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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인종의 아량(雅量)과 인서(仁恕)

by 중은우시 2014. 1. 14.

글: 우운국(虞雲國)

 

송인종은 42년간 재위한 송나라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황제이다. 중국황제중에서 공정하게 애기하자면, 그는 분발유위의 영주도 아니고, 심지어 명성이 탁월한 명군도 아니다. 다만 그의 최대 장점은 바로 관용인후(寬容仁厚)하다는 점이다. 그는 각종 격렬한 비평도 용인했다. 그것이 그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말도안되는 비난일지라도. 그의 치하에 대간관(臺諫官)뿐아니라, 설사 기타 관리나 사대부라고 하더라도 군주제하에서 보기 드문 언론자유를 누린다. 그의 시호는 "인(仁)"이고, <송사> 본기에 그는 "공검인서(恭儉仁恕)"하다고 적었는데, 더 없이 적절한 결론이다.

 

중국의 청관책(淸官冊)중 첫머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포증(包拯)이다. 그가 간관으로 있을 때, 송인종이 가장 총애한 후궁은 장귀비(張貴妃)이다. 장귀비의 큰아버지인 장요좌(張堯佐)는 삼사사(三司使)를 하고 있었는데, 속칭 "계상(計相)"이다. 이 직위는 전국재정을 장악하는 요직이다. 다만 이 큰아버지는 본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부상(副相)의 자리까지 노렸다. 포대인과 다른 대간관은 속속 상소를 올렸고, 인종은 할 수 없이 그의 삼사사 직위를 해임한다. 그를 달래기 위하여 그에게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 회강군절도사(淮康軍節度使), 경령궁사(景靈宮使), 동군목제치사(同群牧制置使)를 겸직시킨다. 철면 포증은 상소를 올려, 그가 "청조지예오(淸朝之穢汚), 백주지이매(白晝之魑魅)"라고 하였을 뿐아니라, 직접적으로 송인종이 "실도패덕(失道敗德)"했다고 공격한다. 황제에게 '실도패덕'하다고 하는 것은 최대의 악평이다. 송인종은 장요좌를 임명하기 위하여 그의 말을 신경쓰지 않는다. 조회하는 날, 포증은 전체 대간관과 연합하여, 백관을 이끌고 송인종에게 간언한다. 대간이 집단으로 군주에 대항하는 강경수단을 쓴 것이다. 송인종은 먼저 대노했으나, 여론에 밀려 결국 양보를 한다. 장요좌의 선휘남원사, 경령궁사를 면직시키고, 나머지 두 사는 보류한다.

 

얼마 후, 장귀비가 다시 베갯머리송사를 해서, 여론이 가라앉는 것을 보자, 송인종은 장요좌를 다시 선휘남원사로 임명한다. 포증이 이를 알고는 불요불굴하게 다른 간관을 이끌고 전각으로 나아가 논쟁한다. 하루는, 장귀비가 큰아버지를 위하여 말하려 하자, 송인종이 가로막으며 말했다: "오늘 포증이 전각에 올라와서, 침을 짐의 얼굴에 튀기면서 말했다. 너는 그저 선휘사, 선휘사를 달라고 하는데, 포증이 간관인 것은 모른단 말인가?" 간쟁을 위하여, 포증은 황제의 얼굴에 침을 튀기기까지 했다. 송인종은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삼푼을 양보한다. 이를 보면 중국제일의 청백리가 나타난 것은 송인종의 인서,아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일 더욱 전제적인 명나라때였다면, 그를 감옥에 집어넣거나, 정장(廷杖)이 혹형으로 그를 반죽음 상태로 만들었을 것이다.

 

수렴청정의 유태후가 죽자, 25세에 친정을 하게 된 송인종은 졸지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해방감을 맛본다. 밤낮으로 후궁들과 놀아난다. 저명한 학자 석개(石介)는 곧 재상이 될 왕증(王曾)에게 글을 올려 말한다: "듣기로 황제가 여색을 가까이 하며 점점 덕을 잃어가고, 배우와 가수들이 날로 황제의 앞에서 공연을 하고, 부인이 궁내에서 음란한 일을 벌이고, 술을 마시는 것을 절제하지 않으며, 밤낮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소문에 듣기로 이로 인하여 황제가 "불예(不豫)하다고 한다." 말을 아주 날카롭게 하였다. 여기서 '불예'라는 것은 황제의 병위 위중하다는 용어이다. 이것은 '부인이 궁내에서 음란한 일을 벌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바로 한무리의 여자들이 후궁을 난잡하게 어지럽힌 때문이라는 것이다. 석개는 왕증이 '이것을 간해주고' '황상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는 "도끼를 지고 천자의 앞으로 나아가, '광알(狂訐)'로 상부에 지은 죄로, 그 자리에서 죽겠다" 왕증이 이 말을 그대로 송인종에게 전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재상에 오른 후, 석개의 '광알'에 대하여 치죄하지는 않은 것이 분명하다.

 

석개와 달리, 당시 간관을 맡고 있던 등종량(滕宗諒, 범중엄이 쓴 <악양루기>에 나오는 등자경(滕子京)이다)은 직접 상소를 올린다. 엄중한 말로 송인종이 '내총(內寵)'에 빠져있다고 공격하고, "날로 깊은 궁궐에 거처하면서 황음한 연회에 빠져 있어, 조정에 나와서도 피로한 기색을 드러내고, 일을 결정하는 일을 황제는 신경쓰지도 않고 있다."고 공격한다. '조정에 나와서도 피로한 기색을 드러내고' 는 송인종이 조회에 나올 때도 여색에 빠져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모양을 그대로 드러냈다. 황제의 체면은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조치는 동급의 전보였다. 조정에서 나가게 하여 지주를 맡게 한다.

 

또 한가지 일은 송인종이 언론에 대하여 얼마나 관대했는지를 말해준다. 송인종이 한 거자(擧子)가 성도지부에게 시를 써서 보내는데, "파단검문소잔도(把斷劍門燒棧道), 서천별시일건곤(西川別是一乾坤)"이라 했다. 그는 성도지부에세 검문관을 막고, 잔도를 불태워서 사천으로 들어오는 길을 없애고서 사천을 지방의 할거정권으로 만들라고 고무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반시(反詩)이다. 현재로 말하자면 국가전복죄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수호전>의 "심양루송강음반시"라는 장면을 보면, 그 결과 직접 사형수감옥에 갇힌다. 성도지부는 당연히 이것을 자신이 처리하지 못하고, 이 거자를 가둔 다음, 조정에 보고한다. 송인종은 그러나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것은 늙은 수재가 관직을 빨리 가지고 싶은 마음에 저지른 것이다. 그의 죄를 다스릴 필요는 없고, 그저 그에게 먼 곳의 작은 주군에서 사호참군정도를 하도록 해주면 된다." 이 일을 보면 송인종이 얼마나 인자하고 관용적인지 알 수 있다.

 

<송사.인종기>에선느 전체적으로 송인종의 통치시기를 이렇게 평가한다: "측단지심(惻怛之心),  충후지정(忠厚之政), 유이배옹송삼백여년지기(有以培壅宋三百年之基)" 송인종대 비록 외환, 내정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북송의 치세이다. 송나라를 전체적으로 볼 때, 사대부의 언론자유권이 송인종때 가장 충분히 발휘된다. 그들은 "천하를 자신의 임무라고 여기는" 사명감이 이 시기에 가장 고양된다. 모든 이런 치세의 분위기는 송인종의 관용,인자한 분위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우리는 송인종과 같은 '인군(仁君)'을 꼭 받들어 모실 필요는 없다. 군주정체로 후퇴하기를 바라서도 안된다. 다만 송인종과 후세의 그 '호랑이의 엉덩이는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독재자들과 비교할 때, 누가 낫고 누가 못한지의 공정한 결론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