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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사상

국학(國學), 국수(國粹)와 국사(國史)의 진상

by 중은우시 2013. 11. 30.

글: 주대가(朱大可)

 

20세기에 들어온 이래, 중국인은 전후로 3가지 역사서술방식을 접하게 된다:

 

첫번째는 호적, 노신 및 진독수의 "신문화"방식이다. 그것은 "공가점을 타도자하"는 격렬한 구호를 내걸고, 역사전통을 부정하는 굳건한 신념을 드러낸다. 비록 그후 호적은 중대한 조정을 거쳐, 새로 "정리국고(整理國故)"의 도로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역사전통을 전복시키는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다. 되돌릴 수 업게 되었다.

 

두번째는 모택동의 "혁명"방식이다. '신문화운동'의 성화를 이어받아, 그것을 철저한 '단열식 진화'로 변경시킨다. 여러번의 엄격한 사상숙정을 거쳐, 특히 '문혁'의 '대비판' 폭력을 통하여 현대중국과 자신의 역사적 혈맥을 단절시킨다;

 

세번째는 등소평의 '경제'방식이다. 모택동시대의 이데올로기혁명을 끝내면서, 개혁개방 30년이래, 문화전통의 단열상태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규모의 도시화 현대화건설로 '문혁'때 아직 파괴되지 않았던 '하드웨어'인 명청건축과 지하문화재는 더욱 심각한 파괴를 겪는다. 그외에 경제운동은 문화건설에 대한 참월과 교체로 '문혁'이래의 문화퇴화현상을 더욱 가중시킨다.

 

이상의 세 가지 역사서술방식이 중첩된 결과는 현대중국과 전통문화간의 심각한 단절을 가져오게 되었다. 중국문화는 이런 가치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한편으로 전통가치가 세상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 서방이 창도한 인류보편가치는 '적대세력'에서 온 문화음모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이중적인 협공은 현재의 교육위기, 도덕위기 및 정신위기에 심각한 논리전제를 제공하였다.

 

문화현상에 대한 불만에 기하여, 일종의 복고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화전통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유학붐(儒學熱)', '독경붐(讀經熱)'과 '대사붐(大師熱)' 대거 유행한다. 그리하여 유학을 뼈로 하고, 도가를 살로 하며, 의가(醫家)와 기공가(氣功家)를 피부로 하는 국학체계가 형성되었다. 그 기본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거 국가주의를 주장한다. 동중서를 본받아, 조정의 지지하에 유가독재를 재건하려 한다; 둘째, 국학창도자들은 많은 경우 '대사'로 자처하며, 도모안연(道貌岸然), 장신농귀(裝神弄鬼)하고,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개인숭배하는 등의 방식으로 옛날 식의 성인우상을 만든다; 셋째, 각종 명목의 국학반이다. 총재국학반에서 유아국학반까지, 모두 고액의 비용을 수취한다. 국학을 돈벌기 좋은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다; 넷째, 국학을 '국수'로 정의한다. 이를 통하여 '서학'을 부정한다. 나아가 인류가 공동으로 창조한 핵심가치를 부정한다. 자폐의 방식으로 협소한 민족주의로 후퇴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외를 특징으로 하는 민족주의는 통상적으로 개인자기비하컴플렉스가 민족의 판도에서 투사된 결과이다. 그것은 기본적인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다. 어떤 우수한 민족문화도 자아폐쇄와 자아순화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외개방과 겸수병축(兼收幷蓄), 박채중장(博采衆長), 부단한 자아갱신의 결과라는 것이다.

 

"국수"는 소위 "순한족혈통"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사기개념이다. 그것은 선진문화(先秦文化)를 임의로 뜯어고치고, 사람들이 그 진실한 기원을 탐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공자의 '사생아' 신세에 대한 연구는 일찌기 성현의 완벽성에 대한 인식위기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총명한 '국학자'는 이런 의문을 내지 않으려 했다: 노자의 '노자(老子)'는 도대체 누구인가? 장주(莊周)의 '장가'는 도대체 어떤 성씨인가? 나의 연구에 따르면 이미 드러났다. 선진의 제자백가는 대부분 '외국' 배경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도가의 주요사상근원은 인도의 폐타(吠陀)문화이다. 묵가의 핵심사상은 히브리종교와 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음양가 추연의 사상중 '구주론(九州論)'은 인도에서 왔고, '오행설(五行說)'은 페르시아에서 왔다. 그런 중요한 외부사상이 일깨워주지 않았더라면, 국학과 국수의 문화내핵(內核)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더더구나 선진문화의 흥성과 번영은 없었을 것이다.

 

선진문화가 이처럼 강렬한 개방적인 특징을 지니게 된 것은 한나라이전에, 국족(國族)을 기술하는 원칙이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지구는 중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와 중대한 '아시아문화공동체'를 형성했다. 동아시아문명은 고립되어 자급자족식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런 문화공동체의 일부분으로서, 공동체중의 여러가지 문화원형이 만든 것이다.소위 '국수"의 진상은 그것이 당시 전세계문명의 정화를 흡수하였고, 이를 개조, 심화 및 현지화시켰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중국특색이 있는" 문화체계를 형성한 것이다. 양한, 위진, 당송에서 명청까지, 중국문화는 여전히 활발한 세계교환체계에 들어 있었다. 유불도의 3대사상체계에서 최소한 불,도의 두 개는 현저한 '역외특징'을 보여준다. 문화총량의 2/3를 차지하는 것이다.

 

동아시아문명의 개방성을 이끌어낸 원인은 동아시아정치지리의 특수한 구조에 있다. 5천여년이래, 전체 아시아 판도에서, 빈번한 전쟁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도주식의 이주현상이 벌어진다. 이 붐은 기물과 문화의 교류를 가져온다. 특히 선진적인 서아시아(서남아시아, 남아시아)문화가 동부로 흐르고, 전파되고 이식되었다. 이러한 계속 이어지는 이민붐은 태평양이라는 바다에 가로막혀 진흙모래처럼 감속되고, 정지되고 침전되어, 동아시아에 퇴적된다. 그리하여 풍성한 문화퇴적층이 형성되고 본토문명의 발육과 성장을 자극한다. 이 위대한 역사발전과정은 항상 본토문인과 사학자들에 의하여 잘못 인식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낙후한 유목민족이 선진적인 농업문명을 침범하고 상처입힌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런 문화자만의 역사환각 속에 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