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사의선생(蓑衣先生): 태감(太監)의 조사(祖師)

by 중은우시 2013. 2. 4.

글: 화려(華麗)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삼백육십업종에 업종마다 자신의 조사(祖師)가 있다고 한다. 목수들은 노반(魯班)을 조사로 모시고, 창극을 하는 사람은 당명황(唐明皇, 당현종)을 조사로 모시며, 거지들은 주원장(朱元璋, 명태조)을 조사로 모신다. 그 목적은 자신의 업종의 '명예감'과 '성공사'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중국봉건사회의 태감(太監, 환관)도 자신의 조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별명이 "사의선생"인 유명한 도사(道士)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찌기 '정신(淨身, 거세)'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황제에 의해 "장수진인(長壽眞人)'에 보해진 도교 전진도 용문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금, 원이후 명성을 널리 떨쳐서 선남선녀들이 아침저녁으로 절하는 사람이다.

 

사의선생은 누구인가? 그의 성은 구(丘 혹은 邱)요 이름은 처기(處機)이다.  자튼 통밀(通密)이며, 호는 장춘자(長春子)이고, 산동 등주(登州) 사람이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수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섬서성 봉상의 번게에 동굴을 짓고 살며 칠년동안 누워서 잠을 자지 않으면서 한여름이건 한겨울이건 모두 사의(도롱이)를 입고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살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일년 사시사철 이렇게 입고 온 몸에 털이 숭숭한 것을 보고는 이런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사의선생은 금말원초때의 사람이다. 이 시기는 전진도가 창건되던 때이다. 이 도파의 개창초기에는 그저 '난세에 생명을 구차하게 부지하기를 원했고, 제후로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숨어서 도를 닦던 조직이다. "세상에서는 유가도 불가도 아리나고 여기고 점점 도교로 보기 시작했다" 기실 명목상 도교라 칭했지만, 그들의 수행방식은 불교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중 하나의 주요한 표시는 전진도의 도사는 불가의 화상과 마찬가지로, 출가이후, 계를 받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평생 결혼해서는 안된다. 사의선생은 굳겉하게 이 몇 가지 원칙을 지켰다.그리고 다른 도사들이 하지 못한 일도 한 가지 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그는 칠정육욕과 단절하기 위하여 아예 시비의 뿌리를 잘라버리기 위해서, 스스로 손을 써서 고환을 잘라버린다. 이것이 아마도 그가 태감들로부터 조사로 모셔지게된 주요원인일 것이다.

 

사의선생은 비록 은거수양에 주력했지만, 나중에는 정치에 나선다. 정치에 관여한 이후 영광스러운 성공을 거둔다. <원사.구처기전>에 따르면, "태조(징기스칸)가 서정(西征)에 나섰을 때, 매일 전투를 하고 있었다. 구처기가 말하기를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해결방안을 붇자, 경천애민(敬天愛民)의 근본을 얘기한다. 장생의 도를 묻자, 청심과욕(淸心寡慾)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태조는 그의 말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좌우에 글을 쓰게 하여 여러 아들에게 교훈으로 삼으라고 했다." 그는 징기스칸에 매우 충성을 다한다. 그리고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이용하여 많은 백성을 구하여 그들을 죽음에서 구해준다. 징기스칸은 그를 매우 존경했고, 그에게 금호부(金虎符)를 내린다. 장춘궁(현재의 북경 백운관)에 머물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진교는 크게 흥한다. 그가 전파한 용문파는 전진도중 최대의 지파가 된다."

 

사의선생은 비록, 금, 원시기에 이미 명성을 떨쳤지만, 그가 태감들로부터 받들어지게 된 것은 명나라 중엽이후이다. 이 시기에 태감들이 활약을 한다. 그들은 어렴풋이 들은 바가 있었다. 백운관의 장춘진인이 고환을 잘라버린 적이 있고, 자신들과 비슷하였다고. 그래서 매년 정월 19일 "연구절(燕九節, 구처기의 생일)'이 되면, 적지 않은 태감들이 백운관으로 가서 놀았다. 처음에는 그냥 장춘진인의 조상을 보고, 향을 태웠는데, 나중에 이것이 매년 행사로 되면서 '연구절'이 되면 백운관은 붐비게 된다. 크고 작은 태감들이 모두 이곳에 절하러 온다. 여기에 백운관은 자금성에서 멀지 않으므로 태감들이 오기에 편리했다. 점점 백운관은 태감의 '가묘(家廟)'가 된다. 사의선생은 태감조사의 지위가 이렇게 확립받는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태감을 쓴 것은 한나라때부터라고 한다. 태감들이 사의선생을 조사로 모신 것은 약간은 억지스럽다. 그래서 태감들은 그저 자신들이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고, 공개적으로 떠들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