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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십이생초(十二生肖)의 쥐와 소: 대(大)와 소(小)의 전화(轉化)

by 중은우시 2015. 3. 26.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쥐(鼠)가 십이생초에 들어간 것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문제가 음미할 만하다. 쥐는 우리가 가장 잘아는 동물인가? 왜 제일 앞자리를 차지했는가? 


첫번째 문제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용이 어떤 모양인지는 모를 수 있고, 호랑이를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는 오금육축(五禽六畜)을 기를 능력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쥐를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사 오늘날 이미 공업사회에 들어선 도시에서도 모든 야생포유동물이 인류에게 쫓겨났지만, 쥐는 그래도 남아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라면 쥐는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쥐는 인류에 의지하여 생존한다고.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쥐와 인류의 먹거리는 같다. 그래서 쥐는 인류와 같이 생존한다고 할 수 있다. 믿기지 않으면 산쥐, 들쥐를 보라. 인류를 떠나서도 여전히 생존하지 않는가. 반대로 인류는 여러가지 쥐를 없애는 도구를 발명했다. 이는 사람과 동물의 관계에서 전혀 없던 일이다. 그러나 시종 쥐에 대하여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인류는 비록 이 쥐를 싫어하지만, 쥐의 생존능력은 인정하는 것이다. 특히 민간에서, 사람은 쥐를 싫어하는 동시에, 어느 정도 존경도 한다. 쥐처럼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동물에게도 중국어에서는 "노(老)"자를 붙여주지 않았는가.(쥐를 노서(老鼠)라 부름)


가장 익숙하면서도 또한 존경받을 점이 있으니, 쥐가 십이생초에 드러갔다고 하여 이상할 것은 없다.


두번째 문제, 쥐는 왜 가장 앞자리를 차지했을까? 한가지 견해에 따르면, 쥐가 자시(子時)에 활동하고, 하루는 자시에 시작하므로, 자서(子鼠)가 서로 짝이 맞아서 첫번째가 된 것이라고 한다. 이 첫번째 견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시간에 쥐를 제외한 나머지 포유동물은 모두 잠을 자고 있으니까. 다만 농촌생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집쥐가 가장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시간은 황혼후 여명전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런 견해는 그다지 당당하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같다. 또 한가지 견해로는 이런 것이 있다. 쥐와 소가 누가 더 큰지를 가지고 말싸움을 벌였다. 그때 쥐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길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자는 것이다. 그 결과 쥐가 지나가지 사람들이 모두 "쥐잡아라(打老鼠)"고 소리쳤다. '타노호(打老鼠)'와 '대노호(大老鼠)'는 발음이 같다. 그래서 쥐가 제일 앞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런 후세문학창작적인 해석은 확실히 원래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쥐가 첫째를 차지한 진정한 원인은 무엇일까? 진정한 원인은 그것이 작기 때문이다. 자(子)의 의미는 작다는 것이다. 작은 사물은 '자(子)'라고 부르는 것이 많다. "....자(子), 소칭야(小稱也)". 시작은 작고, 처음은 작다. 처음 나온 것은 반드시 작다. 자시는 하루에서 시작하는 때이다. 그러니 작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아이의 출생을 보면서, 자신의 처음은 작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현재는 커졌지만, 이것은 원래 작은 데서 점차 커진 것이 아닌가? 다시 십이생초를 보자, 어느 것이 쥐보다 작은가? 작은 것은 왕왕 군체가 크다. 이처럼 없는 곳이 없고, 좇아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은 분명히 최대의 군체일 것이다. 이것때문에 쥐가 첫째를 차지한 것이다.


십이생초중 소가 가장 크다. 육지동물중에서 소보다 큰 동물도 있다. 예를 들어, 코끼리, 물소, 하마등등. 다만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동물은 소이다.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래서 비록 코끼리는 길상(吉祥)을 대표하지만, 십이생초에 들어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익숙한'이라는 기준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라는 동물은 너무나 진귀하다. 천지귀신과 우리의 그 신분이 있었으나 이미 죽어서 땅에 묻힌 조상들도 모두 그것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소는 희생될 수밖에 없다. 농경시대, 소는 실제로 너무나 중요했다. 누구집이든 소 한 마리만 있으면 황무지를 더 개간할 수 있었고, 더 많은 땅에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며, 더 많은 양식을 거둘 수 있었다. 생활이 즉시 개선되는 것이다. 이 소는 너무 적었다. 일반백성들이 그것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진귀하다고 하여 희귀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도 않았다. 우리의 집에는 없어도 옆집에는 있다. 위로는 왕공귀족, 아래로는 평민노예까지 소를 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소가 십이생초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 정상적인 일이다. 단지 이 가장 큰 소는 첫번째를 차지할 수 없었다. 최대가 되면 오히려 좋지 않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만일 가장 큰 소를 첫째에 놓는다면, 그것은 바로 천하제일이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은 것을 첫째에 두고, 큰 것을 뒤에 두는 이런 우의(寓意)는 깊이가 있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준다. 한자에서 "영(零)"은 십백천만같은 "정(整)"에 상대되는 말이다. 가장 작은 숫자는 1이다. 그러나 누가 1이 가장 크다고 하겠는가.


현실생활에서, 백성은 작다. 작은 것은 쥐와 마찬가지로 무시당하는 사람들은 '쥐새끼같은 무리들(鼠輩)"이라고 불렀다. 제왕장상(帝王將相)은 크다. 큰 것은 소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나 설화에서 대단한 인물이다. 다만 소가 아무리 귀하더라도 사람이 부리는 것이다. 마치 왕후도 국가를 위하여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아서, 한 군왕이 그의 백성을 부리지만, 백성의 인심향배가 다시 군왕의 지위가 공고한지여부를 결정한다. 군왕은 국가를 위하여 힘쓰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반대편으로 향하여 백성이 된다. 이것은 바로 백성도 군왕을 부린다는 말이 아닌가. 바로 맹자가 말한 것처럼, 백성이 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왕이 가볍다는 것이다. 즉, 백성은 쥐이고, 군왕은 소이다. 개체로서 대소는 분명하다. 그러나 군체로서 소와 대는 분명 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