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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

디코스 vs KFC: 치킨전쟁, 두도시 이야기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상계초상망

 

 

 

"큰 바람도 두렵지 않다, 큰 비도 두렵지 않다. 번개처럼 바람처럼 나아간다. 갈수록 강해진다!" 디코스(Dico's, 德克士)의 점포앞에서 직원들은 '사랑의 격려' 아침체조를 하면서, 기운넘치는 구호는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한번씩 돌려보게 만든다.

 

"잘난 척하지 말라. 누가 살아남고 누가 떠날지, 보면 알 것이다." KFC의 점포에서는, 광고모델 커전동(柯震東, Kai Ko)의 광고모토도 시끄러워서 귀가 다 멀 정도이다.

 

-- 이것은 설날기간동안, 베이징의 길거리의 모습이다. 디코스의 백색 작은새브랜드와 KFC의 엉클 샘이 나란히 서서 격렬한 선전소리와 폭죽소리가 뒤엉켜 화약냄새가 진동을 했다.

 

격렬한 감정표현은 상대방에 대한 상호간의 멸시일까, 아니면 자기격려일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몇번 곡절을 거친 디코스에 있어서, 더욱 신경쓰는 것은 근20년동안 고생헤서 얻은 성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2000여개의 패스트푸드점으로 KFC의 겹겹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번 쓰러졌던 베이징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다시 점포를 연 것이다.

 

베이징 -> 충칭, 스쳐지나간 베이징

 

시간은 1996년으로 되돌아간다. 딩신(頂新) 4형제가 창업한 캉스푸(康師傅)는 이미 100억위안을 넘어섰고, 회사앞에는 도매상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서 현금을 보따리로 들고 와서 주문을 했다. 이것은 위씨형제들로 하여금 패스트푸드업종에 진출할 여력을 남겨주었다.

 

이때의 서양식 패스트푸스시장은 기본적으로 KFC와 맥도날드가 업계규칙을 만들었다. 단지 하나는 치킨을 위주로 하고 하나는 햄버그를 위주로 할 뿐이다. 위씨가족은 바로 "디코스" 서양식 패스트푸드점을 내놓는다. 넷째인 웨이잉싱(魏應行)이 경영을 맡는다.

 

웨이잉싱은 혈기방장했다. 그가 보기에 서양식 패스트푸드점은 그다지 복잡할 것이 없다. 그저 두 조각의 튀긴 닭가슴살, 빵 1개, 여기에 채소샐러드를 추가하고, 다시 으깬 감자에 콜라를 내놓으면 된다. 웨이잉싱은 잘 알았다. 중국시장을 뚫으려면 반드시 베이징에서 싸워야 하고, 베이징에서 자리를 잡은 다음에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디코스가 북경으로 진입하려고 할 때, 큰형 웨이잉저우(魏應州)가 반대한다: "너무 자신을 드러내놓고 싸우게 되면, 승산이 없다." 웨이잉저우는 캉스푸의 창업자이고, 전적이 화려하다. 그러니 그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전체 딩신집단은 확실히 패스트푸드에는 경험이 없었다. 이번에 처음 디코스라는 이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브랜드를 들이밀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닭다리를 파는 곳으로 알았다. 웨이잉싱은 냉정하게 생각하고, 장단점을 분석한 다음, 그는 먼저 KFC가 아직 진출하지 않은 빈 시장부터 손을 대기로 한다. 그리하여 경험이 성숙된 이후 다시 베이징에 들어올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디코스는 충칭을 선택하다.

 

위이잉싱은 먼저 모방을 한다. 점포의 레이아웃, 서비스방식에서 제품이 빵에 프라이드치킨인 것, 그리고 다시 음료수를 주는 것까지. KFC의 서양아저씨 이미지와 구분하기 위하여 디코스는 자신의 표지를 내놓는다. 녹색으로 대문자 "D"자를 쓰고 흰색의 작은 새와 영문 "Dico's"를 쓴다.

 

단순히 모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제품에 있어서, KFC는 프라이드치킨으로 유명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런 프라이드 치킨과 치킨버그를 내놓았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웨이잉싱은 한 튀김기계공장을 방문했을 때, 튀김기계가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식한다.

 

KFC의 주력제품은 오리지날맛 치킨이다. 폐쇄형 압력솥에서 튀기므로 약간의 작은 문제가 있다: 육질이 질기고, 껍질이 바삭바삭하지 않다. 그리고, 오리지날 맛이므로 맛도 그다지 진하지 않다.

 

디코스가 니놓은 치킨은 튀김기계로 튀기는 것이다. 자연압력하에서, 익히는 절차를 생략했다. 그래서 치킨의 색깔이 금황색이고,맛은 더욱 바삭바삭했다. 웨이잉싱은 이 제품의 이름을 직접 "취피작계(脆皮炸鷄)"(껍질이 부드러운 프라이드치킨이라는 의미임)로 지었다. 그리고, '취피'라는 컨셉트를 디코스의 브랜드와 묶어버린다.

 

당시에, 당시의 충칭에서는 양식을 먹더라도 그저 서양식 패스트푸드였고 이것이 유행이었다. 디코스는 순식간이 충칭 일대를 석권한다.

 

디코스가 충칭이라는 2선도시를 선택함으로써, KFC의 전략중심지를 피하고, KFC의 교살을 피하여 자신이 순조롭게 성장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디코스가 인기를 끈다는 소식은 지구 반대편의 미국에까지 전해진다. KFC의 회장인 스티븐 레인문드(Steven Reinemund)는 급히 아시아지역 CEO 쑤징스(蘇敬軾, Sam Su)를 불러서, "반드시 충칭에 진입하여, 전략적인 타격을 가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쑤징스는 상사를 설득한다: 디코스가 비록 인기를 끌지만,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 그리고 KFC의 전략중심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등 1선도시이다. 디코스와는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관계이다.

 

상대가 없는 디코스는 자신의 작은새 표지를 충칭의 사방에 자리잡게 하고, 하나하나 장사가 잘 되었다. 그리하여, 윈난, 꾸이저우, 쓰촨 등지로 확장한다.

 

웨이잉싱은 시기가 이미 성숙했다고 생각하고 바로 불을 붙여서 베이징으로 진군하여 숙원을 이룬다.

 

충칭 -> 베이징, 베이징의 첫싸움

 

KFC가 첸먼(前門)에 점포를 내면, 디코스도 전문에 들어가고, 커널 샌드스(KFC의 창업자)가 왕푸징에 나타나면 왕푸징으로 가서 점포를 찾았다. 당연히, 이런 근접전을 벌인 것에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 선택한 위치가 모두 황금상권이어서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다. 디코스는 켄터키를 따라서 하나하나 점포를 열었다.

 

디코스가 고양이를 보고 호랑이를 그리는 것을 보고는 쑤징스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어쨌든 KFC는 중국에서 맥도날드만이 적수가 될 수 있었다. 웨이잉싱은 큰소리를 쳤다: "나보고 호로(葫蘆)를 보고 박(瓢)을 그린다고 하는데 박을 아주 크게 그려주겠다." KFC의 점포면적이 200평방미터이면 디코스는 500평방미터를, KFC가 500평방미터이면 디코스는 1000평방미터로 했다.

 

웨이잉싱이 이처럼 손크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베이징의 패스트푸드기업이 막 흥기하기 시작하여, 건물주들의 태도가 괜찮았기 때문이다. 디코스가 대도시에서 뿌리를 내리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서, 우대조치도 취해준다. 먼저 일부분 계약금을 내고, 임대료는 연말에 완납한다. 이렇게 되니 디코스의 자금문제는 상당히 해결되게 된다.

 

웨이잉싱은 자신이 충칭에서 대거 성공을 거둔 취피작계를 베이징으로 가져온다. 스스로 이것이 KFC의 아픈 곳을 건드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래 대담한 웨이잉싱은 시장경쟁은 프로모션광고에 재품채널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일찌감치 일련의 제품과 일련의 마케팅대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KFC가 공격해 오기만을 기다렸다.

 

예를 들어 큰 돈을 투입하여 장후이메이(張惠妹)를 광고모델로 기용하여, 광고폭격을 가한다. 과연 디코스 단일점포의 월영업액이 크게 늘어난다. 어떤 점포는 심지어 10만위안을 넘기도 하였다. 비록 KFC의 1일 매출에는 못미치지만, 어쨌든 자리를 잡은 것이다.

 

폭풍뇌우는 오지 않았다. 아마도 걱정을 너무 많이 한 것같다.

 

그렇게 속도는 모든 것을 결정했다. 웨이잉싱은 달리는 말에 채찍을 대어 신속히 베이징에 다시 2개 점포를 개설한다. 그리고 상하이, 광저우, 우한, 정저우, 쑤저우, 위시등에 진출한다.

 

디코스가 순조롭게 발전해나가고 있을 때, 사건이 발생한다. 베이징의 모든 디코스매장에 돌연 통지서가 날아든 것이다. "임대료가 인상되었다. 그리고 일시불로 수년의 비용을 지급해달라." 건물주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요구하는 임대료는 디코스의 실제영업액의 수십배였다! 더욱 우울하게 만든 것은 웨이잉싱이 알아본 결과, 건물주들은 KFC와 맥도날드에는 임대료를 올리지 않았고, 연간임대료방식을 매출액에서 이익분배방식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원래, 웨이잉싱이 잘 나가고 있을 때, 쑤징스는 맥도날드의 CEO 제임스 칸타루포(James Cantalupo)를 만난다. 칸타루포도 디코스라는 불청객에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맥도날드와 KFC는 전세계에서 라이벌이지만, 양자는 근 반세기동안의 쟁탈을 토하여 누구도 상대방을 없애지 못했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전략적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디코스의 칼이 날아오면, 반드시 국면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서양인들도 중국식의 모략에 익숙했다. 돈많은 KFC와 맥도날드가 손을 잡자, 건물주들은 당연히 그들에게 밉보일 수 없었다. 재수없게 된 것은 아직 날개가 튼튼해지지 못한 디코스였다.

 

이어서, 쑤징스는 TV에서 KFC는 반세기의 프라이드치킨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계속하여 강조한다. 이것도 디코스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비록 극력 자신도 텍사스주의 혈통을 지니고 있다고 강변했지만, 충칭에서 사업을 시작한 디코스에 대하여 소비자들은 여전히 차별심리가 존재했다. 디코스의 판매는 신속히 하락하고, 1개점포의 1달 영업액이, KFC 점포의 1일 영업액에도 못미치게 되었다.

 

더욱 난감한 것은 상하이, 광저우등 1선시장에서도 속속 베이징을 따라 임대료를 인상하는 것이다. 높은 임대료원가는 신속히 디코스의 이윤을 갉아먹었다. 웨이잉싱의 자금줄은 빠듯하게 된다. 준비해두었던 다음번 마케팅패키지는 즉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브랜드의 축적이 너무 얕았고, 날개가 아직은 단단해지지 않았던 디코스는 베이징에서 5000만위안의 결손을 나타내고, 자금회전이 힘들어진다. 이어서 상하이, 광저우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도고, 각지의 결손은 급격히 올라가서 1.5억위안에 이른다. 1998년, 자금이 바닥난 디코스는 부득이 아픔을 참고 팔다리를 잘라버린다. 어쩔 수 없이 1선시장에서 철수한다. 전국에서 충칭, 위시(玉溪), 난닝(南寧), 정저우(鄭州)등 2,3선도시에 10여개의 점포만 살아남는다.

 

베이징 -> 충칭, 중경보위전

 

온몸에 상처를 입은 디코스는 충칭등 2선시장으로 물러난다. 다행히 충칭에서는 디코스의 취피작계가 이미 성공을 거두어 월간 수십만마리를 판매할 수 있었다. 다만, 웨이잉싱은 알고 있었다. 제품이 너무 단순하여, 나중에 KFC와 싸우려면 주요제품을 더 많이 늘여야 했다. 서양식 패스트푸드는 프라이드 치킨 이외에 햄버거가 있다. 웨이잉싱은 햄버거를 취급하기로 결정한다. 충칭을 중심으로 새로 세력범위를 건립할 생각이었다.

 

이때, KFC는 충칭의 해방비 회선루에 점포 1개만 있었다. 제품은 주로 짜지도 맵지도 않은 '전원취계보(田園脆鷄堡)'를 주력으로 했다. 확실히 매운 것을 좋아하는 충칭사람의 압맛에 맞지 않았다. 하물며 충칭인들은 빵에 대한 흥미도 크지가 않다.

 

상대방의 약점은 바로 기회이다. 웨이잉싱은 기세를 타고 KFC의 햄버그빵을 찹쌀로 쪄서 만든 협편(夾片)으로 만들어 "쌀햄버그(米漢堡)"로 이름을 붙인다. 이런 간단한 업그레이드가 현지인의 입맛에 맞았다. 쌀햄버그는 단일점포 월매출이 만개에 이를 정도였다.

 

쌀햄버그가 대인기를 끌었으므로 이를 기초로 디코스는 다시 빼운 닭다리햄버그도 내놓는다. 충칭, 정저우등 2,3선도시에서 기세를 유지하면서, 웨이잉싱은 신속히 디코스는 푸저우, 텐진, 항저우 등지로 확장한다. 2000년, 디코스의 점포는 겨우 10여개에서 100여개로 급증한다. 이것은 당연히 웨이잉싱이 권토중래를 위하여 준비한 작업이다. 먼저 2,선에서 1선도시를 포위하는 태세를 취하고 다시 베이징을 공략한다는 것이다.

 

"쌀햄버그 1개만으로 이렇게 인기를 끌어 시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 있는가?" 이것은 쑤징스로 하여금 경계심을 발동하게 만들었다. 햄버거는 원래 KFC의 주력제품이다. 어찌 도전을 허용하겠는가? KFC는 충칭에 화력을 증가시키기로 결정한다. 일단 충칭을 얻어내면, 음식습관이 비슷한 난닝, 위시등 2,3선도시도 마찬가지로 잠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운 것으로 매운 것을 제압한다. KFC는 향랄계퇴보(香辣鷄腿堡)를 내놓는다. 과연 소비자들이 속속 되돌아왔다. 신제품의 기세를 빌어 KFC는 급속히 점포를 충칭의 해방비에서 장베이, 샤핑바등 지역으로 확장하고, 전면적으로 디코스를 포위한다. 쑤징스는 정저우, 항저우등 중남부지구에서도 전면반격할 준비를 했다.

 

웨이잉싱은 그제서야 거두의 실력을 느낀다. 긴급히 천미향랄보(川味香辣堡)를 내놓았지만,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2005년 3월, 디코스 충칭점이 모든 점장은 해방비로 소집된다. 상대방점포에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것을 보고는 모두 거의 문을 닫을 준비를 한다.

 

디코스에 패배심리가 상하에 만연하고 있을 때, 의의의 소식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KFC 베이징점포에서 공상국에 의하여 햄버거닭다리에서 금지품인 쑤단홍(蘇丹紅, Sudan III Solution)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식품안전은 패스트푸드업의 레드라인이다. KFC는 큰 타격을 입는다. 수개뤌후 충칭 해방비점포는 문을 닫는다. 라이벌인 맥도날드도 기회를 틈타서 '낙정하석'한다. 베이징에서 공격을 하여, 점포수에서 KFC에 접근한다. 쑤징스는 부득이 충칭등 2,3선시장을 잠시 놔두고, 베이징의 위기에 전력대응한다.

 

웨이잉싱은 역시 사람은 죽으란 법이 없다고 소리친다. 그는 한편으로 수하를 지휘하여 국내 각매체에 팩스를 보내어, 디코스는 절대로 수단홍을 쓰지 않는다고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 디코스는 첨가제를 쓰지 않는다. 만일 디코스에 위법성분이 발견되면 고발자에게는 큰 보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숨을 쉴 기회를 얻자, 디코스는 다시 판세를 뒤집는다. 취피작계와 쌀햄버거는 서남시장의 총아가 되었을 뿐아니라, 신속이 시안,란저우, 시닝등지로 확장한다. 이 해에, 디코스의 점포수는 급속히 480여개로 증가한다.

 

충칭 -> 베이징 -> 충칭, 2,3선도시에 깊이 진입하다.

 

1년도 되지 않아, 디코스의 정비는 완료되고, KFC와 베이징에서 몇번 전투를 벌이게 된다. 쌍방은 마케팅, 신제품개발에서 계속 싸운다. 결국 KFC가 위위구조(圍魏救趙)로 많은 점포모집매니저들을 충칭, 시안, 쿤밍등지로 내보낸다. 2,3선도시에 1000여개 점포를 개설할 준비를 한다. 이리하여 디코스에 대하여 포위와 견제를 하고자 한다. 후방이 시급해지고, 베이징시장에서 일시에 우세를 얻을 수 없게 되자, 2007년 7월 웨이잉싱은 다시 베이징에서 철수한다.

 

충칭까지 추격해온 KFC는 지난번의 교훈을 경시할 수 없었다. 쑤징스는 더 이상 전력으로 출병하지 않는다. 그저 우회적인 대책을 꺼내든다. 2,3선도시는 프랜차이즈업체에 개방하고, 자신은 대도시의 경영에 정력을 집중한다. 이것은 KFC의 신임 글로벌CEO 베이비드 노박의 요구와 맞아떨어졌다: "2,3선도시는 프랜차이즈업체에 개방한다. 다만 수량은 5%이내로 통제한다. 그리고 800만위안의 가맹문턱을 둔다." 진입문턱은 비록 높지만, 브랜드영향력으로 KFC는 창사, 시안등 수십개의 신시장을 열었고, 점포는 2600개로 증가한다. 디크스의 서남, 서북에서의 확장추세를 확실하게 견제했다.

 

가맹점을 쟁탈하는 것은 결국 최후에 점포수량으로 고하를 겨루자는 것이다. 상대방을 누르느냐, 상대방에게 눌리느냐의 문제이다. 이에 대응책으로 웨이잉싱은 직접 가맹비를 절반으로 깍아버린다.

 

원래 2,3선도시에서 우세하던 디코스는 더욱 빨리 내공을 수련해야 했다.

 

상대방의 식품안전교훈을 받아들여, 디코스는 전문적인 연구개발인원을 디저트음료, 쌀햄버거, 소스등 팀으로 나누고, 매 3개월마다 원재료를 모조리 한번씩 검사한다. 닭고기공급상에게는 매2개월에 1번씩 검사한다. 소고기는 매달 최소한 1번 출하하고, 매번 검사를 한다.

 

가격대비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KFC햄버거에서 사용하는 야채의 무게는 5-10그램이지만, 디코스는 20그램이상으로 한다; KFC는 닭고기를 9조각으로 자르지만, 디코스는 8조각으로 자른다. 이렇게 하여 디코스의 1조각은 KFC보다 양이 많다.

 

맛을 끌어올리기 위해, 디코스는 햄버거빵, 닭다리, 데리야키소스, 야채배합비율을 하나하나 연구개발한다. 그리고 토마토소스를 황두(黃豆) 소스로 바꾼다. 그리하여 디코스프라이드치킨의 맛과 포만감이 더욱 짙고 강하게 만들었다.

 

웨이잉싱은 단순히 KFC의 기초 위에서 혁신하고 규범화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서양식 패스트푸드점에서 식사하는 사람은 젊은이와 아동족을 제외하면 대부분 쉬면서 배터리충전을 하는 화이트칼라였다. 그래서 디코스에서는 화이트칼라의 애프터눈티세트와 야식세트를 내놓는다. 그리고 1인 및 2인 세트를 내놓는다. 신선한 이념에 디저트와 진한 뜨거운 음료를 배합하여, 디코스의 장사는 더욱 잘되기 시작한다.

 

웨이잉싱의 시장을 깊이 파고들려는 노력은 소비자들에게 받아들여졌을 뿐아니라, 프랜차이즈점의 태도에서도 효과를 나타낸다. 화이트칼라세트메뉴가 나오자, 수백개의 프랜차이즈점들이 속속 디코스의 산하로 되돌아왔다.

 

웨이잉싱은 자신의 프랜차이즈비를 100만위안까지 내린다. 그리고 이윤손실을 만회할 방법을 생각해낸다. 공급상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KFC가 사용하는 것은 가격이 150만위안에 달하는 미쓰비시 튀김기계이다. 웨이잉싱은 국내업체와 합작하는 방식을 개발한다. 그리하여 설비원가를 70만위안가량으로 낮춘다. 이 가격우세만으로도 디코스는 2,3선도시의 점포수량을 1500여개로 급증시킨다.

 

디코스의 가격전방식은 쓰징스를 골치아프게 만든다. 다만, KFC의 구매절차는 복잡하여 일시에 바꾸기는 어려웠다. 쏘징스는 CEO인 데이비드 노박에게 도움을 청한다. 본사의 협조하에, KFC는 자신의 관련회사인 피자헛(必勝客), 타코벨등과 함께 구역별 통일구매, 통일배송제도를 시행한다. 이렇게 하여 KFC는 프랜차이즈비용을 200만위안까지 끌어내린다.

 

디코스는 이어서 캉스푸와 공동구매의 통일배송모델을 취하여 원가를 더욱 낮춘다. 가맹비도 25만위안까지 내린다. KFC의 1/8에 불과한 수준이다. 저비용에 이익회수기간이 짧다는 장점으로 2013년까지 2000개에 가까운 디코스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충칭 -> 베이징, 오뚜기는 다시 일어서다

 

웨이잉싱은 자신의 최초의 꿈, 베이징을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

 

KFC와 점포수에서 비교하면 아직도 차이가 있다. 다만, 한때 밀려나서 소도시에서 겨우 숨을 쉬었던 도전자로서, 디코스는 이런 권토중래의 기세로 북경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응원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일찌기 2년전에 디코스는 2,3선시장에서 70여억위안의 자금을 축적하여, 날개도 이미 단단해졌다.

 

세번째 베이징입성에서 디코스는 전투에 자신감이 더욱 붙었다. 점포위치에서 디코스는 가장 번화한 베이징남역,푸청먼점포를 주공력방향으로 했고, 자신의 점포를 KFC의 바로 이웃에 두는 것도 전혀 회피하지 않았다.

 

이 황금상권에 뿌리를 내리고, 전위적이고 유행을 따르는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수립하기 위하여, 디코스는 아시아의 댄싱킹 뤄즈샹(羅志祥)을 광고모델로 쓰고, 각 위성TV에서 광고의 융단폭격을 가한다. 그리고 매월 특정일자에는 소비자들이 한 개를 하면 한 개를 더주는 판촉활동도 벌인다.

 

2014년 설날, 이날은 한 해를 시작하는 좋은 시기이다. 디코스는 뤄즈샹의 "바삭한 껍질 한 입, 부드러운 속살 한 입", "기분이 좋으면 카츠카츠(咔滋咔滋, 먹을 때 나는 소리)"등 취피작계를 위주로 하는 선정적인 광고를 내놓는다. "마음대로 소비하고, 로디(Rody, 이탈리아 말 캐릭터)저금통을 얻고, 용마정신으로 새해를 보내자."는 활동도 한다. 그리고 가장 사랑받고 가장 인기있는 Lucas(장백지의 아들)를 아동광고모델로 썼다는 소식도 터져나온다. 다시 점에서 면으로 확대시켜, 남역, 푸청먼에서 점점 스징산, 첸먼, 동청, 시청으로 확장한다. KFC가 들어차 있는 경성에 포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웨이잉싱은 잊을 수 없다. 디코스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 그는 손목시계를 오른 손목에 차고는 시시때때로 시간이 얼마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했다.

 

지금 디코스는 전국의 점포수가 2000개를 넘었다. 제품표준화, 원가세부화관리를 점차 실현한다. 여러번 쓰러졌던 가슴아픈 땅에서 디코스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베이징, 그동안 잘 지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