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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소일부(邵逸夫)와 2명의 부인

by 중은우시 2014. 1. 15.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소일부(Sir Run Run Shaw)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중국 최초의 유성영화를 찍었고, 중국영화의 무성부터 유성까지, 흑백부터 칼라까지 모든 역사를 겪었다. 동시에 그는 개인재산으로 "소씨기금(邵氏基金)"을 성립하여, 대륙의 교육사업에 25억홍콩달러를 출연했다. 여기에 영국, 미국, 싱가포르 및 홍콩등지에서도 거액의 재산을 기부하여 교육사업에 기부한 사람중에는 고금제일인이라고 불러도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이다.더욱 대단한 것은 소일부는 인생이 전설일 뿐아니라, 그의 사랑이야기도 그의 회사가 찍은 영화처럼 낭만적인 전설적인 색채가 가득하다.

 

소일부의 조적(祖籍)은 영파(寧波)이며, 1907년 상해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다. 부친 소옥헌(邵玉軒)은 5남3녀를 두는데 소일부는 형제자매중에서 6째이다. 그래서 나중에 홍콩영화티비업계에서는 그를 "육숙(六叔)"이라고 불렀다.

 

소일부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났고, 특히 희극과 영화에 빠졌다. 그때 그의 가장 큰 꿈은 영화업계에서 꿈을 펼치는 것이엇다. 집안이 중도에 몰락하여, 1926년,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소일부는 셋째형 소인매(邵仁枚)의 부름을 받고 싱가포르로 간다. 거기서 영화사업에 뛰어든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소씨형제는 친히 방영기기와 영화필름을 들고 뜨거운 태양아레서 먼 길을 걸어 화교가 많은 농장으로 가서 노천영화를 상영했다. 그때의 영화상영설비는 낙후되어 있어서 손으로 하나하나 필름을 돌려야 했다. 영화 한 편을 틀어주면 손목이 마비될 정도였다. 다만 소일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형제둘은 몇년동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크고 작은 지방을 다 돌아다녔고, 약간의 명성을 얻게 된다.

 

1. 선배의 여자에게 한눈에 반하고, 세상의 비난을 무릎쓰고 결혼에 골인하다.

 

당시, 싱가포르에서 가장 유명한 부호 여동선(余東璇)은 소씨형제를 아주 좋게 보아서, 그들을 집에 손님으로 초청한다. 그날 그들은 여동선의 집으로 가고, 여동선은 친히 문앞까지 나와서 마중한다. 곁에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청신탈속(淸新脫俗)하고 기질이 고귀하고 전아한 미모의 여자가 서 있었다. 여동선은 그들에게 소개해준다: 황미진(黃美珍) 소저이다.

 

식사를 한 후, 여동선은 소산객(邵山客)을 서재로 불러 업무협력의향을 협의하고, 황미진에게는 소일부를 데리고 화원을 산책하도록 한다. 두 젊은이는 화원을 걸으면서 이것저것 이야기 한다. 그들이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눈 주제는 영화였다. 한동안 얘기를 나누면서 그들은 마음이 잘 맞고, 공동의 화제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서로 너무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할 정도였다. 첫만남에서 소일부와 황미진의 마음에는 잔물결이 인다. 여동선의 집을 떠난 후, 황미진의 아름다운 모습은 소일부의 눈앞에 어른거렸고, 처음으로 연애의 맛을 느낀다.

 

나중에 여동선의 적극적인 지원하여 소씨형제는 싱가포르에서 간판을 내걸고 소씨기구를 설립한다. 얼마후 소인매는 동생의 재능으로 충분히 싱가포르의 사업을 맡을 수 있다고 보고, 싱가포르를 동생에게 맡기고 자신은 말레이시아로 가서 새로 개척한다.

 

소일부는 사업에 바빳다. 황미지는 재능이 넘치고 진취적인 소일부에게 깊이 끌렸다. 그를 보기 위하여, 황미지는 자주 핑계를 찾아서 소씨기구로 가서 소일부를 만난다. 수시로 선물을 가져가서 직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고 어느 집에 곤란한 일이 있는지 알아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를 해결해주기도 했다. 이렇게 소일부에게 여러가지 도움을 주게 된다.

 

두 사람의 마음은 갈수록 가까와졌고, 지기(知己)를 넘는 알수없는 감정이 두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회사산하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난 후, 소일부는 앞장서서 황미진을 집에까지 바래다준다. 황미진는 차를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두 사람은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회사에서 여동선의 집까지, 이 두 젊은 한 쌍의 애정의 족적이 적지 않게 남겨진다.

 

소일부는 애정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즐기면서 한편으로 홍수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불안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황미진은 여동선의 여자친구였다. 여동선은 선배이고, 자신에게 은혜가 있었다. 셋째 형 소인매는 이 일을 알고 난 후, 소일부에게 이 애정을 포기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황미진이 그보다 5살이 많아서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일부는 나이는 장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일부와 황미진의 관계가 애매하다는 소문은 여동선의 귀에도 들어간다. 여동선은 그러나 일소에 부쳤다: "미진은 영화를 좋아한다. 일부는 영화를 잘 아니 같이 간 것이고, 그건 좋은 일이다."여동선의 관용에 황미진은 마음 속으로 즐거워하며, 그녀는 소씨기구의 내부업무에 더욱 많이 관여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계획을 내놓기도 한다. 1930년, 소씨형제(Shaw Brothers)회사가 설립된다.

 

1931년, 소일부는 유성영화를 찍어보기로 결심한다. 그의 이 대담한 생각은 즉시 황미진으로부터 동의를 받아낸다. 황미진의 지지와 격려하에, 소일부는 미국으로 고찰을 떠난다. 당시 탈 수 있는 비행기가 없어서 배를 타고 간다. 생각지도 못하게 여객선이 좌초되어 침몰한다. 물에 빠진 소일부는 나무 산판(舢板)을 끌어안고 망망대해를 하룻밤 표류한 후 극적으로 구조를 받아 생환한다. 그리고 미국 헐리우더에서 필요한 "마이크기기'를 사서 돌아온다. 몇달 후, 소일부가 미국에서 대량의 장비를 사서 싱가포르로 돌아올 때, 황미진은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일부가 부쩍 마른 것을 보고 그녀는 마음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서로 그리워하던 연인은 감정에 이끌려 꼭 끌어안는다.

 

1932년, 소씨형제는 마침내 홍몽에서 중국최초의 유성영화 <백금룡(白金龍)>을 찍어 중국유성영화의 신기원을 이룩한다. 이 영화는 소일부에게 큰 돈을 벌게 해주었고 명성을 드높였다.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소일부와 황미진은 애정이 더욱 깊어져서 피차간에 떨어질 수 없게 되어버린다.

 

마침내 하루는 소일부가 용기를 내어 친히 여동선의 집으로 찾아가서 솔직하게 여동선에게 그와 황미진이 서로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여동선은 그의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크게 웃으며 말한다: "너희의 일은 내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군자는 남의 좋은 일을 이뤄주어야 한다. 동생이 미진과 진심으로 서로 사랑한다니, 이것저것 신경쓸 것없다. 설마 미진에게 평생 나같은 늙은이와 함께 있으라고 하겠는가?" 소일부는 여동선에게 깊이 절을 한다.

 

1937년, 30살의 소일부는 세속의 여러가지 편견과 구속을 무릅쓰고, 황미진과 싱가포르에서 혼례를 거행한다. 그 날, 여동선은 50만위안의 돈을 보내와 축하를 한다. 매번 여동선을 언급할 대마다 소일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이 관후하고 인자한 선배에게 마음 속으로부터 감격하는 것이다. 결혼 후, 소일부와 황미진은 이 힘들게 얻은 혼인을 귀하게 여긴다.

 

황미진은 소일부와함게 그의 사업과 인생의 곡절을 함께 걷고, 어려운 시절을 함게 한다. 이 세월이 가져다준 진정한 사랑에 소일부는 깊이 감격했다. 설사 이후 그의 곁에는 미녀가 구름처럼 많이 몰려들었지만, 모두 지나가는 구름이었다. 황미진의 그의 마음 속에서의 지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황미진은 집에서 남편을 내조하고 자식들을 가르치며, 소일부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낳는다.

 

2. 목면상목상연애(木棉橡木相戀愛), 홍안지기부도로(紅顔知己不到老)

 

1945년 항전승리후, 한창 나이의 소일부는 웅심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전쟁으로, 소씨형제회사는 새로 해야할 일이 많았다. 소일부는 긴박감을 느낀다. 더욱 큰 열정을 투입하여 소씨의 영화사업에 투입한다. 영화사건물을 새로 만들고, 영화관과 연락하며, 매일 최소한 1편의 영화를 보았다. 당시 그가 타던 롤스로이스는 호화차량이다. 차안에 바도 있었다. 그러나 공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그는 이것을 소형탁자로 개조하여, 도중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다.

 

1952년의 어느 날 밤, 소일부는 소씨영화관건물의 위층에 있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듣고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잠이 들어 버린다. 떠나려고 할 때, 아나운서가 말했다: 다음에는 남양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여가수 방일화(方逸華) 소저가 노래를 하겠습니다." 그는 '방일화'라는 세 글자를 듣고 상당히 귀에 익다고 여긴다. 그는 손을 흔들어 웨이터를 불러 물어본다. 웨이터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방 소저는 최근 남양에서 인기를 끄는 가수입니다. <화월가기(花月佳期)> 곡 하나로 완전히 떴습니다." 그제서야 소일부는 깨달았다. 그는 그녀의 음반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웨이터를 시켜 생화를 한 다발 보내준다.

 

노래가 끝난 후, 방일화는 소아(素雅)한 치파오를 끌고 소일부에게 다가와서 감사인사를 한다. 두 사람은 조용한 술집으로 가서, 야식을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소일부는 그제서야 알았다. 방일화는 상해사람인 것이다. 모친은 상해탄의 '무국홍성(舞國紅星)" 방문하(方文霞)였다. 그보다는 24살이 어렸다. 집안이 중도에 몰락하여, 모친의 빼어난 몸매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17살의 나이로 무대에 올라서 노래를 불러 생활하고 있었다. 주로, 홍콩의 고급클럽에서 공연했다. 방일화는 아주 총명했고, 좋아하는 노래를 한번 들으면 바로 불렀고 틀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겉모습에 아름다운 목소리까지 그녀의 인기는 갈수록 올라간다. 이번에 그녀는 싱가포르의 연출업체가 초청하여 공연하게 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에 두 사람은 아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후, 영화를 고르기 위하여 소일부는 자주 홍콩을 떠난다. 매번 홍콩에 도착할 때마다 시간이 허락하면, 그는 방일화의 나이트클럽에 가서 노래를 들었다. 방일화는 소일부에게 어릴 때 상해에서의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남양에서 공연할 때의 여러가지 들은 이야기를 해준다. 소일부는 푹 빠져서 그녀으 이야기를 듣고, 가끔 웃음소리를 내거나, 한 마디 기지있는 말을 던진다. 그리하여 방일화는 자신의 앞에 앉은 사람이 대단한 영화왕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친절한 윗사람, 다정한 스승 그리고 유머넘치는 친구로 느꼈다.

 

교류가 깊어지면서, 소일부는 방일화가 예쁘고, 노래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견식이 뛰어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를 홍안지기로 여기게 된다. 1955년,이미 동남아영화의 반벽강산을 점령한 소일부는 영화촬영장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노동자에게 공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소씨는 결렬한 영화업계에서 발전하려면, 반드시 자신의 영화제작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홍콩에 '소씨영성(邵氏影城)'을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하려면 큰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소씨형제의 홍콩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둘째형의 강렬한 반대에 부닥친다. 영화업에 대하여 관심이 별로 없던 둘째형은 소일부에게 홍콩으로 와서 영화사업을 맡으라고 한다.

 

1957년 초가을,  소일부는 30년간 분투하던 남양을 떠나고, 30년간 합작하던 셋째형과 헤어져, 싱가포르를 떠나 홍콩으로 간다. 이 해에 소일부는 50살이었다. 공자가 말한 '지천명'의 해이다. 소일부는 만장웅심을 갖고 홍콩으로 진군하여, 다시 패업을 도모했다.

 

홍콩에 도착한 후, 소일부는 그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일을 하나 벌인다. 방일화에게 초청장을 보내어 그녀로 하여금 소씨형제의 업무를 주재하도록 부탁한 것이다.

 

당시, 방일화의 노래는 중천에 뜬 해와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떠나지 말라고 권한다. 그러나 그녀는 일체에 불구하고 가요계를 떠나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그녀를 발견해주고 그녀를 인정해주며, 일평생 함께 할 가치가 있는 남자 소일부를 찾아간다.

 

과연 방일화는 소일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소씨회사에 들어온 후, 그녀는 전심전력을 일에 투입한다. 매일 소씨회사에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소씨회사 구매부의 하급직원에서 출발하여 점차 회사의 각 부서를 거친다. 대내조정, 대외교제에 모두 능통하게 된다. 방일화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총명하고 예지를 지녔다. 그녀는 금방 소일부 사업의 두뇌가 되고, 가장 믿을만한 조수가 된다.

 

1957년 방일화의 극력 추천하에, 소일부는 100만홍콩달러를 들여 대담하게 나이 겨우 30살밖에 되지 않은 이한상(李翰祥)에게 감독을 맡긴다. 이한상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강산미인>으로 당시 홍콩영화계의 매표수입최고기록을 세운다. 그리고 제5회 아시아영화제에서 5개를 상을 탄다. 그후, 소일부는 거금을 들여 <양귀비>, <양산백과 축영태>를 은막에 올린다. 이 두 거작은 홍콩, 대만 그리고 당남아앨대에서 중국영화붐을 일으킨다. 소씨영화회사는 20여년간 1000여편의 영화를 찍는다. 그의 산하 영화관은 200개에 달하고, 매일 관중이 100만명이 들어온다. 소씨영성의 전성기에, 직원은 1300명을 넘었고, 외국매체에서 '동방의 헐리우드'라고 불리웠다.

 

소씨영업의 전성기에, 영화는 텔레비전의 도전과 위협을 받게 된다. 이때 방일화는 다시 독보적인 혜안으로, 소일부에게 거금을 투입하여 무선텔레비전 경영권 입찰에 참가하도록 건의한다. 그 결과 일거에 큰 성공을 거둔다. 이때부터, 소일부는 홍콩영화드라마업계에서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는 '교주'의 지위에 오른다.

 

3. 구십고령당신랑(九十高齡當新郞), 일수이화압해당(一樹梨花壓海棠)

 

방일화는 단지 나무에 빌붙어 사는 담쟁이덩쿨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로 자신의 능력과 충정을 증명했다. 그리고 소일부의 인정과 존중을 받는다. 그래서 비록 소일부의 왕국에 출중한 미인들이 적지 않지만, 진정 소일부가 공사를 불문하고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방일화 한 사람뿐이었다.

 

소씨회사에 들어온 후, 방일화는 소일부와 40여년을 함께 한다. 원망도 후회도 없이 한 여인의 가장 고귀한 청춘, 총명, 재지와 길은 정을 소일부와 그의 사업에 바친다.

 

1987년,소일부의 본부인 황미진이 미국에서 병사한다. 향년 85세이다. 그녀는 소일부와의 혼인을 50년이나 유지했다. 비록 소일부가 사업에 바빠서 매일 '겨우 1시간 휴식을 했다'고 할 정도이니, 처와 함께한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일부는 정이 깊은 사람이다. 처의 그의 마음 속에서의 지위는 대체할 수가 없었다. 죽은 처를 초도하기 위하여 그해 소씨회사는 1년간 사업을 중단한다.

 

황미진이 병사한 후, 소일부와 방일화의 결혼을 사람들은 조만간 일어날 시간문제로 여긴다. 그러나 건강을 잘 관리하여 여전히 건장하고 정명한 소일부는 기자들의 계속되는 물음에도 모두 웃으면서,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을 막는다. 방일화는 그러나, 그녀는 소일부를 스승, 사장, 친구와 지기로 존경하고, 이 얻기 힘든 연분을 귀중하게 여기며 더 이상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방일화에 대하여 소일부는 계속 미안함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방일화가 그에게 결혼하자고 요구한 적은 없지만, 그는 이것이 그녀가 오랫동안 품어온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치정의 여인을 배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1997년, 처 황미진이 죽은 지 10년후, 소일부는 마침내 재혼을 결정하고, 여인으로서 가장 고귀한 40년을 자신에게 바쳐온 방일화를 처로 맞이한다.

 

1997년 5월 6일,90세의 소일부는 62세의 방일화와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정식 결혼하고 등기한다. 원래, 라스베가스에 결혼등기하는 것은 예약도 필요없고 35달러만 내면 바로 부부가 된다. 그리고 홍콩정부도 인정한다.

 

이때의 방일화는 이미 예순이 넘은 나이였다. 아흔의 신랑과 손에 손을 잡고 여전히 샤넬 옷을 입고 시원한 단발머리를 했다. 그러나 얼굴에는 신부의 수줍음이 나타났다. 마음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자들이 놀라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자, 소일부는 망설임없이 큰소리로 말한다: "나는 방소저와 여러해동안 친구였고 45년을 함께 일했다. 결혼은 정식 명분을 가져다줄 분아니라, 방소저에게 이후의 행복을 확정시켜 줄 것이다."

 

이 혼례에 대하여, 홍콩의 저명한 평론가 사소흔(査小欣)은 이렇게 말했다: 방일화에게 필요한 것은 비호가 아니라 존중과 인정이었다.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큰 상수리나무의 옆에서 우뚝 선 목면이었다. "그녀는 그를 앙모하고, 감격하고, 탄복했다. 의존하고 구걸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고상한 남자가 결국 그녀에게 명분을 주었다."

 

소일부와 방일화가 결혼한 후, 그들의 원래 생활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보통부부처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소일부와 방일화는 여전히 각자의 집에서 생활했다. 방일화의 생활은 여전히 검소했고, 두 여동생과 그녀가 좋아하는 고양이와 함께 작은 양식 집에서 살았다. 평소에 두 사람은 전시성에 함께 출근하고 주말에는 방일화가 소일부의 집으로 간다. 그리고 '육숙'과 함께 오찬을 한다. 매번 그녀는 개략 3시간정도 머문다. 기실 그들의 집은 차로 5분거리에 있다.

 

2010년 1월, 늙을 때까지 일을 계속한 소일부는 102살의 고령이 되어, 휴식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홍콩무선텔레비전(TVB)의 행정주석 직위를 물러나고, 그가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시가총액이 164억홍콩달러에 달하는 텔레비전왕국을 방일화에게 넘겨주어 경영하게 한다. 반세기의 풍우가 지나간 후, 방일화는 여전히 이 전설적인 인물의 마음 속에 가장 믿을만하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대상이다. 예전에 그가 홍콩으로 와서 창업할 때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