전리품은 이미 처분하였고, 일상지출에 충당하였다.

 

실제로, 상당한 일부분의 황금은 일본군 지휘관들이 나눠가졌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한 일본 고위장교는 중국에서 귀국한 후, 하룻밤만에 갑부가 되어, 일본 최대정당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상의 자리를 각축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누군가 그가 중국에서 러시아황금을 독식했다고 고발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조사하던 검찰관은 신비롭게 암살당하고, 사건은 흐지부지된다.

 

나머지 황금은 일본군에 의하여 동경 북부의 한 창고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어서,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가리는 조치를 취한다: 먼저 비밀리에 황금을 옮긴 후, 창고에 불을 지른다. 그 후에 이 황금은 철저히 행방불명으로 된다.

 

백군의 사령관은 일본에서 황금을 달라고 소송을 벌인다.

 

황금을 일본에 넘겨준 후, 페트로프는 여러 군데를 전전하며 상하이로 간다. 그곳에서 사진관을 연다. 1932년, 소련정부가 페트로프는 찾아서, 그에게 일본으로 가 법률수단으로 황금을 회수해오도록 요구한댜. 그후, 페트로프는 일본의 요코하마로 간다. 기이한 것은 페트로프에게 자금을 지원한 곳이 소련정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의 소장파 장교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후자들도 그중 한 몫을 나눠가지고, 이를 통하여 나중에 정변에 필요한 자금을 취득하고자 했을 것이다.

 

1936년, 일본의 "2.26"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정변에 참가하였던 소장파장교들은 처형되거나, 감옥에 갇힌다. 페트로프도 최대의 자금조달원을 잃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요코하마 교외의 한 낡은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나쁜 소식이 연이어 들려온다. 먼저 일본 법정은 일련의 증거조사를 거친 후, 이 사건을 수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어서 1940년, 관련사건기록은 모조리 봉존(封存)한다. 빈곤에 빠진 페트로프는 부득이 일본인이 그에게 써준 영수증을 팔아서 소송비용을 댄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페트로프 일가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비록 영수증을 팔기 전에, 페트로프는 영수증의 부본을 만들었지만, 부분도 망명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다. 이렇게 하여 이 황금의 물증은 사라지게 된다.

 

가치 800억달러, 러시아-일본의 황금분쟁은 80년간 계속되고 있다.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정부는 실종황금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한다. 일부 러시아역사학자의 추정에 따르면, 이 황금의 가치는 원금이자를 합하면 약 800억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당시 경제위기에 처한 러시아에게 상당히 큰 유혹이었다. 1991-1995년, 러시아지방정부는 여러번 일본에 이 황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모스크바오 정식으로 일본정부에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한다. 당연히, 이것은 경제문제만이 아니다. 당시 일본은 북방4개도서문제로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러시아정부에서는 일본이 엣날 빚을 인정하지 않겠다면 러시아도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일본정부도 러시아의 주장을 극력 부인한다. 모든 재산인 이미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일본역사학자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일본정부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그들은 일본이 몰래 황금을 빼돌렸다고 본다. 어떤 일본역사학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러시아황금을 도용한 것은 일본군의 집단범죄이다. 그들은 이들 재물을 이용하여 정상적인 정치활동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언급해야 할 사항은 일본정부가 이 관련비밀자료를 해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의 이런 연구는 많은 것이 추측에 의존한다. 일본에서 관련자료를 공표하는 외에 이 황금의 진실한 행방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