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중국의 관인은 어떻게 네모(方形)에서 둥글게(圓形) 바뀌었는가?

중은우시 2014. 8. 26. 23:58

글: 염경생(閻京生)

 

 

 

 

인장은 기관, 조직 혹은 개인이 정식으로 날인하거나 감정하는 도구이다. 중국에서 인장(전각)은 일찌기 고도로 발달한 예술이었고, 서예, 회회, 시가와 더불어 4대 전통예술로 불리웠다. 중국고대 관청의 정식인장은 일찌기 모두 방형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은 당정기관이건 기업사회조직이건 인장은 모조리 원형이다.

 

1931년 중국최초의 원형관인이 나타나기 전에, 방형인장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중국의 국인(國印) 설계전통과 유사한 일본과 한국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전통적인 항형인새(印璽)양식을 고수하고 있다. 다만, 방형인장은 현대중국에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지금은 단지 한 군데에만 남아 있다. 인민폐의 뒷면에 있는 "행장지장(行長之章)"과 "부행장장(副行長章)"이 그것이다.

 

중국의 관인은 어떻게 네모에서 둥글게 바뀌었는가? 중국최초의 인장은 춘추시대에 나타난다. 당시는 문자를 죽간(竹簡)에 썼고, 인장은 주로 검인봉니(鈐印封泥)에 썼다. <주례.지관.사시>에는 "범통화회(凡通貨賄), 이새절출입지(以璽節出入之)"라는 기록이 있고, <좌전> 양공 29년 노양공이 초강왕의 장례에 참석하고 초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는데, 달방성에 도착했을 때, 노국의 정경(正卿) 계무자(季武子)가 변읍(卞邑)을 점령했다. 그 후에 양공을 만나도록 사람을 보내는데, "새서추이여지(璽書追而與之)"했다. 당시에 관인,사인을 불문하고 인장은 모두 "새(璽)"라고 불렀다. 진시황이 "새"는 천자의 전용으로 규정하면서 신민의 인장은 그저 "인(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게 된다. 

 

진시황은 일찌기 이사에게 명하여 저명한 화씨벽으로 전국옥새를 만들게 한다. 벽(璧)은 가운데 구멍이 있는 원형의 옥이다. 다만 서한말기 왕망이 황위를 찬탈할 때, 그의 고모 효원태후에게 전국옥새를 내놓으라고 했을 때, 왕태후는 분노하여 옥새를 땅에 집어던져, "한쪽 귀퉁이가 망가진다." 이를 보면 전국옥새는 이미 네모난 방형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원형인 화씨벽을 어떻게 네모난 방형으로 갈았는지아니면 이사가 따로 옥을 찾아서 전국옥새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방형의 중국인장

 

중국인장도안은 완전히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글자형태의 형체미는 인장의 배치의 아름다움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가장 많이 보이는 대전(大篆), 소전(小篆)과 한전(漢篆), 송원이후에는 예서(隸書), 해서(楷書)와 각종 송체서(宋體書)도 인장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자의 자체적인 구조가 어떤 문자로 도장에 새기든지간에 한자의 전체적인 형상은 모두 네모난 모습이다. 그리하여 대칭의 미를 잘 나타낸다. 진나라때부터 명청에 이르기까지 황제, 왕후, 관서의 정식인장은 모두 방형이다.

 

<대명회전>과 <대청회전>에는 인장규격과 크기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황제, 황후, 태후, 태자, 제왕의 도장은 "보(寶)" 혹은 "새(璽)"라고 한다. 옥(玉)이나 금(金)으로 만든다. 인뉴(印鈕)는 반룡(盤료龍), 교룡(交龍), 준룡(蹲龍) 혹은 거북(龜)이다. 정일품에서 정구품까지의 관원의 인장은 은(銀) 혹은 동(銅)으로 만든다. 도장의 변의 길이는 3촌4푼에서 1촌9푼까지이다. 두께는 1촌에서 2푼2리등 서로 다르다. 문관의 인뉴는 모두 직뉴(直鈕)이고, 단지 어사의 인뉴의 위에는 구멍이 있어 휴대하기 편하게 하였다. 총독, 장군등 고위무관의 인수(印綬)는 호뉴(虎鈕)이다. 명청때 조선, 안남, 유구등의 국광과 몽고 티벳, 회족의 왕공에 보낸 인장은 모두 금은인(金銀印) 혹은 은인(銀印)이다(조선국왕에게 보낸 것은 금인(金印)이었다) 인뉴는 거북 혹은 낙타이다.

 

비록 현재는 청옥의 가격이 백옥이나 벽옥보다 싸지만, 고대의 도장에서 청옥의 지위는 백옥보다 높았다. 명나라초기의 육새(六璽)중 등급이 높은 천자지보(天子之寶), 천자신보(天子信寶), 천자행보(天子行寶)는 청옥으로 만들었다. 다음 등급의 황제지보(皇帝之寶), 황제신보(皇帝信寶​), 황제행보(皇帝行寶​)는 백옥으로 만들었다. 금새(金璽)는 등급이 더 낮았다. 주로 황후, 태후, 태자가 썼다. 금나라가 북송을 멸하고, 황궁으로 두 매의 청옥새(전국보(傳國寶)와 수명보(受命寶)), 14개의 백옥새, 9개의 금새를 가져간다. 

 

명청때 미입류(未入流) 관서아문의 인장을 "조기(條記)"라고 불렀는데, 구리로 만든 길다란 막대형(條形)의 도장이다. 비정식문건의 검인에 쓰는 도장을 "도기(圖記)", "도서(圖書)"등의 명칭으로 불렀다. 청나라때 영대대신, 팔기좌령과 각성 협령의 인장도 "도기"라고 불렀다. 청나라때 임시로 파견하는 관리인장은 장방형(長方形)인데, "관방(關防)"이라고 불렀다. 이 전통은 명나라초기에 시작되었다. 명태조는 각 포정사가 호부인장이 찍혀 있는 공백의 전량문서(錢糧文書)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대거 감옥에 집어 넣는다. 이를 "공인안(空印案)"이라고 부른다. 그후 관리들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반인(半印)을 사용하여 합쳐서 대조하여 확인하기 편하게 한다. 나중에는 장방형의 "관방"으로 발전한다. 

 

<대명회전>에 기록된 명나라의 전국보새는 24개이다. 그중 17매는 명나라초기에 제작했고, 7매는 가정연간에 제작했다. 이들 보새는 각각 서로 다른 경우에 사용했다. 예를 들어, 하늘에 제사지낼 때 쓰는 "황제봉천지보", 조서를 내릴 때 쓰는 "황제지보", 여러 신들에게 제사지낼 때 쓰는 "천자지보", 병력을 이동시킬 때 쓰는 "황제신보", 번방(邦)의 병사를 징발할 때 쓰는 "천자신보", 책봉하사용으로 쓰는 "황제행보", 번방에 책봉할 때 쓰는 "천자행보"등이 있다

 

청나라의 전국옥새는 건륭제때 가장 완비된다. 대체로 명나라를 본떴는데, 다만 "대청사천자보(大淸嗣天子寶)"를 추가했다. 그리하여 25개 보새가 된다. 이는 교태전에 보관했다. 그외에 건륭제가 가경제에게 황위를 넘겨준 후, 다시 청옥으로 "태상황제지보(太上皇帝之寶)"를 만든다. 이는 정삼품이상의 관리를 임명할 때 썼는데, 다만 이 보새는 단지 1대(代)만 사용하고 끝난다.

 

청왕조 각황제가 제작한 "고희천자지보(古稀天子之寶)", "십전노인지보(十全老人之寶)", "가경어람지보(嘉慶御覽之寶)", "어상(御賞)"등의 인새는 대부분 서화를 검인하는 용도로 쓰는 한장(閑章)이었다 그래서 형태는 반드시 방형이 아니었다. 그러나 함풍제가 열하 피서산장에서 임종할 때, 일찌기, "어상"과 "동도당(同道堂)"(원명원내의 한 건축물 명칭)이라는 두 개의 한장을 황후 뉴후루씨와 황자 재순(동치제)에게 주어 유지를 반포하는 증빙이 되게 한다. 재순의 나이가 어려서, "동도당" 인장은 그의 생모인 서태후가 자신의 손에 장악했고, 수렴청정의 인신이 되어 동치12년까지 계속 사용했다.

 

1912년 원세개가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한 후, 일찌기 총통부 정사당 인주국(印鑄局)을 설치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중화민죽지새(中華民國之璽)", "봉책지새(封策之璽)", "영전지새(榮典之璽)", "대총통인(大總統印)"과 "육해군대원수지인(陸海軍大元帥之印)"의 5개의 인새를 제작한다. 1915년 원세개가 황제을 칭할 때 다시 제국의 옥새를 제작한 바 있는데, 황금으로 주조한 "중화제국지새(中華帝國之璽)"와 "황제지새(皇帝之璽)"가 있다. 그리고 특별히 만든 "탄응천명(誕膺天命), 경조무강(慶祚無疆)"의 옥새도 있었다.

 

일본과 한국의 인새

 

1927년 국민정부가 북벌을 완성하여, 전국을 통일한 후, 기존의 인새를 모조리 소각시킨다. 그리고 5개의 새로운 국새(國璽)를 제작한다. 설계한 크기는 원세개시기의 옛 국새보다 컸다. 다만 적합한 옥재료를 구하지 못하여 겨우 2개만 제작한다. 각각 버마에서 구매한 청옥으로 제작한 "중화민국지새(中華民國之璽)" 및 신강주석 김수인(金樹仁)이 바친 화전(和田) 양지옥(羊脂玉)으로 제작한 "영전지새(榮典之璽)"이다.

 

전자는 국서, 비준서, 접수서, 전권증서, 영사증서등 관방문건에 날인하는데 썼고; 후자는 훈장,훈위를 발급하는 전용으로 썼다. 나머지 3개의 옥새는 지금까지도 제작기록을 찾을 수 없다. 1940년 왕정위의 친일정부에서도 구리로 "중화민국지새"를 제작한 바 있다.

 

동아시아국가는 전통적으로 인새를 권력을 상징으로 보았다. 명청 내지 민국시기의 관인의 관리는 아주 엄격했다. 민국시대 모든 관청의 인장은 남경의 국민정부 문관처 인주국에서 제작하여 발급했다. 구인(舊印)은 한쪽 귀퉁이를 잘라낸 후 봉인했으며, 인주국에 올려보내어 소각시켰다. 명청시기에도 유사한 규정이 있었다. 관인의 제작과 소각을 담당한 부서는 예부의 주인국(鑄印局)이었다.

 

명나라가 조선, 유구, 안남에 보낸 인신(印信)은 청나라때 모조리 소각시킨다. 그리고 청나라의 예부에서 따라 만주어,한어가 합쳐진 새로운 인신을 발급해서 보낸다. 근대일본이 유구와 조선을 병합한 후, 역시 청나라가 양국에 보낸 금으로 된 "조선국왕지인"과 은도금의 "유구국왕지인"을 소각시킨다. 청나라가 월남에 보낸 "안남국왕지인"은 20세기초 프랑스 인도지나지부에서 소각시킨다.

 

일본과 한국에서, 공사인장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지고무상의 법적 효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반드시 잘 보관해야 한다. 일본, 한국 양국은 중요문건에 검인하는 도장은 전문적인 정부기관에 등기하도록 한다. 그 후에 "인감증명서"를 발급한다. 이를 실인(實印, 일본)과 인감(印鑒, 한국)이라 한다. 등기되지 않은 도장은 "인인(認印)" 혹은 "도장(圖章)"이라 부른다. 이는 비정식적인 경우에만 쓴다. 양국의 국인인 "대일본국새"와 "대한민국국새"는 전통적인 정방형의 인새이다.

 

한국에서 현재 사용하는 국새는 이미 제5대이다. 제1대 한국국새는 옥전용뉴(玉篆龍鈕)이며, 새문은 한자로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였다. 1962년 박정희의 '군사혁명'후 이 국새는 행방불명이 된다. 제2대국새는 은주귀뉴(銀鑄龜鈕)였다. 1998년까지 사용했다. 제3대국새는 봉뉴(鳳鈕)였다. 2008년 균열이 발견되어 쓰지 않게 된다. 제4대국새는 2007년에 주조했다. 주조한 장인이 황금을 빼돌리는 스캔들이 일어나 쓰지 않게 된다. 그후 2011년 새로운 국새를 주조하는데 무게는 3.38근(금 2.6킬로그램을 사용)이다.

 

구식공문에 날인할 때, 도장의 윗부분이 연도(예를 들어 '함풍육년", "광서십오년", "민국이십삼년"등)의 첫번째 숫자에, 혹은 도장의 아래부분을 월의 자리에 찍었다. 이것을 "제년개월(齊年蓋月)"이라 한다. 명청황제의 어새는 수킬로그램에 이르렀다. "중화민국지새"도 무게가 3.2킬로그램이다. 크기와 중량이 너무 커서, 검인때 통상적으로 "도개인(倒蓋印)"의 방법을 쓴다. 옥새를 거꾸로 고정해놓고, 인주를 바르고(평소에는 주홍, 국상때는 파란색을 씀), 그 후에 공문의 정면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도장에 누른다. 그리고 소상아척(小象牙尺)으로 누른다. 명청시기 궁중에서 옥새를 사용한 후, 꿀, 약쑥, 백급(白芨), 쥐엄나무(皂荚​)등을 끓인 약수로 황극문(태화문)에서 "옥새를 씻는다" 주사인니가 옥에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1949년이전에 중국에서 보편젹으로 사용하던 방형공장(方形公章)의 예외상황중 하나는 원형의 우정인장(郵政印章, 郵截)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해관인장(日截) 있었다. 후자는 해관의 서류에 찍는 것이다. 이런 일절은 쌍선원형(雙線圓形)이고 위에는 "중국해관"의 영문이 쓰여 있고, 중간에는 연월일, 아래에는 지명이 있다. 민국시대, 해관총서 및 북경, 한구, 진강, 대고, 우장등지의 해관일절은 모두 30여가지가 있었다.

 

그외에 고대중국에서 오늘날의 개인서명과 유사하게 법률효력을 지닌 서명방식이 있었다. 이를 화압(花押)이라고 부른다. 남송 주밀(周密)은 <계신잡식>에서 이렇게 썼다: "고인들의 압자는 화압인이라고 부른다. 이는 이름을 약간 화려하게 썼다. 예를 들면 위척오운체(韋陟五雲體)가 그것이다." 주밀이 말한 이 '고'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옛날일까. 송나라의 누군가는 북제, 남량까지 고증했고, 어떤 사람은 전국시대의 전영(田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화압은 송나라때 널리 응용된다. 지폐와 공공기물에도 나타난다. 송휘종의 그림에도 유사하게 길게 늘여쓴 "천(天)"자의 화압이 있다. 그 뜻은 "천하일인"이라는 것이다. 송태조 조광윤이 즉위하기 전의 화압은 "광(廣)"자의 안에 아랍숫자 5를 쓰는 도안이다. 아래에는 횡선을 하나 그렸다: 송태종은 즉위전에 쓴 화압이 "인(仁)"자의 횡선을 하나 추가하는 것이었다. 송철종의 화압은 상립하건(上立下巾)이다. 송녕종이 화압은 "가(可)"자의 마지막 세로로 긋는 필획을 생략한 것이었다.

 

명나라때 숭정재 주유검의 화압은 "유검(由檢)" 두 글자와 유사했다. 공친왕 부위(溥偉)의 아들 육첨의 회고에 따르면, 만주국시대 부의가 매번 사람을 보내어 관내 천진의 은행에서 예금, 서화를 인출할 때, 모두 증빙위에 자신의 화압을 서명했다고 한다. 1840년 중국과 영국간의 <남경조약>은 아주 재미있는 샘플이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서양식의 화칠인장(火漆印章)과 서명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청왕조의 만주어 관방과 기봉장(騎縫章)도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측 체결대신 기영, 이리포등의 화압도 볼 수 있다. 

 

뱡형에서 원형으로

 

현재 국가박물관에 수장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중앙집행위원회"인은 중국최초의 원형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인장은 1931년부터 1937년까지 사용되었고, 소비에트구에서 징수한 백은으로 주조했다. 인뉴는 나무손잡이이고, 인장의 아래위로 호형으로 예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中華蘇維埃共和國)"과 "중앙집행위원회"의 두 행의 글자가 보인다. 글자의 양쪽 끝에는 각각 오각별이 있다. 인장의 중간에는 지구와 낫, 도끼의 도안이 있으며 양쪽으로 낱알이 둘러싸고 있다. 위에는 오각별이 하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문화재감정 혹은 경매기구에서 전시하는 각종 더욱 이른 원형도장들도 있다. 이들 '중화민국"이라는 각종 공장의 시간은 1912년에서 1949년까지이다. 만일 세부적인 점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컴퓨터가 나온 이후에 나타난 글자체들이다. 그리고, 기구명칭은 1957년이후에야 나타난 한어병음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위조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이같은 서양식 인장의 전신은 화칠봉인이다. 초기에 밀랍과 수지를 섞어서 만들었다. 중세이훙 송진, 충교(蟲膠), 백악(白堊)과 석고(石膏) 그리고 용연향과 사향향료를 섞어서 만들었고, 그 위에 도장을 찍었다.

 

화칠인장은 중요서신을 밀봉하는데 쓰였을 뿐아니라, 조약, 계약, 토지계약, 증서, 학력증서, 유언장등 법률문서에도 모두 화칠인장을 썼다. 방법은 통상적으로 양피자문서의 말미에 구멍을 하나 잘라내고, 실 혹은 양피지의 끈을 통과시키게 한 다음 양쪽을 묶는다. 그리고 화칠로 하나로 붙여버린다. 그 후에 인장을 찍는다. 만일 위조자가 화칠봉인을 하나의 문건에서 떼내려고 하면 화칠은 파쇄된다. 이런 방식은 1919년에 체결한 베르사이유조약때까지도 여전히 쓰였다.

 

인장은 서방에서는 왕권과 주권을 상징하는 표지중 하나로 여겨졌다. 군주가 발급하는 조서에는 황금으로 봉인했고 이를 "황금조서"혹은 "금새조서"라고 불렀다. 역대교황은 모두 전용의 인장반지가 있다. 도안은 그리스도교인 베드로(제1대 교황으로 봄)가 물고기를 잡는 모습이고, 그 위에는 교황의 칭호가 있다. 매번 교황이 서거하면 이 인장도장은 추기경이 있는 곳에서 교황청 총사고에서 부숴버린다. 새로운 교황이 즉위하면 새로은 인장반지를 만들어 바친다.

 

19세기 중엽부터 서방의 공상업이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화칠봉인과 인장도장은 일상적인 필요에 맞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금속 혹은 고무로 만든 손잡이가 있는 원형도장이 나타난다. 먹에 묻힌 후 문서에 찍었다.

 

지금 영미계국가에서 개인서명이 완전한 법적효력을 지닌 것으로 취급한다. 다만 중부유럽과 동부유럽국가에서는 문건, 계약체결시 인장의 법률효력이 서명보다 여전히 높게 취급되거나 최소한 동등하게 취급된다. 이것은 오늘날 중국,일본,한국의 상황과 유사하다. 오늘날의 중국에서, 개인(자연인)의 서명도 법률효력이 있는 것으로 본다. 다만 1980년대이전에는 많은 경우에 사인인장만 인정했다. 예를 들어 은행에 예금하거나 출금할 때 혹은 직장에서 급여를 지급할 때 등의 경우.

 

서방국가에서 관인에는 문자외에 통상적으로 휘기(徽記)를 포함한다. 인장의 배치는 휘기를 중심으로 한다. 문자는 상하에 두 줄로 좌에서 우로 휘기를 감싸고 배치된다. 그래서 많은 인장은 원형이다. 서방인장의 원형배치는 오늘날 세계 대다수 국가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 한국과 대만등은 소수의 예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초기, 일찌기 북경유리창 동고당의 잘월승은 "중화인민공화국중앙인민정부지인"을 제작한 바 있다. 1949년 10월 31일 사용된다. 그것은 변의 길이기 9센티미터인 직뉴동인이다. 국가주석과 중앙인민정부에서 발급하는 각종 법령과 공문에 찍었다. 이전의 인새에 사용하던 전서와는 달리, 이 인장에서 사용한 글자체는 송체자이다. 1954년 헌법을 반포한 후, 이 인장의 사용은 정지되고 국무원에 교부되어 현재 중국국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전반기에 신정권의 각급기관과 지방정부에서 사용하는 인장은 모두 방형인장이다. 다만 1955년이후 통일적으로 원형공장으로 바꾼다. 1955년 국무원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국무원의 국가기관인장에 관한 규정>을 반포하고 국가기관의 공장을 원형으로 고치기로 결정한다. 성,부급이상의 공장중앙에는 국휘를 넣고, 나머지 기관의 공장중앙에는 오각별을 넣는다. 그리고 각급인장의 크기도 규정했다.

 

그중 등급이 가장 높은 것은 국인(國印)이다. 직경은 7센티미터이다. 중앙에 국휘가 있고, 국휘외에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7글자가 있다. 사용시 국무원은 중앙인민공화국주석에게 보고하고 찍는다. 다음으로 국무원, 국방위원회,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의 인장으로 직경 6센티미터이다. 이 문건은 다른 각급정부와 기관의 인장양식에 대하여도 규정하고 있고, 전국의 공장은 통일적으로 원형으로 바뀐다.

 

그 이후, 인장의 격식을 규범화한 문건으로는 1971년 중앙판공청이 내놓은 <각급당조직인장문제에 관한 규정>이 있다. 그리고 1979년, 1993년과 1999년 <국무원의 국가행정기관, 기,사업단위인장에 관한 규정>등도 있다. 이들 문건에서는 각급 당조직인장의 중앙에는 낫과 망치를 넣고, 행정직능이 있는 국무원 부,위, 주외국대사관, 그리고 성, 자치구, 시, 현의 정부공장의 중앙에는 국휘를 넣는다. 지구행정공서와 향진정부, 행정직능이 없는 기관, 기업, 회사, 사회단체의 공장의 중앙에는 붉은 오각별을 넣는다. 인문은 모두 간체화된 송체자(자치구에는 민족문자를 추가할 수 있음)이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둥글게 쓴다.

 

이외에 이들 공문은 각급단위 공장의 직경, 인변(印邊)의 너비에 대하여도 규정하고 있다. 

 

당장의 직경은 일률적으로 4.2센티미터이다. 원변너비는 0.1센티미터이다. 국무원인장의 직경은 6센티미터이고, 국무원 각 부,위, 성,직할시, 자치구정부의 인장은 직경이 5센티미터이다. 국무원 직속기구, 자치주, 시, 현, 구정부의 인장은 직경이 4.5센티미터이다. 국무원의 사, 국, 주외국대사관 그리고 향진정부의 인장은 직경이 4.2센티미터이다. 각기관단위, 공장, 광산, 학교, 상점등 기업사업단위의 인장은 직경이 모두 4.5센티미터를 넘을 수 없다. 유한책임회사장은 직경이 4센티미터이고, 원변의 너비는 0.1센티미터이다. 공상기업의 계약장은 직경이 5.8센티미터이고, 원변의 너비는 0.15센티미터이다.

 

1955년에 공장을 방형에서 원형으로 개정했는데, 주요 이유는 1954년 신헌법의 반포때문이다. 공장의 문자는 국휘, 당휘 혹은 오각별을 둘러싸게 된다. 이렇게 구성해야 더욱 합리적이고 아름다운 도장의 구도가 나온다. 그리고 소련과 같은 '선진국가'의 방식과 맞출 수 있었다. 지금 중국에서, 단지 1곳에서만 정방형의 관인을 볼 수 있다. 즉 인민폐의 뒷면에 찍힌 '행장지인"과 "부행장인"이다. 그리고, 현재 유통되는 제5판 인민폐에는 "부행장인"이 취소되었다. 그저 쥣면의 오룬쪽아래에 "행장지인"의 도장만 남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