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귤현아(橘玄雅)
전통적으로 말하자면, 애신각라라는 성은 선녀가 낳은 후손이다. 이것은 물론 신화이다. 그러나 애신각라성의 기원에 대하여는 확실히 여러가지 의문점이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명청의 여진-만주 성씨(하라)와 금나라때 여진의 성씨는 계승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명청때의 나라(那拉)씨는 금나라때의 나라(那懶)씨이고, 명청의 뉴후루(紐祜祿)씨는 금나라때의 뉘시례(女奚列)씨이다. 현재 볼 수 있는 명청여진-만주의 성씨중 80%이상은 그에 대응하는 금나라때의 여진성씨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애신각라는 대응하는 성씨가 없는 소수의 성씨중 하나이다. 이것은 성씨의 기원에 대하여 더욱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점이다.
현재 애신각라 성의 기원에 대하여는 대체로 4가지 견해가 있다. 이 4가지 견해는 각각 특색을 지니고 있고, 각각의 주장은 나름대로 이치에 맞기도 하지만, 현재로서는 더욱 강력한 증거로 뒷받침해준다고 할 수는 없다.
아래에서는 나누어 설명해보기로 하자.
첫째, 거지(乞丐)설
거지설은 러시아학자인 사록국(史祿國)이 내놓은 것이다. 그는 <만주족의 사회조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각라(覺羅)는 각극탁(覺克托, giohoto)와 유사하고 의미는 '거지'이다. 만주족은 이렇게 해석한다. 초기에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가난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여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록국은 각라와 거지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결국 사록국의 표현은 비교적 완곡했고 그 자체로 확실한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4가지 견해 중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견해이기도 하다. 당대학자중 거지설을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교적 유명한 사람으로는 동북지방에서 자비로 만주족성씨를 연구하는 조(趙)선생 뿐이다. 그는 이이근각라(伊爾根覺羅, 이얼건줴뤄)의 후손이고 거지설을 지지한다. 그리고 관련 각종 자료를 끌어모아 해석한다.
둘째, 조씨(趙氏)설
이 주장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장진언의 <영고탑산수기>이다. 장진언은 명나라때 관리이다. 청나라에 투항한 후 순치17년 사건에 연루되어 영고탑에 유배된다. <영고탑산수기>는 그가 영고탑에서 기록한 서적이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교라(交羅, 覺羅를 말함)의 만주 음은 조(趙)이다" 이것은 당시 영고탑 사람들의 언어에서 얻어낸 것이다. 그래서 약간의 '실록'의 가치가 있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역사에 따르면 송휘종, 송흠종 두 황제는 '오국성'으로 쫓겨나는데, 이 오곡성이 바로 청나라때의 '삼성(三姓);이라는 것이다. 즉, <태조고황제실록<에서 애신각라씨의 조상은 삼성패륵(三姓貝勒) 암합(暗合)이라고 쓰여 있다. 이 자체는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 다만 현재의 나이든 만주족들은 비교적 조씨설을 숭상한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생(瀛生, 순승군왕 갈래의 종실)이다. 그는 인터뷰때 이 견해에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조씨설'은 청나라때도 존재했다. 그리고 여러 성씨에 관련된다. 예를 들어 <소정잡록(嘯亭雜錄)>에 따르면, 철보(鐵保, 董鄂氏)는 스스로, '그 조상이 바로 영종월왕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금나라사람들에게 끌려가서 동악이라는 곳에서 살아서 그 땅을 성씨로 삼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요원지(가경제때의 인물)는 <죽엽정잡기에서 혁철(赫哲)인들이 민각라(民覺羅)라고 하고, '스스로 송ㅇ(宋)의 후예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같은 책에서는 또한 "흑진(黑津)은 바로 휘흠(송휘종,송휘종) 두 글자의 와음(訛音)이다"라고 했다. 이를 보면 조씨설이 범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협곡(夾谷)설
"협곡설"은 정천정(鄭天挺)이 주장했다. 그가 쓴 <애신각라득성계의>에 나온다. 정천정은 이렇게 말한다: "청나라때의 소위 각라씨는 <금사>에 나오는 협곡씨가 아닌가 의심된다." 건륭제는 금왕조를 숭상하기 위하여 건륭제때 <금사>의 여진인 인명과 여진어를 만주글 혹은 한어주음을 달아서 표기했다. 정천정은 비교검토를 거쳐, <금사>의 협곡씨가 <팔기씨족통보>에 표기되어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건륭제때 <금사>의 "협곡"의 음을 "객이고(喀爾庫)"라고 표시한 것을 알았다. 정천정은 한어발음의 각도에서 추론하여, 이 두 개의 단어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청고종이 <어해>를 정할 때, 만주의 희성인 객이고를 협곡씨로 적어서 스스로를 숨긴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었다.
이런 "협곡설"은 최근 몇년간 각종 만주족의 웹사이트에서 전재되면서 붐을 이루었다. 특히 정천정의 소위 "의심이 간다'를 '확실하다'로 고쳐서 직접적인 사실인 것처럼 선전했다. 정천정 자신도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협곡이 각라라고 말하지 못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건륭제때 <만주원류고>에는 <금사성씨고>가 있는데, 거기에는 협곡과 고리협(古里夾)을 모두 과이가(瓜爾佳)의 전음(轉音)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협곡과 각라가 같은지는 더 논의해야할 필요가 있다.
넷째, 교로(交魯)설
"교로설"은 계종(啓孮, 영왕 갈래의 대종)이 제기한 것이다. <애신각라씨삼대만학논집>중 <애신각라씨의 수수께끼>라는 글에 나온다. 계종은 만주어와 여진어에 능통하다. 그는 <연대여진진사제명비> 제19행에서 "교로호속로내(交魯胡速魯改)"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교로호속로개의 여진어는 "giro ru ha sur gai"이다. '부방(附旁)에는 "교로홀통길(交魯忽通吉)'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여진어로 "giao ru hutong gi"이다. 계종은 이곳에 나타난 금나라때의 "교로씨"가 바로 나중의 "각라씨"라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발음으로 추정한 것이다. 문제는 금나라때 여진성씨보에 교로씨에 관한 관련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발음만으로 추정하는 것은 맹목적인 점이 있다. 그래서 아직도 더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근래들어 애신각라씨는 명나라 중후기에 형성된 비혈연적 독립성씨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견해는 비록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지만, 어쨌든 증거가 부족하여, 더 연구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애신각라성씨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고, 아직도 수수께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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