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사열독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은 천안문의 성루 위에서 격앙한 목소리로 <중화인민공화국중앙인민정부공고>를 읽었다. 북경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로서 이미 6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정식으로 북평(北平)에 수도를 두기로 결정한 것은 1949년 3월에 개최된 중공 제7기 2중전회에서이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4월 혹은 5월에 남경을 점령하고, 그 후에 북평에서 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고, 연합정부를 성립시키며 북평을 수도로 정한다." 중공중앙의 지도자가 당시에 왜 북평을 신중국의 수도로 결정했는지 알고 있는가?
국민당이 동북에 병력을 증강시켜, 하르빈은 신중국의 수도가 되지 못한다.
신국국의 수도를 북경에 두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와 근거가 있다.
원로무산계급혁명가의 회고록에 따르면, 1948년 3월하순, 모택동은 당중앙기관이 황하를 건너, 진수(晋綏)해방구로 들어갈 때, 이미 북평을 수도로 삼으려는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공중앙이 처음에 선정한 신중국의 수도는 호거용반(虎距龍盤)의 남경도 아니고, 고도 북경도 아니며, 더더구나 서북황포고원의 서도 장안도 아니라,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우던 하르빈이다.
1945년 8월, 소련홍군과 동북항일연군은 일거에 하르빈을 해방시키고, 일본제국주의의 14년에 걸친 점령을 끝낸다. 하르빈은 전국에서 최초로 해방된 대도시가 된다. 그리고 그곳은 계속하여 중공중앙 동북국, 동북행정위원회의 소재지였다. 중국동북의 정치, 경제 및 문화의 중심지였다.
모택동은 중국지도를 감상하기를 즐겼다. 그의 마음 속에, 중국은 한 마리 수탉이다. 흑룡강은 날개를 펼친 백조와 같다. 하르빈시는 바로 '백조의 목에 걸린 진주'이다. 하르빈이 당시 전국에서 가장 안전한 대도시였고, 소련과 가장 가까워 소련의 지원과 도움을 받는데 편리하여, 모택동과 중공중앙은 특별히 하르빈을 '특별시'로 비준하고, 이곳에서 신중국의 성립을 선포하고자 준비한다.
바로 이 때, 동북의 전황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한다.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하에 미친 듯이 동북에 병력을 증가시켜, 교통의 주요도로를 점거한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모택동은 과감하게 결정한다. 당중앙은 동북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해방전쟁의 진전이 빨라지면서, 남경, 서안, 낙양, 개봉, 북평등 도시가 속속 모택동의 눈앞에 나타난다. 마지막에 눈길이 멈춘 곳은 북평이었다.
섭영진은 북평의 평화해방을 건의하고 모택동은 동의를 표한다.
이때, 평진전역을 지휘하던 섭영진은 북평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킬 수 없을까 하는 문제에 골몰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첫째는 이 역사가 유구한 문화고도가 전쟁의 포화에 파괴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고, 둘째는 서백파와 모택동의 접촉과정에서 장래 북평을 수도로 정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도로 손실을 감소시키고자 한 것이다. 특별히 당시 북평에 주둔하던 국민당 장군 부작의는 담판의향이 있었다. 그의 큰 딸인 부동국(傅冬菊)이 제공한 정보에 따라 적시에 그의 최신동태를 장악할 수 있었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것은 더더욱 섭영진으로 하여금 북평을 평화적으로 해방시켜야겠다는 결심을 굳혀준다.
그리하여, 섭영진은 나영환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최대한 북평을 평화적으로 해방시키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만일 당중앙이 북평을 수도로 하기로 결정하고, 이곳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나중에 거처할 곳도 없게 될 것이다. 나영환은 자신이 넘쳐서 말한다: 우리는 총을 방패로 삼아, 섭영진에게 무기를 내려놓도록 압박하여, 평화담판의 길로 간다.
일이 중대하므로, 섭영진은 중앙군위에 보고하여 다시 명확히 건의한다: 천진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부작의가 투항하도록 한다. 그렇게 하여 북평을 전쟁없이 해방시킨다. 모택동은 섭영진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후, 아군의 작전은 주로 대도시를 쟁취하는 것이다.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최대한 평화적으로 해결하라. 북평은 전투를 벌이지 않는 것이 좋다. 중국인민은 해방사업에 흘린 피가 너무나 많다." 이를 보면, 섭영진의 전략적인 안목은 모택동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1949년 1월 14일, 천진전투가 시작된다. 해하의 양안은 순식간에 짙은 포화로 뒤덮인다. 29시간의 격전을 거쳐, 해방군이 천진을 점령한다. 북평에 있던 부작의는 크게 놀라고 어쩔 수 없이 평화해결에 동의한다. 해방군이 천진을 함락시킨 다음 날, 부작의는 대표를 보내어 섭영진등과 재차 회담한다. 쌍방은 북평 평화해결의 초보적인 협의를 달성한다. 마침내 북평은 완전무결하게 인민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해방전쟁에서 유명한 '북평방식'이 창조되었다. 북평의 평화해결은 신중국이 북경을 수도로 정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준다.
서백파에서 명을 받아, 섭검영은 북평이 신중국의 수도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모택동은 위대한 전략가이다. 그는 항상 전체를 살피면서 여러가지를 고려하는데 능했다. 평진전투의 대포소리가 막 터져나올 때, 모택동은 북평을 접수하는 업무에 착수한다. 1948년 12월중순, 중공중앙은 팽진을 북평시위서기로 임명하고, 섭검영을 북평군관회주임 겸 북평시시장으로 임명한다. 이들로 하여금 북평의 인수인계업무를 통일적으로 진행하도록 한다. 서백파에서 모택동은 새로 임무를 받은 팽진과 섭검영이 오는 것을 보고는 기대에 충만하여 말한다: "이번 북평접수는 중국과 외국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너희는 심양, 제남을 접수하는 것처럼 더욱 좋은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 심양과 제남보다 못해서는 안된다. 그외에 특별히 모 '좌'의 방식이 출현해서는 안된다."
전선의 전투가 긴장되었지만, 모택동은 북평인수등 문제에 대하여 특별히 지시를 내린다. 비록 당시에는 아직 북평을 수도로 하겠다고 명확히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섭검영, 팽진은 이미 분명히 인식했다. 이것은 절대로 간단한 접수임무가 아니다. 그것은 지도자를 포함한 더욱 깊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당시에 모택동에게 말한다: 절대로 당과 인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번 업수임무를 잘 완성하도록 노력하겠다.
임무는 중대하고, 시간은 긴박했다. 서백파를 떠나, 섭검영과 팽진은 전력을 투입하여 복잡한 접수업무를 준지하기 시작한다. 각지에서 뽑아온 1000여명의 간부를 신속히 보정(保定)에 모은다. 1948년 12월 17일, 중공북평시위 제1차회의가 보정에서 개최된다. 여기서 접수업무를 논의한다. 섭검영은 강화에서 북평접수의 중대한 의미와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언급한다. 그후, 섭검영과 팽진은 접수인원을 이끌고 선후로 북평 서남의 양향(良鄕)에 도착하여, 해방군과 부작의의 담판시간을 이용하여 접수간부를 교육하고 훈련시킨다. 섭검영안 양향의 한 묘(廟)에서 접수간부를 위하여 특멸히 몇 차례 형세보고대회를 개최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명확히 말한다: "북평은 국내외에 유명한 역사문화고도이다. 장래 신중국의 수도가 될 수도 있다. 그 접수업무의 진행이 어떠한지는 직접적으로 우리 공산당과 해방군의 명성에 관련된다. 기타 아직 해방을 기다리는 도시의 접수업무에도 관련된다. 우리는 반드시 현재의 업무를 잘 처리해야 한다." 섭검영이 이런게 북경이 장래 신중국의 수도가 될 수 있다는 예언같은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는 장기적 안목이 있었다
1949년 1월 31일, 북평이 평화적으로 해방된다. 2월초부너, 북평의 접수업무는 섭검영과 팽진의 영도하에 전면적으로 전개된다. 접수업무는 4월초에 기본적으로 완성된다. 이어서, 섭검영은 다시 북평을 다스리는 것을 강화한다. 사회안정을 유지하고, 생산발전을 회복시키며, 시민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교육을 개선한다. 이런 일들은 성과를 거둔다. 신중국의 수도로 삼고 장래 수도로서 발전시키는데 좋은 기초를 닦는다. 북평의 접수업무도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는다. 국민당통치지역의 <신문천지>에서도 이렇게 적었다: "섭검영이 영도하는 중공간부는 중국미래 수도의 기초를 잘 닦았다. 접수는 신중했고, 주도면밀했으며, 자세하고, 엄밀했다. 진선진민(盡善盡美)를 달성하는 수준이었다." 8월, 섭검영은 화남으로 전출되고, 섭영진이 북평시 시장을 넘겨받는다.
왕가상의 탁월한 식견으로 모택동은 북평을 수도로 결정한다.
1949년 1월, 동북국 성시공작부 부장인 왕가상은 서백파로 가서 당의 제7기 2중전회에 참가하고, 모주석을 만난다. 대화하는 와중에 모택동이 말한다: "우리는 금방 전국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다. 나는 네 의견을 듣고 싶다. 우리의 정부는 수도를 어느 곳으로 정하면 좋겠는가?" 모택동이 이어서 말한다: "역사상, 역대왕조는 서안, 개봉, 남경, 북평에 수도를 정하지 않았느냐. 우리의 수도를 어디로 정하면 적합하겠는가? 중앙에서도 생각은 있지만 아직 최종결정을 못내리고 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디다." 왕가상은 태도가 엄숙하게 바뀐다. 실제로, 그도 이 문제를 고려해 보았다. 그는 생각을 잠깐 정리한 후 천천히 말한다: "제가 보기에, 현재 국민당정부의 수도 남경은 비록 자칭 호거용반이고, 지리가 험요하다고 하지만, 그저 역사를 뒤져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금릉을 수도로 정했던 왕조는 국민당정부를 포함해서 모두 단명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숙명론의 색채를 지니고 있는데, 우리는 당연히 이를 믿지 않습니다. 다만,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남경은 동남연해에서 너무 가깝고, 현재의 국제형세로 보면 이것은 아주 큰 결함입니다. 우리는 남경을 수도로 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왕가상은 이어서 말한다: "다시 서안을 보면 그 결함은 너무 서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의 강역은 진한수당시대가 아닙니다. 그때 장성은 변경선이었으나, 현재 장성은 중국의 복지(腹地)에 누워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서안을 수도로 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모택동도 찬동을 표시한다. 왕가상은 다시 말한다: "황하연안의 개봉, 낙양등 고도는 중원경제의 낙후로 인하여, 그리고 이런 국면이 단기간내에 개선되기 어려우며, 게다가 교통 및 황하의 수재문제로 수도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모택동은 웃으면서 물어본다: "그렇다면 어디를 수도로 정하면 된단 말이냐?" 왕가상이 침온하게 말한다: "제 생각에 우리나라의 수도로 가장 이상적인 장소는 북평입니다. 북평은 연해지구에 위치해 있어 경제가 발달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동북과 관내를 연결하는 인후에 해당하는 장소입니다. 전략적인 지위가 아주 중요합니다. 금일 중국의 명맥이 소재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북경은 소련과 몽골에 가까워, 전쟁의 우려가 없습니다. 비록 바다에 가깝기는 하나, 발해는 중국의 내해입니다. 요녕, 산동의 두 반도가 지키고 있습니다. 전략적으로 보면 비교적 안전합니다. 일단, 국제적으로 일이 발생하더라도, 즉시 수도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외에, 북평은 명청 두 왕조의 수도입니다. 인민군중의 마음 속에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유리한 조건을 고려하면, 제 생각에 북평을 수도로 정해야 합니다.
모택동은 이처럼 시원하고 통쾌한 의견을 듣자 마음에 안위를 느낀다. 그래서 연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모택동은 한편으로 웃으면서 한편으로 말한다: "가상, 너의 분석은 내 뜻에 딱 들어맞는다. 보기에 우리의 수도는 북평으로 정해야 겠구나. 장개석의 수도는 남경인데, 그의 기반은 강소절강의 자본가였다. 우리는 북경을 수도로 정하는데, 우리도 북평에서 우리의 기반을 찾아야 겠다. 이그것은 바로 노동자계급과 광대한 노동군중이다." 확실히, 왕가상의 식견은 모택동이 최종적으로 북평을 수도로 정하게 하도록 만들었다.
3월중순, 모택동과 당중앙영도기관은 서백파에서 북평으로 옮겨온다.
8월 21일에서 30일까지, 북평에서 신중국 제1차성회가 개최된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전체회의. 회의에서는 국도를 정하는 의견을 심의토론하고 표결을 한다. 전체 대표는 박수로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신중국의 수도는 북평에 두기로. 그날부터 북평은 정식으로 북경으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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