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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남명(南明) 홍광조(弘光朝) 붕괴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한정우기(閑情偶記)

 

홍광조가 신속히 멸망한 것에 대하여 역사책에서는 마사영, 완대성을 질책하는 말이 가득 쌓여 있다. 이 왕조의 멸망의 근원이 도대체 그들에게 있는 것일까? 명나라사회를 뒤덮고 있던 '해방'정서를 보자. 특히 이 사회의 중요층면의 사람들의. 그것을 보면, 아마도 분명히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첫번째 층면은 체제내이다. 즉 소위 관신(官紳)집단이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이 집단은 기득권의 획득자이고, 그들은 조정에 대하여 충성을 다해야 마땅하다. 조정을 구하겠다는 자각과 본능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명나라정치의 부패는 직접적으로 통치집단 내부의 분붕이석(分崩離析)을 조성한다. 관신집단의 절대다수는 모두 일찌감치 왕조의 기수(氣數)가 끝났다고 보았다. 사상적인 준비는 그들의 정치태도를 질적으로 변화하게 만들었다. 만청세력이 아직 중원에 진입하기 전에, 그들은 명망순흥(明亡順興)을 역사상 자주 볼 수 있는 왕조교체로 인식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속속 대순정권에 귀순한다. 그리고 이천근이 <작화록>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들은 "적(賊)을 왕자지사(王者之師)이고, 하루아침에 통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는 흩어지는 법이다. 그런 광경이 나타났다. 손문량의 <1644년 중국사회대진탕>에는 이렇게 적었다. 숭정17년 삼월 이십삼일에만 오문바깥에 이자성의 휘하로 와서 관직을 얻으려는 명나라의 구관리가 4000여명에 달했다.

 

명나라역사를 잘 아는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이 숫자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 숫자가 지나치게 방대하다는 것뿐아니라, 이 방대한 숫자의 배후에 있는 심층적인 내용이다. 4000간부는 어떤 개념인가. 전체 명나라 중앙기구에서 문직관리는 3분의 1이었고, 나머지 3분이 2는 문관이외의 무장이었다. 다만 무장까지 포함시켜도 모자라는 숫자이다. 그것은 단지 각급정권의 하급관리까지 포함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난이 닥치자, 전체 국가기관의 인사들이 국가를 버리고 떠났다. 실로 보기 드문 일이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사실상, 명나라 중엽이후, 상품경제의 신속한 발전과 '인필유사(人必有私)'등 '이단'사상이 흥기하기 시작한다.  전사회의 가치관념은 이미 심각하게 바뀌었다. "이(利)"는 사람들 사상에서의 지위가 크게 상승했다. 금전은 완전히 새로운 고도로 끌어올려진다. 그리하여, 공명, 신분, 도덕등 주류가치관을 대체했다. 금전을 쫓기 위하여, 사람들은 '단의(斷義)', "망충(忘忠)", "불인(不仁)"등 '명교를 상하게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전체 사회는 금전의 동취(銅臭)로 넘쳐나고, 애정, 우의 및 사회교류는 모두 농후한 금전 색채를 덮어쓰게 된다. '세도일하(世道日下), 세리교겅(世利交征)"의 사회분위기의 형성이 가속화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상에서 현실로 되돌아오고, 도덕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던 것에서 생활의 즐기는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런 배경과 사회현실로 명나라의 멸망은 그들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의 속박을 풀어준 것과 같았다. 마음 속으로부터 '해방'의 쾌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쾌감은 당연히 환상이다. 그들이 쾌감의 환상에서 깨어나게 한 것은 바로 이자성이다. 대순정권은 역대농민정권의 공통된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외에 더 많은 직업깽패의 본질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권력의 정점에 서면, 즉시 타락하고 취생몽사하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과 추구는 아직 안정되기도 전에 조급하고 적나라하게 '추장조향(追臟助嚮)"을 추진한다. 전빙의 <갑신전신록>에 따르면, 대단한 기세로 '추장조향'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수천의 관료 사대부는 새 주인의 단맛을 보기도 전에, 새 주인으로부터 고문을 당하고 죽어갔다. 이것은 아주 아이러니한 결말이다. 당초 그들은 전통도덕을 버리면서, 군부지구(君父之仇)에도 불구하고, 대순정권에 투신했다. 그 목적은 바로 자신의 목숨과 부귀공명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집안재산도 지키지 못하게 되고, 체면은 체면대로 다 잃었으며, 목숨마저 위태로울 지경에 처했다. 마치 꿈을 꾼 것과 같았다. 꿈에서 깨어서 후회해도 이제는 이미 늦었다.

 

옛꿈에서 깨자마자 새꿈이 다시 이어졌다. 이자성의 농민정권은 금방 청군에 무너진다. 관신집단은 대순정권에 대하여 극단적인 원한을 품고 있어서, 청군이 그들을 대신하여 복수하고 원한을 풀어주자, 그들은 다시 한번 해방의 쾌감을 느끼게 된다. 청군의 '적'을 멸한 행위에 대하여 명나라 관신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보답하고자 할 뿐아니라,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게 된다.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에서 패주한 후, 진기로예(산서,하북,산동,하남)의 원 명나라 관신은 대거 대순지방관리를 도살한다. 산해관전투후 3개월내에, 각지에서 대순정권관리, 수비장수를 죽인 곳이 80여개 주,현에 달한다. 그들은 보복이 성공한데 기뻐했고, 더더욱 그들에게 복수의 기회를 준 청군에 감격해 마지 않았다. 이런 감격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청군에 투항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명말 상층사회의 기본상태이다. 이런 상태의 환각은 언제 끝날 것인가. 어쨌든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최소한 청나라정부의 통치가 기본적으로 안정되고 공고히 되는 시기 즉 순치제 이후의 강희제때이다. 그 때가 되어서야지만 이 정권의 흉악과 독재의 본성이 발작하게 될 것이다. 역사상 진정한 의미의 반청복명현상이 나타난 때이기도 하다.

 

예전에 황제는 백성을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이제는 백성들이 황제를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긴다. 소위 '국부지유민(國不知有民), 민편부지유국(民便不知有國)"이다. 사회의 하층에서는 확실히 명나라의 멸망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해방의 안위를 느낀다. <명계남략>에는 "이현복변(黟縣僕變)"의 세부적인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데 주목할 만하다: "이현, 휴녕은 모두 휘주부에 속한다. 을유(홍광원년, 1645년) 청나라병사가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읍의 노비들이 십이채(十二寨)를 묶어서, 주인에게 문서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약간만 그들의 뜻에 어긋나면 불에 태워서 죽였다. 모두 말하기를: '황제는 이미 바귀었다. 주인도 마땅이 노비가 되어 우리에게 봉사해야 한다.' 주인과 노비가 서로 형제로 칭한다. 그때 결혼하는 경우, 신랑신부는 모두 걸어서 왔고, 노비는 하나도 없었다. 개략 강음의 변과 유사했다. 이현이 더욱 힘했다. 휴녕에까지도 번져갔다. 휴녕의 양가자제들은 그 소문을 듣고 모두 두려워해서, 칠십이사(七十二社)를 만든다; 부귀한 자들은 돈을 써서 지방을 보호한다. 지현 구양현은 강서 사람이다. 읍의 양반들을 불러서 마시면서 기의에 통곡한다. 금성, 황갱등에서도 거병하여, 노비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북방에서 대순정권, 만청정권의 교체를 겪은 후에도, 강남의 휘주지구에서는 여전히 남명의 통치하에 있었다. 즉 이 정권의 중요한 전략요지이자 항전후방이었다. 이 기록을 보면, 이런 정보를 읽어낼 수 있다: 압박의 최하층에 있는 평민계층은 도덕적인 순박함은 별로 없다. 나라가 무너지고 집안이 망한다는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명나라의 멸망은 그들과 무관할 뿐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부담이 없어진 것같다. 국가기구가 쇠약해빌 때, 그들은 민감하게 시기를 포착하여, 신분해방을 노리고 주인이 되고자 한다. 경제적으로 주인의 재물을 차지하고, 정치적으로 최소한 주인과 서로 형제로 칭하며, 다른 사람의 가마를 들어주는 것같은 체면을 상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아쉽게도, 하층이 환각은 기반이 너무 없었다. 좋은 꿈은 금방 옛주인 남명정권에 의하여 분쇄된다. 평민의 환각이 파멸한 것은 또한 조정에 말해준다. 조정이 생존을 의지해야할 또 하나의 기초가 무너진 것이다. '이현복변'은 비록 당시에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지는 못했지만, 남명정권에 있어서 악몽임에 틀림없다. 관신집단의 의탁을 잃었는데, 다시 하층의 지지마저 잃은 것이다. 이 정권은 도대체 어떤 역량에 의지하여 생존할 것인가.

 

이런 미세한 점을 확대경으로 보면, 왕조의 치명상을 볼 수 있다. '빼기'방식의 결과로 남은 약간의 역량은 단지 남명정권의 체제내에만 존재하게 된다.

 

다만, 남명정권은 전왕조의 모든 폐정을 승계했다. 설사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자부하는 자들도 생활에서는 향락을 추구했고, 연소막상(燕巢幕上, 제비가 커튼 위에 집을 짓다. 즉 아주 위험한 지경임을 나타냄)의 나날에 열중했다. 청나라군대가 북경을 점령한 후, 확실히 상당한 일부분의 관신은 민족의식으로 청나라에서 관직을 하고자 하지 않아, 속속 남하한다. 다만 이 일부분 세력으로는 국면을 만회하기에 부족했다. 마사영, 완대성이 좌지우지하는 남명 홍광조정은 이 일부분의 사람들이 자연히 동림당 성향이 있는 관원과 합류하여, 쌍방의 격렬한 '당쟁'을 피할 수 없었다. 홍광조의 '당쟁'은 여러 버전의 '남명사'의 재연이다. 다만, 당쟁은 사실 의미가 그다지 크지 않다. '당쟁'이 있었건 없었건, '당쟁'의 결말이 어떠하든, 모두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