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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젠리바오(健力寶)의 창업자 리징웨이(李經緯): 관상투쟁의 희생양

by 중은우시 2013. 4. 27.

글: 섭단(葉檀) 

 

 

 

2013년 4월 22일 13시 56분. 중국의 제1대기업가 리징웨이 선생이 서거했다. 향년 74세.

 

이 비극적 인물은 죄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2년 63세인 리징웨이는 국유자산 6000만위안을 유출시킨 혐의로 고발당하고, '탐오범죄혐의'로 구속된다. 2009년 9월 3일, 전 젠리바오 동사장 리징웨이는 법정에 나와서 재판을 받는다. 2011년 11월 2일, 포산(佛山)중급법원은 1심판결을 선고하는데, 리징웨이는 법에 따라 유기징역 15년과 개인재산몰수 15만위안을 선고받는다. 그의 죄명은 "다른 사람과 공모하여 직무상 편의를 이용하여 생명보험을 구매하는 형식으로 국유자산 331.88만위안을 침해한 것"이다. 참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기업가가 겨우 300만여위안의 보험료때문에 이런 지경에 처하다니.

 

1997년, 젠리바오집단의 매출액은 50억위안을 넘어선다. 4월, 국가공상국이 제1차 '중국저명상표'를 선정할 때, 젠리바오는 그 명단에 오른다. 8월, 중국음료협회가 업계데이타를 발표할 때, 젠리바오는 생산량, 총생산액, 판매수입, 세금이익의 4개항목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다. 통화팽창률을 고려한다면 젠리바오의 당시 판매액은 현재의 100억위안 이상에 해당한다. 여기에 기업가의 재능을 고려하면 현재 젠리바오는 아마도 500억위안의 판매액을 돌파한 대기업으로 성장하여 와하하와 비견할만 했을 것이다.

 

이것은 lose-lose-lose의 국면이다. 중국은 저명한 대기업 하나를 잃었고, 소비자들은 선택 하나를 잃었고, 지방정부는 주요기업과 세수원을 잃었다. 이것은 재산권이 불명확했던 시대에, 재산이 보장을 받지 못했던 시대에 일어난 비극이다.

 

비극의 시대에 죄인을 찾을 수는 없다.

 

우리는 산쉐이(三水)시정부를 질책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엉망진창인 직업경영자를 데려오고, 진정한 기업가는 헌신짝처럼 버려버렸다. 1997년, 젠리바오의 홍콩상장방안이 저지된다. 산쉐이시정부는 리징웨이의 경영진이 "홍콩임시거주증이 없으므로, H주 원시주권을 구매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상장방안을 비준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광저우에 본사건물을 짓고 본사를 이전시키자, 산쉐이시정부는 반도(叛徒)로 보고, 자산이전을 의심했다.

 

갈등이 첨예하게 되면서 너죽고 나살기식이 된다. 1999년, 산쉐이정부가 인원교체된 후, 리징웨이가 제출한 모든 조건이 하나하나 거절된다. 예를 들어, 젠리바오집단이 제출한 회사내부에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하는 방안, 관리층이 자체적으로 4.5억위안의 자금을 조달하여 정부보유지분을 매입하고 3년내에 분할납부하는 방안등이 그것이다. 산쉐이정부는 단칼에 거절하는데 이유는 "리스크가 너무 크고, 젠리바오 자금으로 젠리바오를 매입하려 하는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리징웨이가 이끄는 경영진은 75%를 보유하는데, 산쉐이시정부는 다시 리징웨이 개인에게 5%의 인센티브를 부여한다. 이 방안도 정부에서 거벌된다. 이유는 여전히 "경영진의 자금은 내력이 불명하다"는 것이다.

 

자금원에 대한 의심 배후에는 실제로 재산권에 대한 분쟁이 있다. 아마도 지방정부는 모든 부는 기업의 것이고, 지방정부라는 대주주의 부이며, 리징웨이가 개인재산권, 개인의 부를 실현하려는 모든 노력은 권한을 넘는 것으로 취급했다. 갈등이 격화된 결과는 쌍방간에 대화의 가능성을 없앴다. 이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2001년 7월에 개최된 회의에서, 산쉐이시정부는 젠리바오전제공작연석회의에서 90%의 사람들이 젠리바오의 매각을 주장하였지만, 전제는 리징웨이에게는 넘겨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투기꾼과 사기꾼이 끼어들게 되었다. 젠리바오가 무너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가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산쉐이시정부의 하자를 찾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들이 재산권의식이 없다고 질책할 수 있다. 기업가정신이 없다고 질책할 수 있다. 대주주이면서 대주주로서의 자질을 갖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도 있고, 회사의 미래를 장하이등의 손에 넘겼다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법적책임은 없다. 법률적으로 보자면, 그들이 함정을 설치했지만 모두 합법적인 함정이다. 이것이 바로 전환기 중국기업가의 진정한 비극이다. 그들은 조금만 부주의하면 총을 맞는다. 중국의 기업가가 된다는 것은 기업가자질이 필요할 뿐아니라, 정치가의 균형감각도 지녀야 한다. 더더구나 하늘의 보살핌도 있어야 하고, 특별한 운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리징웨이를 질책할 수 있다. 은인자중하지 못하고 벌컥 화를 내서 대사를 망쳤다고 비난할 수 있다. 더더구나 리징웨는 개인적인 욕심으로 대주주와 해외투자자 및 종칭허우와의 합작을 파괴했다. 다만, 이런 비난도 마찬가지로 성립되기 힘들다. 어느 창업형의 기업가가 자신이 만든 기업을 남에게 순순히 넘겨주려 하겠는가. 어느 초창기의 기업가중 강인한 성격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리징웨이가 내놓은 지분인수가격은 이익을 이전시키기 위한 가격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의 프리미엄보다 약간 높았다. 그가 한 것은 기업가로서 본분내에 있는 일이었다.

 

잔혹한 현실은 리징웨이는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과도기사회의 성공한 기업가의 성격과 지혜는 갖추지 못했다. 산쉐이시정부도 잘못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전망이 좋은 기업 하나를 망쳤다. 이 기업은 지금은 이미 시대에 낙후되었고, 다시 재기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리징웨이 경영진중 4명의 부총재중 3명은 연이어 쌍규, 구속당하였고, 1명은 해외로 '도주'했다. 기업가들이 흩어졌다. 더욱 비극적인 일은 이들 중국기업계의 "플러스자산" 이제는 "마이너스자산"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젠리바오를 넘겨받은 장하이는 어떻게 되었는가? 2005년 3월, 장하이는 허위장부, 허위출자, 분식회계(허위재고, 허위판매)등의 방식으로 젠리바오 자금을 횡령, 유용, 이전, 침탈했다. 나중에 젠리바오집단에 고발당하여, 직무침점죄 및 자금유용죄로 10년형을 받았다. 2011년 2월 두번의 감형후 출옥한다.

 

리징웨이 선생은 떠났다. 그의 죽음과 계속된 비극이 제도에서 약간의 진보를 가져오게 되기를 희망한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지 않는 경우가 덜 발생하게 하고, 사기꾼이 시장을 종횡하는 공간이 더욱 좁아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