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귤현아(橘玄雅)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씨는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다. 그중 하나는 기원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애신각라씨의 조상은 부쿠리옹순(布庫里雍順)과 선려 푸쿠룬(佛庫倫)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본다. 그리고 애신각라 성은 최종적으로 흥조직황제(興祖直皇帝) 푸만(福滿)의 후예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실제상으로 애신각라성씨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고 지금까지도 만족할 답안은 찾지 못했다. 당대 학술계에서는 갖가지의 흩어져 있는 문헌을 고찰하여, 애신각라씨 내에도 여러 갈래가 있으며, 심지어 어떤 간래는 조선으로 가서 관직을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기재는 상당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정설은 확립되지 못한 것이다.
애신각라 성씨에 따한 각종 고증은 다음에 따로 얘기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청나라때 <옥첩>의 정의에 따라 인구를 계산하도록 하자. 바꾸어 발해서, 청나라때 승인된 '황족'에 대하여 말해보기로 하자.
태조가 거병할 때, 애신각라는 아주 적은 인구의 성씨였다. 남성은 약 100명이 되지 않았다. 청태종 시대에 이르러, 150명 가량으로 늘어난다. 산해관을 들어온 후, 황족인구는 급격히 불어난다. 성조 강희제때는 약 500명에 이르고, 청세종 옹정제때는 약 1000명가량이 된다. 청고종 건륭제의 전성기를 지나 가정,도광시기에 이르러 청나라황족은 이미 5000명에 가까워진다. 청나라황족이 마지막으로 족보를 만든 1937년에 세상에 살아있는 황족남성은 약 20000여명이다. 그중 종실각라의 비율은 4:3이다. 오늘날, 황족남성의 후예의 수량은 아마도 여전히 20000명가량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각종 운동과 정책(예를 들어 계획생육)을 고려하면 심지어 20000명이하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이 황족출신이라고 자신있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인터넷에 있는 하나의 자료에 따르면, 황족인구는 10여만명이라고 한다. 기실 이것은 데이타를 잘못 읽은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1937년 <애신각라종보>에 기재된 남성은 모두 14만여명이다. 주의할 점은 이 14만명은 300여년간의 모든 남성이고, 단순히 1937년에 살아있는 남성의 수량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비록 구체적인 데이타는 없지만, 당금 황족(종실과 각라)은 모두 약 20000명이다. 여성을 합하면 약 40000명가량일 것이다.
이들 황족후예는 주로 북경과 심양에 분포되어 있다. 이것은 청나라때 원래 양경제(兩京制)를 취했고 청나라황족, 특히 종실(宗室)은 모두 인신구속이 강했다. 전통적인 종인당안에는 사람의 이름 앞에 두 가지 표기가 붙는다. 하나는 표기가 없는 것이고, 그 뜻은 '북경에 거주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특수표기가 붙는 것으로 '성경거주(盛京居住)'인데 바로 심양에 산다는 것이다. 청황제 퇴위이후, 이런 구속은 해제되었다. 그래도 오늘날, 북경, 심양은 황족후예의 주요 분포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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