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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사상

중국전통문화의 변증법적 사고

by 중은우시 2014. 4. 29.

글: 축화군(祝和軍)

 

민족문화의 독특성과 우월성은 드러나는 세계관과 가치관에서 체현될 뿐아니라, 숨어있는 사고방식에도 뿌리박고 있다. 인류문명의 진전에서, 중화문명이 인류고대문명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연속되는 문명이 된 이유는 많은 정도에서 중국인의 문제사고의 방식과 문제해결의 노선에 기인했고, 중국민족의 독특한 방법론과 변증법원칙에 기인한다.

 

고음불생(孤陰不生), 고양부장(孤陽不長)

 

갈릴레오는 말했다: 수학은 하느님이 우주를 쓴 문자이다. 서방에서 수학은 지금까지 각종과학의 모범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수학은 엄격한 인과추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확정된 전제에서 출발하여, 추리를 거쳐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결론을 논증해 내기 때문이다. 이런 단일적이고 선형(線形)인 사고방식은 서방사회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심지어 진리를 획득하는 유일하고 정확한 경로라고도 인식된다. 아르키메데스의 그 명언처럼: "나에게 지렛대를 주면 나는 지구도 들어올릴 수 있다" 칸트는 아르키메대스보다 더 광망했다: "나에게 물질을 주면 나는 전체 우주를 들어올릴 수 있다."

 

서방의 이러한 사고방식과 달리, 중국전통문화에서 품고 있는 사고방식은 모순변증법적이다. 중국문화가 숭상한 것은 수학이 아니라, '중화제일도(中華第一圖)'라고 불리우는 음양어태극도(陰陽魚太極圖)이다.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고 부른다" "음양을 벗어나면 도가 없다". 중국문화의 사고의 깊은 곳에는 확정된 전제나 지점이 없다. 항상 두 개의 대립통일된 요소가 서로 관련되어 있었다. 이 두 개의 요소는 공존공생한다. 피차간의 상호작용은 하나의 전체구조에서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낸다.

 

그래서, 중국문화는 전체성을 중시하는 사고이다. 저명한 수학자 말콤 그래블은 실험을 통하여 중국과 서방의 사고방식의 차이점을 관찰했다. 그는 같은 연령과 교육배경을 지닌 중국학생과 비중국학생에게 같은 사진을 보여주고, 나중에 그들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물어본다. 중국학생은 기본적으로 사진을 전체적으로 묘사했지만, 비중국학생은 사진의 특정부분을 지적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중국학생은 전체적으로 사물을 대한다. 그러나 비중국학생은 그들이 흠이를 지닌 그림의 특정사물에 더욱 주목한다.

 

"고음불생, 고양부장". 차이성이 공존해야만 모순이 생긴다. 이런 모순은 또한 사물의 발전변화의 원천이다. 춘추시기, 안영은 요리를 비유하여 제경공에게 "화"와 "동"의 변증법적 관계를 설명한다. 제경공은 안영에게 말한다. 양구거(제경공의 총신)만이 그와 "화(和)"한다고. 안영은 제경공의 말을 부정한다. 양구거는 계속하여 당신에게 아첨을 한다. 당신들 사이에 어찌 "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들 간에는 여전히 "동(同)"이지 "화"는 아니다. 제경공은 "화"와 "동"의 차이를 잘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안영에게 가르침을 부탁한다. 안영은 말한다: "화"는 요리사가 탕을 만들 때 각종 식재료, 조미료등을 넣고 끓인다. 이렇게 하면 "제기불급(濟其不及), 이설기과(以泄其過)"할 수 있다. 즉 상호 보충, 조절하며 각종 식재료의 맛을 유지할 수있다. 그리하여 맛있는 탕이 된다. 만일 양구거처럼 "임금이 괜찮다고 하면 신도 괜찮습니다", "임금이 안된다고 하면 신도 안됩니다"라면 이것은 대립면을 취소시키는 '구동(苟同)'이다. 시비를 묻지 않고, 잘못을 그대로 따르는 '혼동'이다. 사물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국가를 다스리는데 있으서 백해무익하다.

 

바로 이런 전체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중화민족은 지금까지 화해(和諧)를 아름답다고 여기고, 단조로움을 추하다고 여긴다; 화합이 주류이고, 분열은 말류이다. 이런 화해는 일종의 관용이고, 일종의 다원성, 차이성에 대한 용납이다. 특히 글로벌화, 국제화되는 오늘날, 이런 '화합관'은 그 지혜의 매력을 보여준다.

 

극히 고명해야 '중용'을 말한다.

 

과학이 요구하는 인과사고방식은 전제와 결론간의 논리관계를 강조한다. 경험을 초월하고, 시간제약을 벗어나야 한다. 만일 하나의 결론 혹은 규율이 '때에 따라서 바뀐다'면 그러면 그 결론, 규율은 과학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이와 반대로, 변증모순의 사고방식은 특히 시간성을 중시한다. 모순 쌍방간의 변정운동은 시간에서 전개된다. 시간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건에 참여하는 중요요소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사고가 요구하는 것은 분명한 인과논리관계가 아니라, '시기"를 중시하고, '시중(時中)''을 추구한다.

 

'시중'이라는 단어는 <주역>에서 처음 나온다. "몽(蒙)"괘의 <단전(彖傳)>에는 "몽(蒙), 형(亨). 이형행(以亨行). 시중야(時中也)". 그 뜻은 대체로 이렇다. 몽괘는 형통을 희망한다. 그래서 형통하게 일처리를 하면 그 시기에 맞는 것이다. 이를 보면, 소위 "시중"은 주로 두 가지 방면의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시의적절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수시로 변통한다"는 것이다. 중이비시(中而非時)는 중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시이부중(時而不中)도 중이 아니다.

 

<자치통감>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韓)나라의 국군인 한소후(韓昭侯)는 높은 문을 하나 만들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그의 모사인 굴의구(屈宜臼)는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린다. 굴의구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당신이 이렇게 높은 문을 반드시 만들겠다면 당신은 이 문을 다 만들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왜 그런가? 시기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국군이 자신의 집에 높은 문루를 만들어서 더욱 기세있게 보이고자 하면. 그게 잘못인가? 잘못은 아니다. 예전에 우리의 나라가 강하고 백성이 부유했ㅇㄹ 때 당신이 만일 높은 문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분명히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이미 전혀 다르다. 진나라가 작년에 막 우리의 의양성을 공격해 점령해서, 우리의 원기가 크게 상했고, 인심이 옛날같지 않다. 당신이 굳이 이런 시기에 높은 문을 건설한다면 분명히 백성들이 이반하게 될 것이고, 장병들에게 덕도 잃게 될 것이다. 한나라의 쇠락은 불가피해진다." 결과, 한소후는 굴의구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굴의구의 말은 그대로 나타난다. 높은 문을 다 짓기도 전에, 한소후는 죽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 품고 있는 도리는 아주 깊이 있다. 굴의구가 한 그 말: "오소위시자(吾所謂時者), 비시일야(非時日也). 부인고유리(夫人固有利, 불리시(不利時)" 그 뜻은 내가 말하는 시간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에 참여하는 과정에서의 시간이다. 적합한 때 일을 하면 효과가 아주 좋고, 부적합한 때 일을 하면 똑같은 일이라도 엉망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일을 시기에 맞지 ㅇ낳게 하면, 힘을 다 하고서도 성과는 얻어내지 못한다"는 이치이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중국문화는 시간에 대하여 아주 민감하다. 어떤 일을 하든지 상대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시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중용>에는 이런 말이 있다: "군자지중용야(君子之中庸也), 군자이시중(君子而時中); 소인지중용야(小人之中庸也), 소인이무기탄야(小人而無忌憚也)" 송나라때 주희는 '시중'에 대한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중무정체(蓋中無定體), 수시이재(隨時而在), 시내평상지리야(是乃平常之理也)" 즉, '중용'은 '시'가 '중'한 것이다. 가운데서 오락가락하거나, 절충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더더구나 간단하며 고착화된 '중간지대'도 아니다. 다만, '시중'은 또한 어려운 일이다. 이유는 실천과정에서 장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에 바로 그것을 영원히 붙잡고, 그 후에는 그것을 교과서삼아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중용>에는 "극히 고명해야 중용을 말한다"고 하였다. 사마우가 공자에게 무엇이 '인(仁)'인지 물었을 때, 공자는 말한다: "인자(仁者), 기언야인(其言也訒)". 그 뜻은 무엇이 '인'인지 얘기하려면 그것은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곤란함을 인식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단 '시중'의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일종의 위기감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감은 또한 행위에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만들 것이다. 마치 얼음을 밟는 것처럼 시류의 흐름에 조심스럽게 따라가고 형이상학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음양불측위지신(陰陽不測謂之神)

 

과학적사고는 인류가 자연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점차 형성된 것이다. 이런 사고는 성격규정과 정량분석을 중시한다. 불변응만변(不變應萬變)의 객관적인 규율로 귀납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사는 사회분야에 직접 응용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남녀간의 연애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규율이나 법칙을 찾아낼 수 없다. 왜냐하며 당신에게 적용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적용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도 말한다: "나에게 물질을 주면 나는 우주를 들어올릴 수 있다. 다만, 과학법칙은 하나의 작은 벌레의 생명운동도 해석할 수 없다." 이를 보면, 일단 인류사회분야에 관련되면 인관적인 사고는 그 한계성을 드러내게 된다. 음양식의 모순변증법적 사고는 쓸모가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고는 직접적인 고정모델을 벗어나게 하고 임기응변을 강조하며 모순쌍방이 전개하는 변증운동의 리듬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중국병법사상은 바로 이런 변증법적 지혜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이다. 병법에서 연구하는 것은 전쟁이다. 전쟁은 인류역사상 가장 잔혹한 대결이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방식으로 실패자를 무릎꿇리는 것이고, 참여자는 반드시 "생"과 "사", "존"과 "망"의 사이에서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생사존망의 앞에서, 모든 고착화된 경험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모든 과학이론은 창백해진다. 여하한 형이상학도 이미 스스로를 만검불복의 처지에 빠지게 만들 것이다. <손자병법>은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얘기한다; "병법이라는 것은 국가의 대사이다. 사생지지(死生之地)이며, 존망지도(存亡之道)이다.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양군이 대치하고 병력이 서로 맞부닥친다. 전쟁의 쌍방은 자주 일방적으로 제약당하는 인과관게에 처하지 않고, 제로섬의 상호전화의 음양관계에 처한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고명한 장수라면 여하한 법칙도 만능의 열쇠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항상 당시의 국면과 환경에서 적아 쌍방이 전개하는 음양상호작용과 전화에서 수시로 상응하는 전략을 취할 것이다. 소위 '음양불측위지신'이라는 것이다. <삼국연의>에는 손권과 방통의 이런 대화가 나온다. 손권이 방통에게 묻는다: "공이 평생 배운 것은 무엇을 위주로 합니까?" 방사원이 대답한다: "불필구집(不必拘執), 수기응변(隨機應變)". 손권이 또 묻는다: "공의 재주와 학문은 공근(公瑾)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방통이 웃으며 답한다: "제가 배운 것은 공근과는 크게 다릅니다." 한 사람은 병법에 구애받고, 한 사람은 임기응변한다. 고하의 구분은 말안해도 분명하다. <삼국연의>에서 복룡, 봉추가 나란히 이름을 날리고, 주유는 한 단계 떨어지게 묘사한 것도 이해가 된다.

 

이를 보면, 소위 병서와 병법은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사용설명서나 매뉴얼이 아니다. 단순히 우리가 변증법적 지혜로 들어가는 '고문전(鼓門塼)'이다. 만일 지식을 지혜로 여긴다면 병법을 교과서로 여긴다면, '음양불측위지신'의 '신'에 대한 이해를 무왕이불리(無往而不利)의 규율로 이해한다면, 여전히 실패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 조괄은 젊어서 병법을 많이 읽었고, 병법을 얘기하면 부친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다. 나중에 그는 염파의 뒤를 이어 조나라의 장수가 되는데, 장평지전에서 그저 병법대로 하고, 변통을 하지 않으며 마구잡이로 공격하다가 결국 진나라에게 대패한다. 후인들에게 '지상담병(紙上談兵)'의 웃음거리를 남긴다. 중국혁명전쟁때, 왕명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전적인 저작을 모두 외웠다. 그러나 혁명실천에서, 그는 죽어라 그 틀대로 진행하려 하다가 중국혁명을 잘못된 길로 몰아갔다. 모택동이라는 그저 무기를 들고 '상산하향'할 줄 알던 서생은, 중국혁명을 구할 '돌파구'를 찾았다. 마르크스가 '내가 심은 것은 용이 씨이다. 그러나 수확한 것은 벼룩이었다."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보기에 지식은 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는 그렇지 않다. 서시의 웃음은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그러나 동시효빈은 추태가 백출한다. 한신은 파부침주하고 배수일전을 벌여서 패국을 승리로 바꾼다. 마속은 고산에 의지해서 필부의 용기를 드러내다가 결국 전멸한다. 불가에서는 말한다. '방하(放下, 내려놓으라)'하라고. '방하'하겠다는 생각마저도 '방하' 하라고. 병법도 그렇지 않겠는가? 만일 '방하'한다면 병법까지도 '방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