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작비비(黃雀飛飛)
구준과 정위는 원래 아주 좋은 친구였다. 구준은 정위보다 5살이 많고, 어려서부터 이름을 날린다. 18살때 진사에 합격하고, 33살에는 참지정사가 되며, 43살때는 재상에 오른다. 송태종, 송진종 두 황제때, 구준은 직언으로 간언하고, 재주와 지혜가 남달랐으며, 과감하게 대사를 처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정위는 순화3년의 진사이다. 이해에 구준은 이미 추밀직학사라는 고위직에 있었다. 다만, 정위는 기민하고 지혜가 많았으며, 박학다식했다. 글재주가 뛰어나서 진사급제하기 전부터 이름을 날렸다. 관직에 나간 후, 조정에서건 아니면 지방의 지주, 지부로 나가 있을 때이건, 그는 정치적 업적이 뛰어났다. 천하에서 공인한 천재였다. 아마도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것인지, 구준과 정위는 상당한 기간동은 서로를 높이 평가하고 인정해주었다.
구준은 관직에 빨리 나가고, 명망이 높아고, 파격적으로 신인을 기용하는 것을 좋아했다. 다만, 정위를 발탁할 때, 그는 재상 이항(李沆)의 반대에 부닥친다. 구준은 재능과 학식, 그리고 일처리능력을 중시했지만, 이항은 개인의 품행을 더욱 중시했었다.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정위는 투기취교(投機取巧),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는 누습이 점차 드러나게 된다. 한번은 구준이 이항에게 정위를 추천한다. 이항은 정위의 사람됨을 좋게 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자는 확실히 재주는 있다. 다만 그 사람됨을 보면, 그가 다른 사람의 위에 있을만한 자인가?" 구준이 말을 받는다. "정위와 같은 사람을 당신이 어찌 오랫동안 억압하여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아래애 둘 수 있겠는가?" 이항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나중에 당신이 후회할 때, 내가 한 말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비록 이항등이 충고했지만, 구준은 정위를 좋게 보았고, 정위도 구준에 대하여 계속하여 공손했다. 이런 좋은 관계는 천희3년(정위가 급제한 후로 따지면 개략 20여년후)
천희3년 오월, 구준은 경성으로 불려가서, 중서시랑 겸 이부상서, 평장사의 관직을 맡는다. 이것은 구준이 세번째 재상에 오른 것이다. 이때, 정위는 대중상부(大中祥符)연간의 '뛰어난 실적'으로 이미 송진종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어 있었고, 자신의 계파세력을 보유한다. 구준의 추천하에, 보신군절도사, 지강녕부로 있던 정위는 경성으로 불려와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맡는다. 그는 구준의 조수가 된 것이다. 구준은 여러해동안 친구였던 파트너이므로 자신이 편안하게 태평재상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한 가지 사소한 일 때문에 두 사람은 반목하고 원수가 된다. 하루는 여러 신료들이 중서성에서 식사를 하고 잇었다. 구준은 부주의하여 탕을 쏟아 수염이 젖는다. 정위는 급히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수염을 닦아준다. 구준은 웃으며 말한다: "참지정사는 국가중신인데 상사의 수염을 닦아주어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원래 친한 사람 사이의 가벼운 농담이었다. 그러나 정위는 이미 예전의 정위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놀림을 당하게 되니, 마음 속으로 원한을 품게 된다. 그는 참지정사와 추밀사를 맡게 되니, 일찌감치 재상의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천희4년(1020년) 육월, 송진종은 병석에 누워 정무를 돌보지 못하게 된다. 정령은 대부분 유황후(유아)의 손에서 나온다. 송진종이 구준을 다시 부른 것은 원래 그로 하여금 나이어린 태자를 보좌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후궁의 권력전횡을 막기 위하여, 구준은 송진종에게 태자가 감국하고 여러 대신이 공동으로 보정할 것을 건의한다. 이것은 유황후의 이익을 건드리게 되었다. 정위는 구준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던 유황후, 전유연(錢惟演), 조이용(曹利用)등과 결탁하여, 사방에서 구준의 약점을 수집한다. 그리고 송진종의 병세가 깊어 정신이 흐릿한 틈을 타서 간언하여, 그를 재상에서 해임하고 한직인 태자태부, 내국공으로 내보낸다. 칠월, 내시 주회정이 태자를 세우고, 황후를 폐하고, 정위를 죽이고자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된다. 정위등은 그 죄를 구준에게 돌리고, 그를 태상경으로 강등시키고 상주지주(지금의 하남성 안양)으로 내보낸다. 팔월, 안주지주(호북성 안륙시)로 다시 보낸다. '천서'위작사건으로 다시 도주(지금의 호남성 도현)사마로 좌천시킨다. 건흥원년(1022년) 이월, 송진종이 병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위는 다시 환관 뇌윤공(雷允恭)과 결탁하여, '신하로서 불충하다", "주회정과 교분이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구준을 뇌주(광동성 해강)사호참군으로 좌천시킨다. 다음 해, 구준은 그곳에서 병사한다.
구양수의 <귀전록>에 따르면, 정위는 당초 구준을 멀리 애주로 좌천보낼 생각을 했다. 그러나 조서를 초안할 때 망설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자리애 있던 재상 풍증(馮拯)에게 말한다: "애주는 길도 멀고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속이 깊은 풍증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는다. 정위는 그래서 붓을 들어 조서를 쓰면서 구준을 뇌주로 보낸다. 이때, 정위의 관직은 사도, 재상에 이르고, 진국공에 봉해져 있었다. 조정에서 그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은 많이 쫓아낸다. 정위와 그의 일당이 대권을 독점하고, 기세가 대단했다. 누가 알았으랴. 버마제비가 매미를 잡고 있을 때, 참새가 뒤에서 노리고 있다. 그의 말이라면 모두 군말없이 따르고 있던 풍증의 마음 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정위라는 눈엣가시를 제거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풍증은 송나라때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진사출신이고, 어려서 조보의 인정을 받는다. 사서에서는 그를 '문학이 없고, 성격은 강직하다'고 적고 있다. 비록 구준, 정위처럼 재주가 넘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관료로서는 재능이 있었다. 송태종 지도2년 칠월, 구준의 일처리가 불공정하여 당시 우부원외랑으로 있던 풍증은 공개적으로 글을 올려 구준이 권력을 농단한다고 탄핵한다. 그리하여 구준이 파면되어 경성에서 쫓겨나게 된다(참지정사에서 해직되고 등주지주로 간다). 이런 사정이 있어서, 풍증은 구준과 계쏙 사이가 좋지 않았다. 구준과 정위의 사이에서도 기본적으로 중립을 지킨다. 다만 풍증과 정위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정위는 대중상부연간에 송진종이 좋아하는 것을 하느라고 적극적으로 송진종이 동봉서사(東封西祠)하며 대거 토목공사를 벌이는 것을 도와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어 천하에서는 그를 간사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풍증은 이런 류의 화국앙민(禍國殃民)의 행위에 심히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번 병을 핑계로 중앙정부의 관직을 버리고 지방의 지부,지주로 내보내달라고 청한다. 이것은 아주 고귀한 점이다. 천희말년, 정위는 권력을 독단하고 정치를 어지럽힌다. 자신과 뜻이 다른 사람을 탄압하여, 당시에 "천하를 안정시키려면, 눈엣가시를 뽑아내야 한다"는 동요까지 유행시킨다. 건흥원년, 환관 뇌윤공이 송진종의 능묘건설을 감독한다. 그 과정에서 임의로 능의 위치를 옮기는 바람에 공사가 늦어진다. 그후 그가 궁안에서 금은 수십만냥을 훔쳐냈다는 것도 밝혀낸다. 유태후는 명을 내려 그를 곤장을 때려 죽인다. 이 사건에는 칠십여명이 연루된다. 참지정사 왕증, 재상 풍증등은 이 기회에 능묘건설업무를 주재한 산릉사 정위를 탄핵한다. 그리고 그가 뇌윤공과 결탁하여 권력을 독단하고 정치를 어지럽혔다고 말한다. 정위는 유태후와 권력을 다투다가 이미 갈등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위는 태자소보로 좌천되고 서경으로 보내어진다. 얼마후, 다시 여도사 유덕묘와 어울려 유태후를 희롱하여('어섭요탄(語涉妖誕)"), 결국은 중하게 책임추궁을 당한다. 이미 재상으로 승진한 풍증은 전혀 망설임없이 그를 애주로 귀양보낸다. 이때는 구준이 뇌주로 좌천된지 반년도 되지 않은 때이다. 정위는 외지에서 15년간 떠돌다가 경우4년(1037년) 윤사월 타향에서 객사한다. <송사>에는 그를 "십오년간이나 좌천,유배되어 떠돌았지만, 수염은 희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도량에 탄복한다." 확실히 그는 인물이었다.
관련사료이 기재에 따르면, 정위는 애주로 가면서 뇌주를 지나간다. 구준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양 한 마리를 쪄서 보낸다. 정위는 구준을 만나고 싶어 하나, 구준이 거절한다. 두 명이 개세의 기재는 이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시에 한 호사가는 이렇게 말을 전한다. "약견뇌주구사호(躍見雷州寇司戶), 인생하처불상봉(人生何處不相逢)" 요즘 하는 말로 하자면, "나가서 돌아다니면 언젠가는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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