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장하이(張海): 중국판 프리즌 브레이크

중은우시 2014. 1. 29. 22:44

글: 중국경영망 

 

 

 

장하이, 이 남자는 아마도 조용히 지내지는 못할 운명을 타고 났나보다. 처음에 그는 "신(神)"이었다. 그후에 "활불(活佛)"이 되더니 돌연 변신해서 자본의 큰손이 되었다. 곧이어서 "동방마수(東方魔水, 당시 중국에서 인기있던 음료 '젠리바오(健力寶)'를 가리킴)"를 인수하더니, 결국에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거의 잊어갈만 할 때, "젠리바오의 전 동사장이 거짓으로 공을 세워(立功) 감형받아 출옥한 후 소재불명되어 여러 명이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다시 한번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관건은 이미 2011년 설날 조기석방된 장하이가 이미 해외로 도피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인지는 "모른다". 과연 '밀종대사(密宗大師)' 출신인 장하이는 내무영거무종(來無影去無踪)의 경지에 이르렀나보다. 15년형에서 10년으로 감형받고, 다시 6년으로 감형받더니, 마지막에는 해외로 도피한 것이다. 신기한 장하이는 성공적으로 다른 버전의 '프리즌 브레이크'를 선보였다.

 

CCTV의 보도에 따르면, 광동성 검찰원에서는 젠리바오의 전동사장 장하이가 이미 해외로 도피하였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2007년 2월, 포산(佛山)시중급인민법원은 직무침점죄, 자금유용죄등 2개의 죄명으로, 1심에서 젠리바오의 전 동사장 장하이에게 유기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2008년 9월 27일 광동성고급법원은 2심에서 장하이가 중급검찰원에 다른 사람의 범죄를 고발하여 공을 세운 점(立功)을 인정하여, 원심판결의 15년형을 10년형으로 감형시켜 주었다. 2011년 장하이는 가석방으로 감옥을 나온다.

 

금년 1월 10일, 광동성고급법원은 공식웨이보에 이렇게 통지했다: 장하이가 공을 세웠다는 것(立功)은 거짓임이 밝혀져서 이미 입건하여 조사중이다.

 

보도에 따르면, 장하이의 감형에는 공안, 법원계통의 40여명이 관련되었다고 한다. 교도소, 공안, 법원이 서로 협력해야만 거짓으로 입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패의 사슬은 놀라움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유사한 거짓으로 입공하는 일은 이번 경우의 일만은 아니다. 특히 경제범죄, 직무범죄에서 많이 차지하고 있다.

 

장하이 감형의 시말

 

2007년 2월, 포산시중급법원은 젠리바오집단의 전총재 장하이에게 직무침점죄와 자금유용죄에 대하여 선고공판을 진행해서, 장하이에게 죄명이 성립된다고 판결하며 유기징역 15년형을 선고한다. 장하이는 이에 불복하여, 광동성고급인민법원에 상소한다.

 

2008년 9월, "장하이사건"은 불산시중급법원 제4재판정에서 거행되었다. 최종판결에서, 원심이 직무침점죄와 자금유용죄를 인정한 것은 유지하고, 다만 장하이가 2007년 2월 7일, 범죄혐의자 장모가 다른 사람과 공모하여 포산시 선성구의 주거침입 강도살인사건을 저지른 사실을 고발하여, 포산시 공안기관이 이 단서에 기해 사건을 해결해서 입공했다고 인정하고, 이로 인하여 원심판결의 15년형은 유기징역 10년형으로 감형된다.

 

이렇게 보면, 장하이는 원래 2015년에야 출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내에서도 '입공'한다. 그래서 1년만에 2번이나 감형기회를 얻는다. 제1차는 10년에서 8년으로 감형되고, 제2차는 다시 6년으로 감형된 것이다. 최종적으로 2011년 정월 초사흘, 샤오관 우장감옥에서 형기만료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서 설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광동성고급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처음에 장하이는 포산감옥으로 압송되어 형기를 살았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장하이는 포산감옥에서 1개월간 형을 산 후, 광저우 판위 다스에 있는 판위감옥으로 이송된다. 판위감옥에서 몇달간 형을 산 후 다시 무슨 이유에서인지 관련부문에서는 다시 장하이의 복형장소를 바꾸어,샤오관의 우장감옥으로 보낸다.

 

샤오관에서 형을 사는 동안, 중대입공으로 인하여 5년의 형기를 감형받은 바 있는 장하이는, 신기하게도 1년안에 2번이나 감형기회를 받고, 매번 2년씩 감형받았다. 이 두번의 감형이유는 모두 중대입공을 세우고, 수형태도가 좋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15년에서 10년, 다시 6년으로 내려가면서 장하이가 1번의 개판, 2번의 감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중대입공'때문이다. 제1차때 무슨 공을 세웠는지는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강도살인을 검거하도록 도운 것이다. 그후의 2번 감형에서 무슨 공을 세웠는지는 정보가 공개되어 있지 않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의문을 나타냈다. 장하이의 감형은 '뒷거래'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뒷거래를 했는지에 대하여는 말들이 많았다. 실제로 촛점은 여기에만 맞추어지지 않았다. 1심판결의 15년형이 2심에서 10년으로 개판된 것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2014년 1월 9일이 되어서 광동성검찰원은 성12기인대상위회 제5차회의에 제출한 <상황보고>에서 정식으로 이 상황을 언급했다.

 

광동성고급인민법원은 대외에 통보하기를, 광동 젠리바오집단의 전동사장 장하이가 감옥에서 형을 받는 기간동안의 입공, 중대입공은 모두 거짓이며, 이를 근거로 감형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샤오관시 중급인민법원은 재심을 통해 2013년 10월 31일자로 장하이에 대하여 2번에 걸쳐 감형한 것을 취소한다. 광동성고급법원은 동시에 원판결에서 장하이가 입공했다고 인정한 것은 잘못된 것일 수 있어서 현재 입건하여 조사중이라고 밝힌다.

 

이어서 금년 광동의 "양회(인대,정협)"에서 장하이사건은 촛점중 하나가 된다. 1월 17일, 광동성정협제11기제2차회의에서 조별토론때, 어떤 위원이 장하이사건을 언급한다. 그리고 장하이의 감형에는 공안, 법원계통의 40여명이 관련되었다고 밝힌다.

 

그 자리에 출석해있던, 광동성정협위원, 광동성검찰원 부검찰장인 황우(黃武)는 '장하이가 이미 실종상태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광동성고급법원이 이미 입건하여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장하이가 교도소에서부터 허위조작을 시작하여 감옥에서의 수형기간동안 입공, 중대입공을 세운 사실을 모조리 허위조작했다고 밝혔다. 현재 다시 조사하고 있으며, 1심에서 그에게 15년형을 내러기 전부터 이미 문제가 있었으며, 장하이는 그때부터 허위조작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만일 허위조작을 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내리는 형이 15년형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일이 정식으로 발각된 것은 2013년 11월 4일이다. 샤오관 러창시인민법원은 매체에 통보하기를 포산시간수소의 전부소장 뤄모는 수감인원들에게 검거에 공을 세우는 단서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통하여 비교적 경미한 처벌을 받게 해주며, 수감인원에게 18만위안의 뇌물을 받았고, 당해 법원에서 뇌물죄로 유기징역5년형을 내렸으며 재산2만위안을 몰수했다고 밝혔다.

 

장하이는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 통보에 따르면, 2006년 하반기, 전 광동 모변호사사무소의 쉬모 변호사(별건으로 처벌함)는 당시 포산시간수소에서 추가범죄사건조사를 책임지던 뤄모를 찾아가서 그에게 당사자 장바오(가명, 1심에서 유기징역 15년형을 받음)를 위하여 검거에 공을 세울 수 있는 단서자료를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뤄모에게 3만위안의 수고비를 준다. 뤄모는 직무상의 편의를 이용하여, 한 강도살인사건의 단서를 장바오에게 제공하고, 강도사건의 혐의자 장레이(가명)를 장바오와 같은 감옥방에 넣어준다. 그리고 장바오가 장레이를 고발한다. 포산시간수소는 광동성고급법원에 장바오가 수감기간중 공을 세웠다는 서면의견을 제출하고, 성고급법원은 2심에서 이에 근거하여 장바오에게 공을 세운 정상이 있다고 보아, 장바오를 유기징역 10년으로 감형해주었다.

 

조기출소에 대하여 발생할지도 모를 풍파에 대하여 장하이의 주변인사들은 일찌감치 눈치를 채고 있었던 것같다. 그리하여 모두 매체에서 이 일을 보도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다. 장하이의 여자친구인 황후저우(黃鷺就)는 "어쨌든 그는 이 일로 6년의 댓가를 치르지 않았는가! 보도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주 조용히 살고 싶기 때문이다. 가장 좋기는 사람들이 이 사람을 잊어주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이해해달라. 다만 조기출소는 모두 합법적이고 합리적이다. 보도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이 있어서가 아니다. 어쨌든 10년형기에 6년간 감옥에 있지 않았느냐. 일반적으로 절반만 복역하면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아주 조용히 살고 싶다. 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해서 그가 다음에 어떻게 하는지를 봐달라."

 

의문의 목소리: 일찌감치 발각되었는데, 왜 쉬쉬했는가?

 

현재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장하이의 소위 첫번째 중대입공(重大立功)은 간수소 내부에서 장악한 단서를 그에게 전달한 것이고 일부러 강도살인범과 같은 감방에 넣어주었다(부지불식간에 범죄사실을 누설했다는 상황을 만들기 위함임). 그리고 장하이의 입을 통해서 말하게 하였다. 그것이 입공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 1년만에 2번이나 감형받은 것은(매번 2년씩) 어떻게 된 일인가? 현재 아무런 정보도 제공되어 있지 않다 다만 거기에도 수수께끼는 존재한다.

 

2005년 3월 구속된 후 형기만료로 석방될 때까지 장하이가 형을 산 기간은 6년이다. 관련규정에 따르면, "만일 일반적인 입공이라면 장하이가 1년내에 2번이나 감형받을 수 없다. 그래서, 장하이가 2번 감형받은 것은 모두 '중대입공'이라고 볼 수 있다." 규정에 따르면, 중대입공이 있으면 언제든지 감형자료를 보고할 수 있다. 형기와 간격을 제한을 받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 반드시 지적해야할 일은, 범인이 일반적으로 중대입공이라고 인정될 때 감형되는 형기는 일반적으로 3년 내지 5년이라는 것이다. 즉, 장하이가 진정 1년에 연속 2번 중대입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매번 감형받는 형기는 최소한 3년이 되어야 하고, 2년이어서는 안된다. 형기의 감면으로 보면, 장하이의 감형은 의혹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외에 일찌감치 2012년 뤄모가 뇌물수수죄로 장하이가 거짓으로 입공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그렇다면 광동성고급법원이 2심에서 장하이를 가법게 처벌한 것이 설명이 된다. 이것은 위법한 거짓입공증거에 따라서 이루어진 잘못된 판결인 것이다.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따르면, 법원은 원판결이 인정한 사실에 잘못이 있음을 발견하면, 반드시 재판감독절차를 진행하여야 한다. 다만 왜 사건이 발각된지 2년동안 광동고급법원은 장하이사건을 재심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잘못된 판결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합법적'이도록 놔두었는가, 그리고 경찰측이 장하이를 지명수배할 수 없도록 하였는가?

 

다음으로, 2013년 11월 광동사법부서는 뤄모의 뇌물수수사건에 대한 통보에서, 장하이의 진실한 이름을 감추어 주었고, 가명인 '장바오'를 사용했다. 다만 장하이는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하는 미성년자도 아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뇌물제공자이다. 왜 법원은 감추어 주었을까?

 

통보에서는 또한, '가짜입공'을 주도한 것은 바로 장하이의 변호사인 쉬모라고 하였고, 이미 별도건으로 처리중이라고 하였다. 다만 뉴스를 검색해보면, 장하이의 변호사중 한 명에 쉬위파(徐玉發)이 있다. 그렇다면, '쉬모'는 바로 쉬위파이다. 그의 행위는 이미 '변호사위증죄'에 해당하고,형사책임을 추궁받아야 한다. 그러나 뉴스자료에 따르면, 쉬위파는 포산에서 여전히 정협위원으로 있다. 이것은 광동고급법원이 밝혀주어야할 문제이다. 당시의 뇌물제공자가 쉬위파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는 별건으로 처벌을 받았는지 아닌지?

 

가찌입공문제

 

감형, 가석방사건은 비공개심리가 많다.

 

국내에는 아직 실무상 처리할 수 있는 법률조문이나 사법해석이 없고, 형벌집행기관과 법원, 검찰원간에 협조매커니즘이 완비되어 있지 않은 등의 객관적인 원인으로, 감형, 가석방업무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심지어 감형,가석방을 거래하는 부패사건이 나타나기도 한다. 감형,가석방사건이 사법부패를 낳을 수 있는 여러 측면의 원인이 있다.

 

첫째, 대다수 감형,가석방사건은 비공개심리를 통하여, 밀실에서 조작하기가 쉽다. 감형,가석방에서 일부 부패사건은 왕왕 밀실조작으로 발행했다. 최근 들어 사법부패가 발생하는 주요원인이 된다.

 

둘째, 현재 형벌집행기관(감옥,간수소)는 감형,가석방의 제청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감형받고 가석당될지, 어떤 상황하에서 감형하고 가석방할지, 모조리 형별집행기관이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제출한다. 형벌집행기관이 '밥을 해놓으면', 법원은 그저 '밥을 먹을' 수밖에 없다. 비록 법원이 조사확인할 수는 있지만, 실무상 처리할 수 있는 법률조문과 사법해석이 없고, 법원의 인력부족등의 원인으로, 조사확인은 형식에 그치게 된다.

 

셋째, 감헝,가석방사건은 수량이 많고, 재판인원은 심각하게 부족하다. 사건은 많고 사람은 적으므로 재판단계에서의 감독이 결핍되는 문제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모 중급법원의 심판정 부정장인 딩페이슝(丁飛雄)은 가석방을 담당하는 부정장이다. 그는 또한 사건의 재판장과 주심법관이기도 하다. 사건수가 많다는 핑계로, 기본적으로 혼자서 감성,가석방사건의 재판과 결정을 담당하고, 그 기회에 뇌물을 수수하고 비리를 저지른다.

 

감옥, 공안, 법원이 상호협조하여야 비로소 가짜입공이 성립된다. 그 부패사슬은 깜짝 놀랄 정도이다.

 

중국 <형법> 제68조에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범죄분자가 다른 사람의 범죄행위를 고발하여, 조사후 사실로 확인되거나, 혹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여, 이로 인하여 다른 사건을 해결하는데 공을 세운 경우, 가볍게 처벌하거나 감경처벌할 수 있다. 중대한 공을 세운 경우에는 처벌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다. 범죄후 자수하고 중대입공을 한 경우에는 처벌을 감경하거나 면제하여야 한다."

 

수감인원이 간수소에서 중대한 범죄의 단서를 제공하기는 아주 어렵다. 본인이 공동으로 저지른 범죄중 아직 발각되지 않은 미제사건이거나, 혹은 '같은 업종'의 일부 비밀을 제외하고는. 다만 비교적 이상한 점이라면 일부 수감된 범죄혐의자가 사법기관에 제공하는 중대단서는 모두 형사범죄의 도피범의 확실한 정보이다. 그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고 어떤 경우는 다른 분야의 범죄이다(예를 들어 부정부패사범이 강도나 절도사건을 고발한다든지). 그리고 정보는 아주 정확하다. 공안기관은 왕왕 그 정보만으로 바로 범죄혐의자를 붙잡을 수 있다.

 

범죄혐의자가 어떻게 간수소내에서 "천리안'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절대로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밀접하게 협력해야만 한다. 일반적응로 말해서, 가짜입공은 세 단계를 거친다: 일단계는 관계를 통하여 혹은 다른 사람의 범죄사실을 획득하거나 매수한다(일반적으로 경찰이나 감옥), 둘째는 그 가족, 변호사가 관계를 통하여 정보를 수감된 범죄혐의자에게 제공한다(감옥과 내통이 필요함), 그리고 그에게 고발하게 한다. 셋째, 현지중급인민법원의 인정을 받는다(이것은 모른척 눈감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정법대학 형사소송법교수인 홍다도더(洪道德)은 입공제도를 둔 원래 뜻은 사법비용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다만 중국의 사법환경하에서, 가짜입공은 상당히 은밀한 지하시장을 형성했고, 부패의 사슬은 상당히 길다.

 

가짜입공사건은 특히 경제범죄, 직무범죄자가 많다.

 

무엇으로 감옥, 공안, 법원의 관계를 뚫을 수 있을까? 확실히 그것은 인맥과 재력이다. 전체 범죄자집단을 보면 이 두가지 조건을 갖춘 것은 살인범, 강간범, 강도범은 아니다. 경제범죄, 직무범죄에 관련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반적으로 관리나 상인이기 때문이다. 인맥과 재력을 갖추고 있다. 최고검찰원의 통계수치에 따르면, 2005년에서 2009년까지, 전국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직무범죄피고인중 형면제, 집행유예를 받은 경우가 69.7%이다. 이것은 근 70%의 직무범죄자는 감옥에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중 부정부패뇌물류의 다수가 "입공, 장물반환, 양호한 태도"로 이런 결과를 얻어낸다.

 

감옥에 적게 있고자 하는 것은 모든 범죄자의 꿈이다. 다만 현실을 잔혹하다. 모든 사람이 이런 능력을 갖춘 것은 아니다. 능력이 있어도 감형조건이 되지 않으면 조건을 만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가짜입공이 자생할 수있는 토양이다. 탐관을 예로 들면, 항저우시 전부시장 쉬마이용이 사형판결을 받기 전에, 2009년이래 낙마한 18명의 차관급이상 공무원중 한 명도 사형을 받은 바 없다. 뇌물수수금액이 적지 않은 탐관의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고발하여 검거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등 입공으로 가볍게 처벌받은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입공내용이 대외에 알려진 경우는 드물다.

 

공개된 정황을 보면, "입공"이나 "중대입공"으로 감형처벌을 받은 고위탐관은 수두룩하다. 예를 들어, 북경시 전부시장 류즈화(劉志華), 광동성정협전주석 천샤오지(陳紹基), 저장성 전상위 겸 기위서기 왕화위안(王華元)은 모두 유사한 정상으로 사형집행유예를 받는다.

 

중국정법대학 형사소송법교수 홍다오더는 이렇게 말한다: "탐관이 제공하는 입공의 단서는 자신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대부분은 친척, 친구들이 알아보거나 다른 사건관련없는 인원이 바깥에서 활동하여 얻어낸 것이다." 홍다오더는 말한다. 일부 지방공안기관은 적극적으로 장악한 범죄사실 혹은 범죄단서를 탐관에게 팔고 있다고 한다. 사건담당인원은 심지어 이미 도주중인 범인을 붙잡은 공로를 직무범죄피고인의 공으로 만들어 가짜입공으로 판결을 가볍게 받게 해주고 있기도 하다.

 

이전에 감형, 가석방사건은 일반적으로 모두 서면심리하였다. 즉, 인민법원은 감옥등 형벌집행기관에 지공안 관련자료를 서면심사하고, 직접 개정하여 심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서면으로 증명하는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사법실무상 일반적으로 "범죄혐의자 혹은 피고인이 제공한 단서에 의하여 도주범을 체포하는데 공을 세운 정황이 있다"는 것을 입공의 증거로 삼는다. 혐의자가 제공한 단서의 원천과 채널을 묻지 않는다.

 

이것은 확실히 중대한 결함이 있다. 가짜입공을 판단하는 핵심적인 증거는 바로 입공정보가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법정에서 물어야 한다. 최고법원의 사법개혁요구에 따라, 광주중급법원은 금년 1월 8일, 이후 감형, 가석방사건은 서면심리를 위주로 하고, 개정심리를 보조로 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겠으며, 개정율을 20%에 이르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확실히 부족하다. 만일 가짜입공을 단속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사법이 더욱 투명하고 공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하이의 "전설"

 

기공대사(氣功大師)로 성공하다.

 

허난성의 9000여만인구중에서 만일 동시에 특이공능자이면서 장밀대사(藏密大師), 억만장자, 자본큰손의 신분을 겸비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 사람은 바로 젠리바오의 전동사장 장하이일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장하이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젠리바오를 인수한 다음부터이다. 실제로, 장하이는 일찌감치 14살때,이미 자신의 '특이공능'으로 허난에서 모두가 아는 '기공대사'가 되었다.

 

장하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자신이 기공을 발하는 동영상을 보고 그가 보낸 신비한 정보를 받은 사람은 병이 있으면 병이 나을 것이고, 병이 없으면 장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장하이의 나이 겨우 18살이었다.

 

장하이는 허난 카이펑에서 태어났고, 14,5살때 이미 항간에 이름을 날린다. 한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장하이가 특이공능을 시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한 이웃은 이렇게 말한다. 장하이는 나뭇잎을 입안에 넣었는데, 꺼내자 나뭇잎이 커져 있었다. 혹은 큰 나무잎이 작게 변해 있었다.

 

또 다른 신비한 점은 장하이는 자신의 의지력으로 시계를 조절했다는 것이다. 벽시계나 손목시계의 침을 거꾸로 가게 할 수 있었다. 이런 신기한 공능에 이웃들은 그를 숭배했고, 일부 학자들은 도저히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배후의 비밀을 풀었고, 기실 그것은 특이공능이 아니라 마술이라고 말하였다. 사전에 입안에 나뭇잎을 물고,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은 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시계의 침을 거꾸로 가게 하는 것은 더욱 쉽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신경쓰지 않을 때 침을 건드리면 된다는 것이다.

 

이 '신동'은 단지 '특이공능'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무술반에 있는 동안, 장하이는 장밀기공(티벳밀교)의 신도인 왕쯔성(王紫升)을 알게 된다. 그의 추천으로, 티벳불교대사인 하일동(夏日東)활불과 교류를 하게 된다. 1992년 장하이는 하일동활불의 제자신분으로 각지에 티벳밀교건강센터를 만들어, '밀법(密法)'을 전수하며 널리 제자를 모집한다. 이렇게 하여 많은 수입을 올린다.

 

만일 한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장하이는 기껏해야 허난 카이펑의 한 '활불제자'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출현은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 그는 바로 티벳밀교의 신도이며 허난성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판공실주임 쑨링(孫嶺)이다. 쑨링의 도움으로, 장하이는 사회과학원에 티벳밀교요가문화연구소를 만들어 소장에 오른다. 이로써 '정부기관신분'을 갖게 되고 명성이 더욱 올라간다.

 

1992년 5월, 장하이는 기공시범 동영상을 만든다. 18살의 장하이는 이렇게 말한다; "마약중독이 있는 사람이 티벳밀교요가의 기공을 발한 물을 마신 후, 마약을 끊을 때의 부작용을 감경시킬 수 있고, 티벳밀교요가는 에이즈의 일부과학연구프로젝트에 일정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자들은 당시에 수도없이 많았다. '특이공능'은 대과학자인 첸쉐썬(錢學森)이 "인체특이공능은 진짜라고 보증한다"고 말하였고, 더더구나, 허난성 사회과학원 티벳밀교요가연구소 소장이라는 '공식'신분이 있었기 때문에, 장하이는 신속하게 성공을 거둔다.

 

알려진 바로는, 그의 첫번째 몫돈은 바로 이 기공대사의 기치를 내걸고 끌어모은 돈이다. 조사와 장하이 자신의 녹음에서 털어놓은 일부 정보에 따르면, 그는 30만신도에게서 최소한 비용 천만위안이상을 뜯어냈다.

 

활불에서 '자본가'로

 

1995년, 신도들로부터 긁어모은 돈으로 장하이는 광저우로 이사간다. 거기서 호화주택과 고급승용차를 사고 현지의 부호고관들과 교분을 쌓는다. 그는 신속히 '장밀대사'에서 '자본가'로 변신한다. 그 시대는 '청화대학, 북경대학도 간큰 놈에게는 못당한다'는 시절이다. 장하이는 수천의 신도를 속이면서 당시 자본시장에서 물만난 고기처럼 활약했다.

 

2000년 4월, 장하이의 카이디(凱地)회사는 선전동팡스다이투자유한공사를 인수하면서, 국내36개유명학교가 발기인이 되어 설립한 상장회사 중국고과(中國高科)를 장악한다. 다음 달에 중국고과의 동사장이 되어, '중국에서 가장 젊은 상장회사 동사장'이 된다. 중국고과는 많은 주식투자자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장하이가 자본시장에서 잘 나가고 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6살이었다.

 

젠리바오를 인수하다.

 

만일 장하이가 계속하여 자본권내에서 놀았다면, 그는 아마도 그저 자본의 전설로 끝났을지 모른다. 2002년 그는 다시 한번 나타나서 폭발적인 뉴스를 내보낸다; 젠리바오를 인수하여 주인이 되었다.

 

"젠리바오의 아버지"인 리징웨이(李經緯)는 당시 산쉐이시정부와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 장하이가 그 틈을 노릴 수 있었다. 리징웨이는 비록 젠리바오의 제일공신이지만, 젠리바오는 당시에 정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정부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었다. 기실 장하이가 젠리바오에 들어간 것은 미리 계획을 잘 짠 사건이 아니었다. 2001년 12월하순, 그는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일을 처리하러 간다. 비행기에서 무료하게 신문을 뒤적이다가 돌연 젠리바오의 지분이 곧 양도된다는 뉴스를 접한다. 비행기가 상하이에 내리자마자, 그는 즉시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사서, 급히 산쉐이시로 향한다.

 

장하이의 출현은 내심 리징웨이를 좋아하지 않던 산쉐이시정부에게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비록 모든 사람들은 그가 너무 젊어서 믿기 어려웠지만, 그가 대표로 있는 "카이디계"와 중국고과는 명성을 일찌감치 듣고 있었다. 그가 내놓은 명함에는 화려한 직함이 쓰여 있었다: 동팡스다이투자회사 동사장, 중국고과 동사장, 팡정과기 동사, 홍콩캉다홀딩 동사장, 홍콩후이더기금 동사국 주석, 선전이중허투자회사 법인대표....순후하고 마음이 급했던 산쉐이시정부의 관리들은 이 젊은 신비인물의 말중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배경과 내놓은 조건은 그들이 만족할만한 것이었다. 장하이는 리징웨이가 내놓은 가격으로 인수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앞에 나선 회사는 저장국제신탁투자공사인데, 순수한 국유기업이었다. 그래서 협상은 모든 것이 '겉으로 보기에 아주 아름다운' 분위기하에서 진행되고, 놀라운 속도로 추진된다.

 

2002년 1월 14일, 산쉐이시정부는 '1주일내에 돈을 모이면 경영진에게 매각하겠다"는 약속을 한 엿재째 되는 날, 사방에서 자금을 모으던 리징웨이는 돌연 시정부로 급히 불려간다. 그가 의자에 미처 앉기도 전에, 시장 리이웨이(李貽緯)는 그에게 말한다: "이 일은 이미 결정되었다. 우리는 현재 젠리바오를 저장국투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젠리바오, 장하이, 리징웨이의 운명은 이렇게 바뀐다.

 

그렇다면, 장하이가 젠리바오를 인수한 거액자금은 어디서 왔는가? 장하이는 매체에 이렇게 말했다. 한 홍콩상인이 500만위안어치 주식을 보내주었고, 그는 이 돈으로 굴려서 억만장자가 되었다. 다만 당시 업계에 널리 알려진 소문은 이렇다. 장하이의 소위 자본운영은 기실 빈손으로 노는 것이었다. 그가 젠리바오를 인수한 3.38억위안의 자금도 건곤대나이로 조달한 것이다. 실제 돈을 낸 것은 위흥과기의 오너인 주웨이샤(祝維沙)였다. 돈이 어떻게 마련되었건 장하이는 젠리바오를 차지한다.

 

젠리바오를 장하이에게 매각한 후 2002년, 63세의 리징웨이는 국유자산유출혐의로 '탐오범죄'자로 구속된다.

 

리징웨이가 구속되고, 장하이는 젠리바오를 넘겨받는다. 그는 사업에서 무슨 실적을 낸 바 없지만, 자본시장에서는 풍성한 이익을 거두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안목이 좋은 투자자라는 것이다. 핑안보험, 흥업은행에 투자한 것은 모두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다만 젠리바오능 어쨌든 실업을 영위하는 기업이다. 장하이는 좋은 기업가가 아니다. 그는 짧은 기간내에 전혀 봐주는 것없이 거의 모든 판매직원을 잘라버린다. 인재, 브랜드, 네트워크를 잃는다. 브랜드와 제품을 대거 교체한다.

 

산쉐이시정부도 금방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입맛은 쓰지만 그냥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젠리바오는 장하이의 영도하에, 시장점유율이 계속 떨어진다. 일찌기 중국음료업계의 맏형이었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게 된다. 2003년, 젠리바오집단의 판매수익은 겨우 28억위안에 그친다. 미지급금과 30억위안의 채무를 빼면, 젠리바오집단은 이미 부도상태였다. 2004년에 들어선 후에도 상황은 계속 악화된다. 장기간 공급상의 대금을 지급하지 않아서 공급상들은 공급을 끊어버린다. 그리하여 생산활동과 판매활동이 급격히 위축된다. 젠리바오는 급여도 지급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곤경에 처하자, 장하이는 더 이상 남아있고 싶어하지 않았고, 급히 주식을 팔아버린다. 그냥 도망칠 생각을 한 것이다. 사방으로 찾다가 그는 후이중텐헝회사의 리즈다(李志達)와 거래를 하여 주식을 양도한다. 당시 젠리바오집단의 8.9%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산쉐이시정부도 장하이가 도망치고, 리즈다가 들어오려는 것을 보고, 산쉐이시정부도 필리핀의 성리(生力)맥주를 찾아서 리즈다를 대체하고자 시도한다.

 

그리하여, 산쉐이시정부가 다시 나선다. 보도에 따르면, 리즈다가 순조롭게 젠리바오의 주요주주와 계약을 체결한 후 거액을 투입하기 시작했을 때, 2004년 11월, 산쉐이구정부(2002년 12월 8일, 산쉐이시를 편제에서 없애고, 포산시 산쉐이구가 된다)는 돌연 "젠리바오생산재개협조공작영도소조"를 만들어, 젠리바오가 법인인감과 재무인감을 공작소조에 넘겨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포산시 산쉐이젠리바오무역유한회사를 설립하여 전면적으로 젠리바오를 '인계'받는다. 내부소식을 아는 사람에 따르면, 젠리바오를 전면적으로 인수인계받기 전에, 산쉐이구정부의 관련부서는 이미 3번이나 관련회의를 소집했다. 당시에 결정한 기조는 젠리바오를 장하이가 진입하기 전으로 되돌린다는 것이었다.

 

2004년 12월 7일, 산쉐이구정부가 나서서 젠리바오는 생산을 재개한다. 리징웨이는 '쌍규(雙規)"로 범죄혐의를 받는 신분으로,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서 전체직원대회를 여는 젠리바오집단강당에 나타났다. 그러나 젠리바오의 운명은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

 

운명의 배후

 

장하이를 기다리는 것은 리징웨이와 같은 운명이었다. 2005년 3월  장하이는 "허위장부, 허위투자, 젠리바오지금횡령"등의 혐의로 포산 경찰에 구속된다. 22개월에 걸친 구금과정과 2개월여의 재판을 거쳐 2007년 2월 포산시중급인민법원은 장하이를 직무침점죄 및 자금유용죄로 15년형에 처한다.

 

다만 장하이는 그래도 장하이였다. 각종 수단을 써서 빠져나온다. 2011년 정월 초사흘, 장하이는 6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조용히 출옥한다. 장하이는 나왔지만, 리징웨이는 여전히 감옥에 있었다.

 

4년후인 2011년 11월 2일, 포산중급법원은 리징웨이에게 법에 따라 유기징역 15년형을 내리고 개인재산 인민폐 15만위안의 몰수형에 처한다.

 

당시 산쉐이시시장을 맡고 있던 리이웨이는 2003년 8월 포산시 난하이구 구장으로 가고, 2007년 포산시위 상위가 된다. 2010년 7월에는 포산시위 부서기가 되고 2011년 11월에는 포산시위 서기가 된다.

 

2013년 4월 22일, 리징웨이는 고향 포산시 산쉐이구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4세였다.

 

"장하이계"의 축구조작

 

선전은 일찌감이 1994년에 자신의 프로축구클럽을 가지고 있었다. 짧은 3년동안 선전축구는 롤러코스트와 같은 기복을 겪는다. 갑B 1년만에 갑A가 되었고, 갑A에서 겨우 1년있다가 다시 갑B로 내려갔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였고, 오래 지속하질 못했다. 1997년, 중국핑안이 선전축구클럽을 인수한다. 그러나 5년후 <보험법>으로 핑안의 축구꿈은 좌절된다. 이 법률은 국유독점기업과 상장기업이 다른 투자분야에 들어갈 수 없도록 규정했다. 핑안은 퇴출을 선언한다.

 

핑안의 퇴출은 장하이에게 기회를 주었다. 2012년 12월, 장하이와 중국핑안은 클럽전체양도계약을 체결하고 6000만위안을 지급한 후, 축구팀은 선전젠리바오축구클럽으로 개명한다. 다만 당시 젠리바오의 발전은 이미 예전만 못했고, 거액을 들여서 프로축구에 뛰어드는 것은 확실히 일종의 모험행위였다.

 

오만한 장하이는 이런 건의는 모조리 무시한다. 발표회에서 그는 자신만만하게 호언한다: "전세계에 선전팀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겠다."

 

선전축구를 인수한 후, 자신의 호언장담을 실현하기 위하여, 장하이는 일련의 당시로서는 중국축구계를 놀라게할 외국인선수영입계획을 내놓는다. 진용이 호화스럽기로는 지금의 중초(中超)에서 삼연속우승에 아시안컵우승에 빛나는 헝다(恒大)에 못지 않았다. 축구팀의 감독은 국가대표감독을 역임한 주광후이고, 장하이는 영국프리미어리그에서 리웨이펑을 데려온다. 당시로서는 독일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잘나가던 중국의 전방공격후 양천까지 데려온다.

 

중국국가대표급만 해도 수두룩했다. 전방공격수로는 리이(국가대표), 양천이 있고; 미드필더로는 정즈, 루보페이(장쑤의 핵심), 정빈(이전에 우한의 핵심), 왕신신(텐진의 핵심)의 4명의 초대형선수가 있었다; 후방수비수로는 리웨이펑(타이다의 수비핵심), 신펑(산시의 수비핵심), 위안린(선전의 수비핵심), 리밍(전 궈안, 상하이국제의 핵심), 천용창(국가대표), 저우팅(궈안 수비주력), 장신신(궈한 수비주력), 리젠화(헝다의 주요후보선수), 장용하이가 있었다. 주목할만한 점은 2013년 아시아축구선생, 국가대표축구의 핵심인 정즈는 선전에서 자신의 휘황한 프로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젠리바오회사는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클럽은 선수들의 급여를 제때 지급하지 못하게 된다. 장하이는 2004년 8개월이나 급여지급을 못하기도 했다. 가장 많았을 때 장하이는 선수들의 급여미지급금이 3000만위안에 달했다. 이런 행위는 중국축구협회로부터 강등경고를 받기에 이른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선전팀에 몰려있던 대형선수들은 장하이가 구두로 약속하자 다시 기운을 내서 중초원년의 우승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축구선수들이 집단으로 경기를 조작하다.

 

한때 8개월이나 급여를 지급하지 못했지만, 선전축구는 여전히 중초 원년의 우승을 차지한다. 이것은 업계에 음미할만한 점을 남겼다: 당시 선전팀이 우승을 차지한 것은 장하이가 막후에서 조작을 하였기 때문이고, 특히 '장하이계"를 이용하여 경기를 통제한 것이 가장 컸다. 이것은 선전과 랴오닝등 많은 경기에서 두드러졌다.

 

당시 쉬밍의 '스더계"에 대항하기 위하여, 장하이는 우회적으로 랴오닝축구와 상하이국제를 인수한다. 그리하여 실력이 더욱 강한 '장하이계'를 만든다. 여러 클럽을 장하이가 완전히 통제하자, 그는 동시에 3개 4개의 축구팀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들 팀은 죽어러 또 다른 1팀을 공격하여 그중 1팀이 우승을 차지할 수 있게 도왔다.

 

2004년 6월 연맹경기 홈경기에서 충칭리판을 만난다. 선전젠리바오는 전경기장의  축구팬들이 "경기조작"이라고 소리치는 난감한 광경을 맞이한다. 왜나하면, 전반전과 후반전에 선전축구가 보인 모습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2004년 어웨이경기에서 랴오닝과 경기할 때, 랴오닝의 외국인선수가 '잘 모르고' 한 골을 집어넣는 사태가 발생한다. 만일 1-0으로 경기가 끝난다면, 축구도박시장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손실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그후 경기장에서는 희극적인 일막이 벌어진다. 랴오닝축구팀의 선수들이 '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1골을 넣어주고, 랴오닝축구팀의 주장인 자오쥔저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경기장을 나갔다.

 

시즌3는 어떻게 진행될까?

 

탐관 부호가 감옥에 들어가면 수형생활이 어떠할까? 이것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밀실조작', '돈으로 감형을 산다', '관료와 일반백성은 감옥에서도 차별대우한다'는 등의 관념이 사회에 널리 퍼져있다. 이는 사법이미지와 공신력을 크게 해치는 일이다.

 

최고법원의 사법개혁요구에 따라, 광저우중급법원은 금년부터 관할구역내에서 4개의 감옥 15개의 간수소 수형인원에 대한 약 6000건의 감형,가석방사건을 전부 심리전에 인터넷에 공시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최소한 20%의 감형,가석방사건은 공개심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사회의 전면적인 감독을 받겠다는 것이다.

 

광저우중급법원 심판감독정 정장인 천동메이에 따르면, 과거의 감형, 가석방사건은 대부분 서면심리에 그쳤다. 다만 이런 형식은 소송절차의 공정과 공평에 불리했다. 2011년 최고법원이 내놓은 <형사정책에 엄벌과 관용을 겸용하는 것을 관철하는데 관한 약간의 의견>에서 직무범죄사건에 대하여 특히 현장,처장급이상의 고위간부였던 수감인원의 감형,가석방사건은 일률적으로 공개심리하도록 요구했다.

 

"직무범죄를 저지른 관리의 감형, 가석방사건은 심리에서 엄하게 처리해야 한다. 청장급이상 혹은 사회의 관심이 높은 사건은 성급법원에 보고하여 비안해야 하고, 직접 선고해서는 안된다." 광저우중급법원 직심위원회 위원인 류웨쥔이 한 말이다.

 

광동성인대12기2차회의의 조별토론에서 양원(법원,검찰원)공작보고때, 장하이사건의 최근 진전을 질문받았는데, 성고급인민법원의 주요책임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금, 장하이가 어디에 있는지, 감형부정사건의 배후에 어떤 공무원들이 연결되어 있는지, 법원은 언제 장하이사건을 재심할 것인지, 일련의 의문점만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