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왕안석(王安石)은 왜 복건자(福建子)를 미워했는가?

by 중은우시 2014. 8. 26.

글: 송지견(宋志堅)

 

 

 

 

왕안석에 마지막으로 재상에서 파면될 때, 가슴 속에 원망을 품고 있던 대상은 "시종 신법은 안된다"고 주장한 사마광(司馬光)이 아니라, 원래 "왕안석에 찬동해서 신법을 건립했던" 여혜경(呂惠卿)이었다. 여혜경은 복건(福建) 천주(泉州) 사람이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왕안석은 금릉에 물러나 살면서 왕왕 '복건자(福建子)' 세 글자를 썼는데, 아마도 여혜경때문에 망쳤다고 깊이 회한에 잠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몇 글자만 보더라도 우리는 당시 왕안석이 자신과 남에게 원한과 회한의 마음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여혜경은 원래 조정에서 시비가 있었던 사람이다. 사마광은 그를 "험교(險巧)"하다고 말했고, 여공저(呂公著)는 그가 "간사(奸邪)"하다고 했으며, 심지어 왕안석의 형제인 왕안국(王安國)고 "여혜경을 영인(佞人, 아첨꾼)으로 보았다" 다만 당시의 왕안석은 이런 말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혜경이 그의 모든 일에 적극 찬동해주었기 때문이다. 개혁조치는 기풍을 잡는 것이 중요하므로 자연히 십전십미(十全十美)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혜경은 이 부족한 부분까지도 모조리 그의 의견에 따라주었다. 그리하여, 왕안석이 보기에 여혜경은 "그를 가장 가까이 따르는 사람", "그를 가장 높이 받드는 사람"으로 '가장 친밀한 전우'였다. 그리하여 누가 '신법'에 대하여 이견을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은 개혁에 반대하는 것이고, 누가 여혜경에 반대하면, 그것은 바로 왕안석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극력 여혜경을 이끌어 주었고, 그가 조정의 중요요직을 맡게 해주었다. 아마도 바로 이런 심리상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찌기 여혜경은 모든 면에서 왕안석을 따르고, 왕안석이 극력 여혜경을 발탁해서 끌어줄 때, 사마광은 왕안석에서 서신을 써서 이렇게 말한다: "아첨하는 무리는 지금 공의 마음에 들게 온갖 일을 다 하지만, 일단 세를 잃으면 반드시 공을 스스로 팔아먹을 것이다." 사마광은 확실히 안목이 있었다. 여혜경은 나중에 "왕안석"을 팔아먹는다. 사마광의 예언은 불행히도 적중한 것이다. 왕안석이 1차로 재상에서 파면될 때, "여혜경이 뜻을 얻어 잘 나갔다. 그는 왕안석이 다시 기용될까 두려워하여, 왕안석이 관직에 나올 길을 모두 막았고, 왕안석을 해치기 위한 아이디어는 모두 받아들여서 썼다." 왕안석이 재기용된 후, 여혜경은 다시 왕안석이 "진기소학(盡棄所學), 융상종횡지말수(隆尙縱橫之末數), 방명교령(方命矯令), 망상요군(罔上要君)"했다고 고발한다. 이 죄명은 엄청나다. 왕안석이 주류 정통인 유학을 완전히 배신했을 뿐아니라, 왕안석은 황상을 속이고, 허수아비로 만들고, 항거하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조직적으로 왕안석의 변법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면적인 공격이 바로 이전에 사사건건 왕안석에 찬동하던 여혜경의 입에서 나왔다. 정치적 통찰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일이다.

 

왕안석이 '복건자'에 원한을 품은 것은 아마도 여혜경이 나중에 '왕안석'을 팔아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왕안석이 '여혜경으로 인하여 망친 것을 깊이 회한한' 이유는 아마도 원래 자신의 뜻에 사사건건 맞추던 여혜경이 이렇게 자신을 팔아먹을 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여혜경이 이런 가장 악랄한 수단을 쓰지만 않았더라면, 아마도 왕안석은 여전히 여혜경이 자신의 가장 친밀한 전우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혜경이 나중에 왕안석을 팔아먹은 그 뿌리를 살펴보면, 일찌감치 그의 말이라면 뭐든지 맞다고 할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사사건건 그의 말이라면 모두 찬동한다는 것은 충심으로 받드는 것이 아니다. 여혜경에 있어서,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하여 존재한다. 왕안석도 그저 그가 위로 올라가기 위하여 준비한 계단일 뿐이다. 이 계단이 일단 자신에게 짐이 된다면 한발에 걷어차 버릴 것이다. 사사건건 찬동한 것도 실은 변법의 시행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청묘법"이 나올 때, 소철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이연위간(吏緣爲奸), 수유법부능금지(雖有法不能禁止)". 실시과정에서 한기(韓琦)도 이렇게 말한다: "관청에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원래의 취지와 배치된다." 이에 대하여 만일 일찌감치 방비했더라면, "청묘법"은 아마도 예상했던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혜경이 무조건 찬동하면서 원래부터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던 왕안석은 더욱 고집을 피워 강퍅자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미리 막을 수 있었던 폐단이 심해져서 사람들의 불만이 밀물처럼 밀려오게 되었을 때 여혜경이 전면적인 공격을 가해온다. 이는 왕안석이 추진하던 신법에 부저추신(釜底抽薪)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왕안석의 신법은 사마광 혹은 다른 '보수파'의 손에 요절되었다기 보다는, 실로 여혜경과 같이 개혁을 빙자하여 사익을 취하던 소인의 손에 요절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왕안석이 이 '복건자'에 원한을 품고, 여혜경으로 인하여 일을 망친 것을 회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사후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사전에 아부하는 말에 경계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