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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장하이(張海)의 감옥생활

by 중은우시 2014. 3. 2.

글: 박객천하(博客天下) 

 

비록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지만, 젠리바오(健力寶)의 전동사장 장하이는 여전히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광동성검찰원이 확인해준 바에 의하면, 장하이는 이미 해외로 도피했고, 2심이전에 간수소에 있는 동안 '입공(立功)"으로 감형5년을 받았다. 그가 감옥안에서 2번이나 감형을 받은 것은 허위조작으로 밝혀졌다.

 

아래의 내용은 장하이와 같이 수감되어 있는 수감자들이 말한 것으로, 장하이와 감옥에서 만났을 때 들은 것이나, 그들이 장하이의 감방을 지날 때 본 것, 그리고 간수들이 하는 말을 들은 것들이다.

 

장하이와 함께, 광동성 샤오관시 우장감옥에 갇혀 있던 수감자인 천장(가명)은 일찌감치, "장하이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죄수이고, 그는 어르신이다." 천장은 말한다. 그는 그들을 관리하는 간수들이 얘기할 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이 감옥에 갇힌 큰 인물들 중에서 장하이는 랭킹 4위에 해당한다고.

 

2008년, 장하이는 자금유용, 직무침점죄로 2심에서 10년형을 받는다.

 

장하이를 위하여 따로 준비된 것은 개략 40평방키터의 방이고 거기에는 30인치가량의 30개이상의 채널을 시청할 수 있는 LCD TV가 있었다. 이런 점은 장하이의 옆 방에 있던 수감자 왕쏭(가명)이 한 말이다. 왕쏭은 장하이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신은 이 TV로 축구경기를 보고, 시정프로그램을 보고, 춘완(春晩, 설날 저녁 CCTV에서 하는 버라이어티쇼)을 보고, 심지어 TV드라마도 몇 개 보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감옥에서, 보통죄수는 그저 저녁 7시에 TV를 접촉할 기회가 있다. 그들은 감옥측이 준비해주는대로 뉴스를 볼 수 있다.

 

매일 저녁, 장하이는 감옥에서 그를 위하여 특별히 만든 1.5미터 너비에 시몬스 매트리스를 깐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잤다.

 

보통죄수들은 잠자기 힘든 바닥에서 잠을 자는데 비하여 장하이의 방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쉽게 그의 침대위에 깔려 있는 모란꽃무늬가 있는 침대보를 엿볼 수 있었다.

 

장하이는 수의를 입지도 않았다. 가족은 언제든지 그에게 사계절 입을 수 있는 사복을 보내주었다. 그는 머리카락을 기를 수도 있었다. 이발을 해야 하면, 감옥 바깥의 정규이발소에서 이발사를 불러서 머리를 깍았다.

 

장하이의 방에는 24시간 온수가 공급되었다. 그리고 전원스위치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감옥이 정한 휴식시간의 규제를 전혀 받지 않았다.

 

보통죄수들은 오전6시에 기상하고 밤10시에 소등한다. 매일 감옥 공장에서 8시간 작업을 해야 한다. 저녁을 먹고난 후 반시간가량의 활동시간을 가질 뿐이다. 이에 비하여 큰인물인 장하이는 잠을 잘 수도 있었고, 감옥과 활동장소를 오갈 수 있었다. 그러나, 수감자들은 이 부호가 운동은 그다지 잘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농구를 하지 않을 뿐아니라, 배드민턴도 치지 않았다. 평소에 수감자들이 그에게 같이 운동하자고 해도 그는 참가하지 않았다. 한 수감자는 이 '대인물'이 그저 운동장을 가끔 두 바퀴 뛰고는 들어가는 것을 주목했다.

 

장하이는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핸드폰을 하나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잘 아는 내부인사가 말해준 바에 따르면, 장하이는 자유롭게 통신기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외부에서 그가 입공하여 감형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프리즌브레이크' 플랜을 원거리조종하는데 편리하게 해주었다.

 

장하이는 감옥안에서 언제든지 책과 잡지를 볼 수 있었다. 그의 서가에는 각종 기업경영류의 서적이 있었고, <사기>도 있었다.

 

장하이가 가진 여러 특권중에서, 가장 수감자들이 부러워한 특권은 그가 자신의 독립된 주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냄비, 그릇, 대야등 주방기구를 모조리 갖추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감옥음식이 먹기 싫으면 스스로 요리해서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감옥의 간수들은 수시로 그를 위하여 바깥에서 요리재료를 사다 주었다.

 

간수소에 수감된 동안, 장하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구저우쥔(顧雛軍)이었다. 장하이와 마찬가지로, 구저우쥔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기는 자본게임의 고수인 기업가이다. 그는 거린커얼(格林柯爾)계의 창시자이고, 전성기때는 커롱(科龍)전기를 포함한 5개의 상장기업을 보유했었다.

 

한번은 장하이가 구저우쥔도 같은 간수소에 있다는 말을 듣고, 심지어 그를 만나러온 변호사에게 '나와 같이 갇혀 있는 구저우쥔이야말로 진정한 자본운용고수이다. 나 장하이는 기껏해야 둘째나 갈 뿐이다."

 

구저우쥔이 10년형을 받은 죄명도 역시 자금유용이다.

 

2014년 1월 20일 오후, 광동성검찰원은 대외에 확인해주었다. 장하이가 이미 해외도피하였다고. 이것은 2011년 장하이가 가석방으로 출옥한지 3년이 지난 때였다. 장하이가 6년간 복역하는 동안 가짜 '입공'으로 형을 5년이나 감형받았었다.

 

이제 젠리바오의 전동사장이 감옥안에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지내면서 가짜입공자료를 만들어 감형받았다는 범죄사실에 세상에 드러났다.

 

2014년 설날이전부터 기자는 광저우, 포산과 샤오관의 3곳을 다녔고, 법원, 변호사 및 장하이의 수감동료들을 만났다. 그들을 통하여 이 젠리바오의 전 총재가 어떻게 금전등의 방식을 통하여 자신이 감옥에서 고생하지 않았는지, 감옥내에서 변호사들을 원격조종하여 공안,검창,법원계통의 일부 사람들의 협력을 받아 감형을 받아냈는지를 개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2월 14일, 정월대보름 저녁, 장하이의 모친은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아들의 현재상황에 대하여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장하이는 장하이고, 나는 나이다." 그녀의 말이다. "내 아들은 어떤 곳에서 아직 살아있다. 나는 그가 잘 지내기를 바란다."

 

장하이는 일찌기 '신동'이었다. 중국인들이 기공에 열중하던 1980년대말, 그는 자칭 큰 나뭇잎을 입안에 물고서 작게 만들 수 있는 특이공능이 있다고 했으며, 이것으로 명성을 크게 떨친다.

 

장하이는 또한 자신을 티벳밀교대사이며, 일찌기 활불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가 티벳밀교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를 기록한 글에 따르면, 티벳밀교에서 유명한 "종화정공(拙火定功)"를 수련하기 위하여 그는 한겨울에 상의를 벗고, 부모는 5,6겹의 냉수에 담근 면포를 그의 몸에 덮었으며, 그 후에 그 자신의 신체에서 발산하는 열량으로 면포를 말려버렸다.

 

장하이는 나중에 대사의 신분에서 변신하여 중국기업계의 풍운아가 된다. 그는 자본운용고수이며, 막후의 매수인이었다.

 

25살때, 그는 36개 명문대학에서 공동으로 발기인이 되어 설립한 중국까오커(高科)공사의 동사장이 된다. 그는 중국에서 가장 젊은 상장회사 동사장이 된 것이다. 그의 산하기업인 "카이디(凱地)"계의 자본으로 연결된 관련회사의 총시가총액은 100억위안이 넘었다.

 

28살때, 그는 다시 국내 최대의 음료회사인 젠리바오의 동사장 겸 총재에 오른다. 젠리바오의 경영권을 장악한 후, 그는 거액의 자금을 퍼부어 싱가포르의 호화유람선 '처녀성호'를 요란하게 매입한다. 매매체서 추산한 바에 따르면, 장하이는 자신의 '등극의식'을 위하여 400만위안을 썼다 이는 당시 아시아최대규모의 유람선활동이었다.

 

젠리바오를 차지한 후, 그는 축구계에 뛰어든다.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축구팬들은 장하이가 강호를 종횡하던 '협객풍모'를 기억한다. 그가 관장하던 선전젠리바오팀은 2004년 중초연새의 우승을 차지한다. 그는 깃발을 든 혁명자의 모습으로 쉬밍(徐明)등과 함께, 공개적으로 중국축구협회에 반기를 들어 한동안 일세를 풍미한다.

 

자본과 권력의 정점에 오른 후, 장하이의 인생은 신속히 바닥으로 하락한다. 2005년 3월, 그는 허위장부조작, 허위투자, 젠리바오자금횡령등의 혐의로 젠리바오집단에게 고발당하고 그후 포산경찰에 체포된다.

 

그의 1심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소송이 많이 걸려 있었지만, 장하이는 여전히 고자세를 취했고, 매번 법정에 나갈 때마다 스타가 레트카펫을 걷는 것처럼 주목을 받았다.

 

당시 장하이의 재판에 참여했던 익명을 요구한 여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장하이가 매번 법정에 나갈 때마다 뉴스거리가 되었고 마치 한 편의 대작을 보는 것처럼 열기가 올랐다."

 

2007년 연초, 당시 <축구보>의 기자이던 리청펑은 중개인의 전화를 받는다. 상대방은 황루(黃鷺)라는 젊은 가수가 장하이의 여자친구라고 말했다.당시 이 여가수는 간수소에 있던 장하이와 정식결혼을 요구했으며, 2심에서는 합법적인 장하이의 처라는 신분으로 장하이를 지지했다.

 

장하이의 변호사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많은 기자들이 같은 시간에 중개인의 전화를 받았고, 황루를 인터뷰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하이에게 이런 여자친구가 있는지도 몰랐다. "이 여자친구는 거의 장하이사건이 가장 민감할 때 갑자기 나타났다."

 

이 갑자기 나타난 뉴스당사자에 대하여, 기자들이 우려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리청펑은 비행기편을 세번이나 바꾸었다. 결국 중개인의 계속된 재촉에 비행기를 타고 광저우로 가서 인터뷰하기로 결정한다.

 

그후, 여러 국내매체는 <'결혼강요'한 장하이의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장하이와 여자친구의 사랑이야기를 다루었다. 그중 한 매체에서는 장하이가 간수소 안에서 여자친구 황루와 결혼신청서를 제출한 후의 모습을 기록하기도 했다: "장하이는 아주 감동했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간수소에 결혼신청서를 제출했다"

 

2014년 2월 14일 저녁, 당시 장하이의 1심재판에 참여했던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장하이결혼사건은 여론조작이었다. "당시의 장하이는 결혼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동정표를 얻고자 했고, 2심에서 감형을 하는데 여론몰이를 할 생각이었다."

 

이 일은 매체에서 한달여간 보도하고, 장하이사건이 2심에서 개정될 때까지 계속된다. 한 내부인사는 결혼기획의 열기를 보존하기 위하여, 2심때, 장하이는 가족에게 혼인분야의 소송을 잘 하는 변호사를 모셔오기도 했다.

 

초창기에 연기했던 티벳밀교대사이건 나중의 기업가이건 그리고 마지막에 수감자이건 장하이에 있어서, 혼란한 시기는 길지 않았고, 상승의 계단을 밟았다. 그리고 항상 가장 빠른 지름길을 골라서 갔다.

 

사실은 일찌기 장하이가 최종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간수소 안에서 장하이는 이미 입공을 통하여 감형받는 또 다른 '프리즌 브레이크(탈옥)' 계획을 세워 두었고, 이미 실행에 들어갔다.

 

2008년, 장하이의 2심때, 포산시 간수소에서 1심에서 15년 유기징역형을 받은 장하이는 감옥의 동료수감자를 고발하는데 공을 세워 5년감형을 받는다. 그 때 여러 신문의 보도에는 장하이를 감옥에서 경찰을 도와서 사건을 해결한 '입공자'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4년후 장하이의 '입공자'라는 이미지는 포산시 간수소 부소장 뤄젠능(羅建能)에 의하여 철저히 뒤집혀진다.

 

뤄젠능이 자수하기 전에 장하이가 조사를 받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2012년 9월 4일 저녁, 그는 포산시 간수소 경찰 천송류(陳松柳)가 장하이 건으로 검찰원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다음 날 저녁, 처와 상의한 후, 이 간수소의 전 부소장은 포산시 검찰원에 자수한다.

 

이 사건에 참여했던 내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장하이의 변호사중 한 사람인 쉬린(徐林)이 바로 천송류를 통하여 뤄젠능을 알게 되었고, "천송류는 쉬린과 같은 고향사람이다."

 

장하이의 원격조종응ㄹ 받는 쉬린이 나중에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는 장하이를 변호하는 기간동안, 장하이에게 입공을 할 수 있도록 선을 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리하여 그는 간수소에서 단서를 수집하는 업무팀의 뤄젠능을 찾고, 뤄젠능은 장하이가 고발하면 그들이 반드시 수사하겠으며, 쉬린과 장하이에게 간수소 구금인원이 입공을 세우는 전체 절차를 알려준다.

 

뤄젠능의 1심형사판결문에 따르면, 전 포산시간수소 부소장 뤄젠능은 2006년 하반기의 어느 날, 장하이의 변호사인 쉬린이 그를 찾아왔고, 그가 장하이를 도와서 입공자료를 만드는 것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전화에서, 쉬린은 그에게 3만위안을 주면 될지를 물어보았고, 그는 거부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개략 1주일후, 포산시의 한 호텔입구에서 포산간수소의 경찰차가 한 승용차의 곁에 선다. 승용차의 조수석에서 변호사 쉬린이 창문을 열고, 종이봉투에 담은 3만위안을 경찰차내의 뤄젠능에게 던져준다. 쉬린의 3만위안은 장하이의 당매(堂妹) 장레이(張蕾)가 제공한 것이다.

 

3만위안을 받은 후, 뤄젠능은 포산시 란스파출소의 경찰 송샹라이를 찾아간다. 송샹라이는 주거침입강도사건의 관련자료를 제공한다. 이 단서자료를 확보한 후, 범죄추가수사를 이유로 간수소의 중대장 천췐다를 찾고, 사건관련자 장펑(張豊)을 장하이와 같은 감방으로 옮겨주게 한다. 그리고 다시 장하이로 하여금 장펑을 고발하게 한다.

 

뤄젠능은 장하이의 고발자료와 확보한 관련증거를 간수소의 명의로 포산시 페이청구 란스파출소로 넘겨서 처리하게 한다.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하에서 파출소는 이 사건의 입건,해결자료를 포산시간수소로 전달한다. 사후에 뤄젠능은 3000위안을 란스파출소의 민경 송샹라이에게 전달한다. 포산시간수소는 광동성 고급인민법원에 장하이가 수감기간중 입공을 했다는 서면의견을 제공하고, 광동성 고급법원은 2심에서 이에 기하여 장하이의 입공 정상을 참작하여 장하이에게 유기징역 10년을 선고한다.

 

장하이는 원하는대로 위조자료를 가지고 감형기회를 얻는다. 기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장하이가 성공하기 전에, 그는 자신의 경력을 위조하여 대외에 수수께끼같은 인상을 남긴다. 허난대학 체육계 무술전공자수반에 제출한 인사자료에는 장하이가 자신이 졸업한 모교를 카이펑시 제13중학을 제21중학으로 고친다. 그가 등기등록한 기업법인의 대표경력에서는 최종졸업학교를 어떤 때는 허난대학이라고 했다가 어떤 때는 정저우대학이라고 하곤 했다.

 

간수소내에서 입공의 단맛을 본 장하이는 승용차에 앉아서 샤오관 우장감옥으로 옮겨간다.

 

감옥동료 천장에 따르면, 장하이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막 감옥에 들어왔을 때, 이전에 장하이가 법정과 간수소에서 고자세를 보였으므로 우장감옥의 한 고급관리자가 특별히 장하이에게 당부했다: "감옥안은 간수소와는 다르다. 고개를 얌전하게 지낼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살기가 편할 것이다."

 

장하이도 확실히 얌전하게 지내려고 노력한 것같다. 그러나, 장하이가 이 충고를 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몇달 후, 장하이는 자신이 가진 특권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감옥에서는 그에게 원래 감옥 의무실인 독방을 어레인지 해주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장하이는 혼자서 이 독방에서 잠자고, 책읽고, 요리하고, 혹은 TV를 봤다. 다른 감옥동료와의 접촉을 가급적 자제했다.

 

이 큰 인물의 특권과 행동은 금방 감옥안의 다른 감옥동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뒷말의 대상이 된다.

 

감옥에 들어간 후, 일찌기 '기공대사'였던 장하이는 금방 감옥안에서 첫번째 역할을 맡는다: '범의(犯醫)'. 감옥안의 '범의'는 통상적으로 일정한 의학지식을 보유한 수감자가 맡는다. 평소에 옥의(獄醫)를 도와서 다른 수감자의 병을 진료한다. 이것은 감옥안에서 일종의 특수한 업무를 하는 수감자이다. 매 감창(監倉)에 1명뿐이다. "말로는 옥의를 도와준다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수감자들의 체온을 재거나 다른 수감자들이 제 시간에 약을 먹는지 감독하는 것이다." 천장의 말이다. 이런 특별한 업무를 하는 수감자는 다른 수감자들 처럼 매일 공장에 가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쉽게 감형을 받을 수 있다.

 

당시, 수감자들은 일찌감치 장하이가 특이공능을 가진 티벳밀교대사라는 것을 알았고, 심지어 어떤 수감자는 '범의' 장하이로부터 옛날의 기공대사로서의 '병치료'의 신기를 체험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장하이의 행동은 그들을 실망시킨다.

 

천장은 말한다. '기공을 할 줄 안다'는 이런 능력이 장하이에게서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매일 감옥의 독방내에서 살면서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고, '범의'의 직책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전에 한 감옥동료가 장하이에게 농담을 했다. '너는 왜 다른 사람의 병을 봐주지 않느냐?" "웃기지 마라. 내가 그걸 어떻게 하느냐" 장하이는 그렇게 대답한 후 바로 자리를 떠났다.

 

범의를 하는 외에 우장감옥의 감옥동료들은 자주 감옥의 신문에서 장하이의 이름을 보았다.

 

당시 우장감옥내에는 감옥신문이 있었는데, 매월 1회씩 발간했다. 수감자가 거기에 글을 발표하면 상을 받는다. "상이 어느 정도 쌓이면 감형을 받을 수 있다." 천장의 말이다. 그러나 이 신문은 원고의 수준을 높게 요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감옥동료들은 이 감형의 좋은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

 

감옥신문의 요구에 따라, 투고자들은 개조와 관련한 느낌이나 이야기를 적을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서 저자세로 쓰고 선정적으로 쓸수록 실릴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천장의 말이다. 감옥안에서 장하이는 원고를 가장 많이 투고하는 사람에 속했고 매전 자신은 정부에 대한 감사의 뜻을 글에 넣었다." 감옥신문 하나에서 장하이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바 있다. "감옥안에서 청심과욕(淸心寡慾)의 생활을 하니 자신의 사상과 신체는 모두 탈태환골의 신생(新生)이 있었다." 이것은 확실히 사실이 아니다. 이 대인물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0년의 어느 날, 천장과 감옥동료들은 돌연 감옥내부의 감형공고판에서 수감자 장하이의 감형통지를 보게 된다. 그 위에 쓰인 것은 장하이가 '중대입공'을 세워서 2년감형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많은 감옥동료들은 장하이의 소위 '중대입공'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중에 알아보고나서야 비로소 '자동차전후쌍시경'의 특허발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는 중대과학기술발명이라는 입공조건에 부합한다

 

이 하이테크기술의 감형은 감옥내에서 한동안 얘깃거리가 된다. 천장은 말한다. 모두 평상시에 장하이가 무슨 과학기술발명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때문에, 그와 몇몇 감옥동료들은 기회를 잡아 장하이에게 물어보았다: "장하이형, 혼자서 아무 소리소문없이 그렇게 중대입공을 세우다니, 어찌 우리 이름도 하나 넣어주지 않았습니가. 덕이라도 조금 보게 해주시지." 그러나 감옥동료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장하이가 자신의 머리름 만지면서, "XX, 나도 그게 뭔지 몰라." 천장은 특별히 강조했다. "이 말은 장하이가 한 말 그대로이다."

 

장하이가 해외도피한 후, 관련부서가 매체에 보낸 자료를 보면, 소위 발명특허는 장하이가 입공으로 감형받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것을 이름만 빌려서 사칭한 것이다. 이 특허는 장하이가 그의 원래 회사의 한 엔지니어에게 설계하도록 시켜서 특허대리회사를 통하여 신청한 것이다. 공식자료에 따르면, 장하이가 우장감옥에서 또 한번의 입공감형기회를 갖게 되는데, 그 수법은 그가 간수소에서 했던 방법과 유사하다. 고발자료를 조작한 것이다.

 

감옥동료들이 보기에, 장하이는 '토호(土豪)'였다. 천장은 말한다. "나는 장하이가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그가 그렇게 손크게 돈을 마구 쓸 줄은 몰랐다." 천장이 말한 '손 크게'라는 것은 장하이가 돈과 특수한 수완을 이용하여 감옥내에서 감형기회를 얻은 것을 말한다.

 

장하이와 같이 가석방을 신청했던 감독동료에 따르면, 2010년 연말, 아직 2년이 있어야 형기가 만료되는 장하이는 가석방기회를 갖게 되었다. 만일 정상적인 가석방절차에 따른다면, 2013년 3월경, 그와 장하이는 가석방으로 출옥할 수 있다. 그러나 장하이는 2011년 2월에 출옥하기 위하여 감옥내에서 사방에 손을 쓴다.

 

여러 감옥동료들은 출옥전에 보인 장하이의 이상한 점들을 얘기한다. "감옥에서 수감자가 가석방되는 것은 제1차, 제2차 이렇게 진행된다. 그러나 장하이가 가석방될 때는 그 혼자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2월초와 3월은 시간적으로 겨우 1달차이이다. 장하이는 6년간 감옥에 있었는데, 마지막 1달을 기다리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1분도 더 이상 감옥에 있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천장의 말이다.

 

출옥전에 장하이는 천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 감옥안에서 쓴 돈은 이 숫자정도가 아니다."당시 장하이는 조용히 손가락 3개를 자신의 눈앞에서 흔들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고 한다.

 

2014년 1월 17일, 광동성 고급인민법원은 대외에 통보한다. 장하이는 감옥에서 수형기간동안 입공, 주대입공을 세운 것이 모두 허위조작이었고, 이에 기하여 감형을 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샤오관시 중극법원도 2013년 10월 31일 장하이에 대한 2차감형의 결정을 취소하는 결정을 한다. 광동성 검찰원도 장하이의 입공감형조작은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이미 입건하여 조사중이라고 발혔다.

 

<양성만보>의 보도에 따르면, 1월 17일, 광동성접형회의 조별토론때 어떤 위원이 '장하이사건'을 얘기했다. 어떤 정협위원은 회의에서 장하이 감형은 공안, 법원계통 40여명이 관련되어 있다고 말했다.

 

당시 토론회 현장에 있던 기자는 기억한다. 마지막으로 성정협위원, 광동성인민검찰원 부검찰장인 황우가 이렇게 말한다: "장하이는 간수소에 들어갈 때부터 허위조작을 했다. 감옥수형기간동안 입공, 중대입공은 모조리 허위조작이다. 현재 되돌아 조사해보면, 1심에서 그에게 15년형을 내리기 전에 이미 문제가 있었다. 장하이는 그때 이미 허위조작을 하고 있었다. 만일 허위조작을 하지 않았다면, 15년형정도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성고급검찰원은 이미 입건조사하고 있다. 입건이후 다시 판결을 받으려고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