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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에서 황제의 호칭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by 중은우시 2014. 3. 2.

글: 이묵추(李墨秋) 

 

이전에 중국고대역사를 읽을 때, 나는 왕왕 한 가지 문제에 대하여 의혹을 느꼈다. 즉 우리가 중국고대의 황제를 부를 때, 처음에는 모두 "00제(帝)"(시호)로 불렀다. 예를 들어, 한무제, 수문제 등등. 그러나 당나라때가 되면 이 칭호는 사라지고, 그에 대체하여, "0조", "0종"(묘로)을 썼다. 예를 들어, 당태종, 송고조 등등. 이런 방식은 청나라때까지 계속된다. 당연히, 명나라중후기에서 전체 청나라황제는 우리가 더욱 습관적으로 "00황제"(연호)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어, 만력황제, 가정황제, 강희황제, 건륭황제등등. 다만 묘호로 황제를 부르는 관례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만일 우리가 중국고대의 황제에 대한 칭호를 단계로 나눈다면, 한나라때부터 수나라때까지는 '시호'를 황제의 주요 칭호인 단계라고 할 수 있고, 당나라때부터 명나라중전기까지는 묘호를 황제의 주요 칭호로 한 단계라고 할 수 있고, 명나라 중후기부터 청나라때까지는 연호를 주요 칭호로 한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시호는 사람을 한, 두 글자로 일생의 업적이나 도덕적 행실을 개괄하는 평가이다. 대체로 '개관정론(蓋棺定論)'의 의미가 있다. 문(文), 무(武), 명(明), 예(睿), 강(康), 경(景), 장(莊), 선(宣), 의(懿)는 모두 좋은 뜻이다. 혜(惠)는 약간 평범하다. 예를 들어, 한혜제, 진혜제는 모두 무슨 능력이 있는 황제가 아니었다. 질제(質帝), 충제(沖帝), 소제(少帝)는 왕왕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요절한 경우이다. 여(勵), 영(靈), 양(煬)은 모두 부정적인 의미이다. 애(哀), 사(思)도 좋은 글자가 아니지만, 약간은 동정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만일 말제(末帝), 헌제(獻帝), 순제(順帝)라면 승리자가 실패자를 조소하는 글자이다. 그외에 손권은 하나의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호는 '대제(大帝)'이다. 중국에서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시호의 응용범위는 고대의 제왕장상, 고관대신에 한정된다. 제왕의 시호는 예관이 반복하여 평의를 거치고, 신하의 시호는 조정이 통일적으로 부여한다. 개별적인 문인학사의 경우에도 죽고나서 시호를 받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도연명의 시호는 '정절징사(靖節徵士)'이고, 황정견의 시호는 '문절선생(文節先生)'이다. 장재는 시호가 '명성부자(明誠夫子)'이다. 당나라이전의 시호에는 죽은 사람에 대한 포폄을 알 수 있다. 포(褒)하는 경우에는 상시(上諡)라 부르고, 폄(貶)하는 경우에는 하시(下諡)라 부른다.

 

묘호는 제왕이 죽은 후 태묘에 특별히 실(室) 하나를 두어, 후인들이 제사지내게 할 때 쓰는 명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묘호의 글자 선택은 시호를 참조하지 않는다. 다만 통상적으로 아름다운 의미가 있는 글자를 선택한다. 예를 들어, 태(太), 세(世), 고(高), 신(神), 성(聖), 인(仁), 예(睿), 명(明), 장(章)등이 그것이다. 당나라때부터 시작하여, 왕조의 개국황제의 묘호는 통상적으로 '태조'이다. 제2대황제의 묘호는 보통 '태종'이다. 만일 왕조의 제계(帝係)에 변화가 발생하면, 그 묘호는 '세조' 혹은 '세종'이 된다.

 

연호는 역대제왕 기년(紀年)의 명호이다. 즉 시대의 표시이다. 명청시기에 이르러, 일부 제왕은 이전의 왕조와 구별하기 위하여, 연호로 자신의 조대를 부르는 것을 중시했다. 우리는 편의를 위하여, 고인의 방법을 취하도록 하자. 당나라이전의 황제는 시호로 부르고, 당,송의 황제는 묘호로 부르며, 정나라의 황제는 연호로 부르자.

 

개인적으로 이 세 가지 칭호중에서 첫번째 방식(시호)는 황제의 대칭으로 그의 일생의 업적을 잘 개괄할 뿐아니라, 듣기에 가장 위무웅장하여, 제왕의 웅풍과 패기를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두번째 방식(묘호)은 별로 듣기 좋지 않다. 하나같이 무슨 조, 무슨 종이다. 마치 조상을 받드는 것같고 기질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세번째 방식(연호)은 양자의 중간쯤이다. 어쨌든 직접 그를 무슨무슨 황제로 칭하는 것이다. 다만 연호는 황제가 즉위하면서 반포한다. 그저 자신이 집권할 때의 일종의 바램을 표시할 뿐이고, 그의 일생의 업적은 개괄할 수 없다. 다만, 원래 모두 시호로 계속 불러왔으면 좋았을텐데, 왜 하필이면 당나라때 바꾸게 되었을까? 이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시호출현의 역사부터 얘기해야 한다.

 

하상(夏商) 시대의 왕은 시호가 없었다. 왕왕 직접 그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들의 칭호는 다수가 간지(干支)에서 취했다. 예를 들어, 태갑(太甲), 공갑(孔甲), 반경(盤庚), 제신(帝辛) 등등. 시호는 주(周)왕조때부터 시작된다. 천자이외에 제후, 대신도 시호를 가진다. 진(秦)나라에 이르러, 진시황은 시호라는 것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부여하고, 신하가 군주에게 부여하는 것이라고 보아, 시호를 없애버린다. 그를 시황제로 하여 그 다음부터는 이세, 삼세로 끝까지 가게 한 것이다. 아쉽게도 진왕조는 이세에서 끝난다. 한나라가 되어 다시 시호를 부활시켜 사용한다. 한나라는 효로 천하를 다스린다고 말하며, 모든 황제의 시호에는 효(孝)자를 붙인다. 예를 들어, 효혜(孝惠), 효문(孝文), 효경(孝景)에서 효헌(孝獻)까지. 한헌제는 그가 죽은 후 조위(曹魏)에서 붙여준 시호이다.

 

주례에 따라, 천자칠묘(天子七廟), 즉 천자는 7대조상까지 모신다. 다만 묘호가 있으면 일대 일대 모두 보존되고, 묘호가 없으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친진의훼(親盡宜毁)"하게 된다. 더 이상 그의 묘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신주는 다른 묘로 옮긴다. 처음에 묘호가 있는 황제는 많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양한(동한,서한)에 유방은 고조, 유수는 세조이다. 다른 사람은 묘호가 없었다. 이 조는 반드시 특수한 공적이 있어야 붙인다. 일반적으로는 모두 개국황제이다. 다만 마구잡이로 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위때, 조조는 태조무황제이다. 조비는 세조문황제이다. 조예가 아직 살아있을 때, 급하게 자칭 열조명황제(烈祖明皇帝)라 한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의 조소를 산다.

 

원래 모든 황제가 묘호를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시호는 모두 있었다. 그리고 한,두글자이다. 그래서 당나라이전의 황제는 대부분 시호로 칭했다. 당나라때부터 누구든지 묘호를 갖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묘호로 칭했다. 당나라초기에, 이연이 개국황제이므로, 묘호를 '고조'라는 두 글자를 택한 것은 관례에 맞는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의 개국황제인 유방도 마찬가지로 '고조'라 칭했기 때문이다. 다만, 제2대황제 이세민은 이전의 방식대로라면 계속하여 시호를 사용해야 했다. 확실히 처음에 이세민의 후계자 이치는 이 문제에 있어서 그다지 격에 벗어나지 않았고, 그에게 '문황제(文皇帝)'라는 시호를 붙인다. 즉, 우리 후세인들은 이세민을 '당문제'라고 칭해야 하는 것이다. 이세민의 재위기간을 살펴보면 그는 힘들게 막 통일한 대당제국을 다스렸고, 수나마랄기의 대란이래 파괴된 경제를 횝고시켰다. 그리하여, '정관지치'라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므로 '문'으로 그를 부르는 것은 대체로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 칭호는 나중에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이세민을 '당태종'이라고 부른다. 무슨 '당문제'라는 황제가 있다고는 알지 못한다. 문제는 당나라대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무측천은 원래 당고종 이치의 황후이다. 이치가 죽은 후 그녀는 조정대권을 장악해서 먼저 몇몇 허수아비를 폐위시키고, 나중에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직접 황제를 칭한다. 다만, 여인의 신분으로 황제에 오르는 것은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다. 전무후무한 사례였다. 봉건사회의 정통관념으로 보자면, 이렇게 하는 것은 대역무도한 일이었다. 자신의 정통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무측천은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의 재위시에 자신에게 시호를 부여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성신황제(聖神皇帝)'라고 한다. 퇴위후 당중종이 바친 존호는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이다. 무측천의 또 다른 폐제(廢除)된 존호에는 "성모신황, 성신황제, 금륜성신황제, 월고금륜성신황제, 자씨월고금륜성신황제, 천책금륜성신황제,측천대성황제'등이 있다. 그 글자수는 이전의 시호가 두 글자를 넘지 않는다는 관례를 완전히 깨트린 것이다. 무측천이 이런 선례를 열자, 당나라이후 황제는 속속 이를 본받았다. 당현종은 즉위후 자신의 전대황제들에게 일률적으로 7글자를 더한다. 이세민의 시호는 '문무대성대광효황제'가 된다. 이 시호에는 '문'도 있고, '무'도 있다. 도대체 어느 것을 가지고 개괄해야한단 말인가? 처리하기가 쉽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편의를 위하여, 사람들은 아예 시호로 부르지 않게 되었다. 직접 묘호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당나라이후, 황제의 시호는 더욱 많아진다. 칭호는 갈수록 번잡하고 길어지게 된다. 당나라황제의 시호는 최대 10글자였다. 송나라황제는 16글자에 이르고, 명나라황제의 시호는 17글자에 이른다. 청나라황제의 시호는 '발전'을 거듭하여 24글자에 이르게 된다. 명태조의 시호는 '흠명계운준덕성공통천대효고황제'이다. 건륭은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부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이다. 서태후는 25글자이다: "효흠자희태후단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배천흥성현황후". 시호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평가를 담던 것에서, 아름다운 문자를 가득 더하는 것으로 변질한다. 현세의 표현이 어떠했든지간에, 문무 인효 성신 예지등의 글자가 전혀 인색함이 없이 쌓여진다. 공덕을 칭송하는 글자란 글자는 모두 동원된다. 그리하여 계속 더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시호는 그저 제사등 특수한 경우에만 읽는 것이 되었다.

 

이와 반대로, 연호로 부르는 것은 반대의 역정을 겪는다. 시호는 간단한 것이 번잡하게 되어서, 사람들이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지만, 연호는 번잡하다가 간편하게 되어서, 사람들이 그것을 더욱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보급하게 된 것이다. 시호와 묘호와 비교하자면, 연호의 출현은 늦은 편이다. 연호는 한나라 중기에 나타난다. 그리고 황제는 일반적으로 연호를 바꾸는 것을 좋아했다. 좋은 일이 있건 나쁜 일이 있건 모두 바꾸었다. 어떤 경우는 몇년만에 한번씩 바꾸고, 심지어 일년내에 몇번씩 바꾸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소박하고 실질적인 황제는 연호를 많이 바꾸지 않았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황제는 연호를 많이 바꾸었다. 예를 들어, 당태종은 '정관'을 계속 사용한다. 당현종도 '개원'과 '천보' 두 연호만을 사용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연호를 바꾸기를 좋아하여, 일반적으로 연호는 2글자인데, 그녀는 4글자가지 썼다. 남량의 양무제 소연도 3글자가 넘는 연호를 사용한 적이 있다.

 

명청양대의 황제는 일반적으로 연호 하나를 평생 썼다(一世一元). 그래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의 연호를 부른다. 여기에서 명영종만이 두 개의 연호를 썼다(正統, 天順). 왜냐하면 그가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혀갔을 대 명대종이 즉위하고, 그가 돌아온 후에 태상황이 되었다가, 명대종의 병이 위중할 때 그가 정변을 일으켜(탈문지변) 다시 황제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개의 연호가 있는 것이다. 청나라때가 되어, 개국의 두 군주 누르하치와 홍타이시(청태종)을 제외하고, 순치제 푸린부터 기본적으로 한 황제는 재위기간동안 1개의 연호를 썼다. 특수한 경우는 동치제이다. 원래의 연호는 기상(琪祥)이었는데, 보정대신 숙순등이 제정한 것이다. 얼마후 서태후가 정변을 일으켜 숙순을 죽이고, 연호를 동치로 바꾼다. 원래의 연호를 부르기도 전에 바뀌었고,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동치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