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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청나라황족의 기원에 관한 4가지 학설

by 중은우시 2014. 2. 9.

글: 귤현아(橘玄雅)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애신각라(愛新覺羅, 아이신줴뤄)라는 성은 선녀가 낳은 후예이다. 이것은 당연히 신화이다. 그러나 애신각라성의 기원에 대하여는 확실히 여러가지 의문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명청시기의 여진족 즉 만주족의 성씨(하라, 哈喇)와 금나라때 여진의 성씨는 계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명청때의 나라(那拉)는 금나라때의 나라(那懶)이고, 명청때의 뉴후루(鈕祜祿)씨는 금나라때의 뉘시례(女奚列)씨이다. 당연히 현재 볼 수 있는 명청의 여진-만주의 성씨는 80%이상을 금나라때 여진성씨에서 대응하는 성씨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애신각라는 서로 들어맞지 앉는 몇 안되는 성씨중 하나이다. 이것은 성씨의 기원에 대하여 더욱 신비스럽게 여겨지게 만든다.

 

현재 애신각라 성씨의 기원에 대하여는 대체로 4가지 견해가 있다. 이 4가지 견해는 각각 특색이 있고, 각각의 견해는 확실히 각각의 이치가 있다. 단지 현재로서는 확실한 증거로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첫번째 견해: 거지설(乞丐說)

 

거지설은 러시아학자 사록국(史祿國)이 내놓은 것이다. 그는 <만족의 사회조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각라(覺羅)씨와 각극탁(覺克托, giohoto)는 의미가 비슷하다. 그 뜻은 '거지'라는 것이다. 만주족들의 해석에 따르면, 일찌기, 그들은 아주 가난해서 그저 구걸을 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록국은 각라와 각극탁은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어쨌든 사록국의 견해는 비교적 완곡하고 확정적이지 않은 견해이다. 이것은 네 가지 견해중에서 가장 '억지로 갖다 붙인' 것에 속한다. 당대학자중 거지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비교적 유명한 사람으로는 동북에서 자비로 만주족 성씨를 연구한 조선생이다. 그는 이얼건궤뤄(伊爾根覺羅)의 후예이고, 거지설을 지지한다. 그리고 관련 각종 인용을 가지고 해석한다.

 

두번째 견해: 조씨설(趙氏說)

 

이 학설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장진언(張縉彦)의 <영고탑산수기>이다. 장진언은 명나라때 관리이고, 청나라에 투항한 후 순치17년에 사건으로 인하여 영고탑에 유배된다. <영고탑산수기>는 바로 그가 영고탑에서 기록한 서적이다. 그중 이런 내용이 있다: "교라(交羅, 즉 覺羅)는 만주어로 조(趙)이다." 이것은 당시 영고탐 사람들의 언어에서 알아낸 것이다. 이것은 '실록'의 가치가 있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역사에서 송휘종, 송흠종 두 황제가 '오국성(五國城)'으로 옮겨졌는데, 이 오국성은 바로 청나라때의 "삼성(三姓)"이다. 즉, <태조고황제실록>에 기록된 애신각라씨의 조상은 삼성패륵(三姓貝勒)의 암합(暗合)이라는 것이다. 이 자체는 우연의 일치이다. 다만 당시의 나이든 기인(旗人)들은 비교적 조씨설을 믿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영생(瀛生)으로 순승군왕의 갈래인 종실이다. 그는 인터뷰때 이 견해를 좋아했다.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조씨설"은 청나라때부터 존재했다. 그리고 여러 성씨를 갖다 붙였다. 예를 들어, <소정잡록>에서는 철보(鐵保)(동악씨. 董鄂氏)는스스로 '그 선조는 바로 영종월왕의 후예이고, 나중에 금나라사람들이 이주하면서 동악에 거주하여 그 땅을 성씨로 삼았다." 고 하고, 또한 요원지(姚元之, 가경제때의 인물)는 <죽엽정잡기>에서 허저인(赫哲人)이 민각라(民覺羅)라고 하면서, "스스로 송나라황실 후손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같은 책에서는 또한 "흑진(黑津)은 휘흠(徽欽, 송휘종, 송흠종)의 휘가 와전된 음이다." 등등. 이를 보면 조씨설이 범람했음을 알 수 있다.

 

세번째 견해: 협곡설(夾谷說)

 

협곡설은 정천정(鄭天挺)이 내놓은 것이다. 그의 <애신각라득성계의(愛新覺羅得姓稽疑)>에 나온다. 정천정은 이렇게 말한다. "청나라때 소위 각라씨는 <금사>의 협곡씨인 것으로 의심된다." 건륭제는 금왕조를 숭상하기 이하여 건륭때 <금사> 속의 여진인명과 여진어를 만주어 혹은 한자로 주석을 달았다. 정천정은 비교검토를 거쳐, <금사>의 협곡씨는 <팔기씨족통보>에서 주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건륭때 <금사>의 "협곡"의 표음(標音)은 "객이고(喀爾庫)"이다. 정천정은 한어발음의 각ㄷ에서 추론하여 이 두 개 단어는 관계가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청고종이 <어해>를 정할 때, 만주의 희귀성인 고이객(庫爾喀)을 협곡씨라고 하여 스스로 숨긴 것이다'라고 여긴다.

 

이런 '협곡설'은 최근 몇년간 만주족웹사이트에서 시끄럽게 떠들었다. 특히 정천정의 소위 '의심된다'는 말은 '확실하다'로 바뀌어져 직접적인 사실인 것처럼 선전되었다. 정천정 ㅅ신은 확실한 증거를 내놓고 협곡씨가 각라씨라고 하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건륭때 <만주원류고>에는 <금사성씨고>가 있는데, 그중 협곡과 고리협(古里夾)을 똑같이 "과얼자(瓜爾佳)"의 전음이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협곡과 각라가 같은 성씨인지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네번째 견해: 교로설(交魯說)

 

"교로설"은 계종(啓孮)(영왕의 갈래인 대종)이 내놓은 것이다. <애신각라씨삼대만학논집>의 <애신각라씨지미>라는 글에 나온다. 계종은 만주어와 여진어에 능했다. 그는 <연대여진진사제명비> 제19행에서 "교로호속노개(交魯胡速魯改)"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교로호속노개는 여진어로 "giao ru ha sur gai"이다. 그리고 '부방(附旁)'에는 '교로홀통길(交魯忽通吉)'이 있는데 여진어로 'giao ru hutong gi"이다. 계종은 여기에 나타난 "교로씨"가 나중의 각라씨라고 본다. 이 견해는 발음에서 추정한 것이다. 문제는 금나라때 여진성씨보에 교로씨에 관한 관련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발음상으로 추정하는 것은 약간 맹목적이다. 그래서 더욱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최근 들어 어떤 견해에는 애신각라가 명나라 중후반기에 형성된 하나의 비혈연적인 독립성씨라고 본다. 이 견해는 비록 많은 문제를 해석해주기는 하지만, 결국 증거가 부족하다. 그래서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애신각라 성씨의 기원에 대하여는 학설이 분분하고 아직까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