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광주일보
선진양한(先秦兩漢)은 중국역사상 취업기회가 가장 많았던 시기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바로 중국의 여러가지 제도가 창립되고 성장한 시기이기 대문이다. 새로운 업무가 계속하여 나왔고, 인재들이 출현하는데 광활한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외교를 잘 하는 자, 전투를 잘 하는 자도 있고, 절역(絶域)을 여행한 사람도 있어서 조정에서 모두 모아서 대량의 인재를 기용한다. 영재들이 없을까봐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일 그 시대에 운이 나쁘게 비인기학문을 공부하고 전투나 외교는 물론이고 닭을 죽이는 것도 너무 피비린내난다고 여긴다면 어떻게 그 시대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진한시기의 학자 숙손통은 바로 그러한 경우의 좋은 사례를 제공해준다.
춘추전국시대에서 진한시대까지, 유가를 전공한 사람들은 비교적 냉대를 받은 시기이다. 공자는 성인이다. 그러나 성인이 회계사라이센스는 아니다. 취업,창업과는 관계가 없다. 그는 열국을 이리저리 오가면서, 마음에 맞는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오기와 이사는 일류 경영자이다. 그들이 스승은 일찌기 유가의 대가인 증신(曾申)과 순자(荀子)이다. 다만 오기와 이사는 시장에 적응하기 위하여 유가색채를 약화시키고, 심지어 이사는 법가인물로 알려져 있다.
각 대제후국에서 경영을 맡을 때는 그의 실적이 수치화되어 있다. 몇 개의 성을 빼앗았는지, 몇 개의 수급을 베었는지 모조리 평가범위에 들어간다. 유가전공이 중시하는 것은 천천히 갈고 닦는 것이다. 공자는 교화를 중시했고, 교화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면, 요리도 식는다 누가 기다려 주겠는가. 어떤 제후국은 아마도 그 중간에 멸망해버릴 지도 모른다. 단기간내에 사업을 활발하게 만들 수 없으므로, 유가는 그 시대에 비인기 학문이었다는게 이상할 것도 없다.
이런 유가전공의 교수가 있었다. 이름은 숙손통이다. 그이 스승은 공자의 후예인 공부(孔鲋)이다. 스승과 제는 오랫동안 찬밥신세였다. 공부는 스스로 자신이 전수하는 학문이 비인기종목이라는 것을 알아서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쓸데없는 학문을 하고 있다." 아마도 비인기종목이어서 살아가는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숙손통에게 말한다. "너는 가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라." 학문을 하는 것은 일자리를 찾기 위한 게 아니다. 다만, 학문을 하는 살마도 일자리는 있어야 한다. 그래서 숙손통은 먼저 진나라로 가서 직업을 도모한다: 대조박사(待詔博士). 진시황이 갱유를 하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학자들에게 업무기회도 부여했다. 전설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그가 갱(坑)한 것은 주로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던 좌도방문의 술사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승, 오광이 난을 일으킨다. 공부도 집을 떠나서 진나라를 전복시키는 사업에 투신한다. 그러다가 목숨을 잃는다. 은사가 이미 죽었고, 일문의 학문을 흥성시킬 임무는 숙손통의 어깨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 시대의 숙손통은 "유가"을 진흥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자신을 '진작'시키는 것도 힘들었다. 밥그릇과 목숨을 위하여 부득이 주공의 앞에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했다. 진승 오광의 난때 소식이 함양에 전해진다. 주공인 진이세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어떡해야 좋은가?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 빨리 병력을 모아서 진압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공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이 사실인가 어떤 때는 사실상 듣기 거북한 말이다.
진이세는 다음으로 숙손통에게 묻는다. 숙손통은 매끄러운 인물이었다: 별 것아닙니다. 한 무리의 도적일 뿐입니다. 몇 개 지방에서 금방 해결할 치안사건에 불과합니다. 황상께서 급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은 듣기 좋았다. 진이세는 기뻐하며 그를 '박사'로 삼는다. 그리고 돈도 하사한다: 20필의 비단과 1벌의 옷
주공이 기뻐하지만,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숙손통 교수는 학생들이 공격을 받는다; 선생님, 어찌하여 아부하는 무리가 되었습니까. "선생은 어찌 아부의 말을 합니까?" 숙손통은 땀을 줄줄 흘리면서 해명한다: 미안하다. 여러분. 선생이 여러분의 체면을 상하게 했다. 그러나 스승도 호랑이 아가리에서 겨우 목숨을 구해서 살아돌아온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달라. "나는 거의 호랑이 입에서 도망친 것이다."
생명은 정말 귀하고, 애정의 가격은 더욱 높다....이 말을 누가 했는가? 어느 정도 실질에 맞지 않는다. 생명이 가장 고귀한 것이다. 주공이 엉망이고, 회사가 엉망이면, 자신이 거기에 얽힐 필요가 없다. 청산이 남아 있는 한 땔감을 걱정할 것인가. 학자도 생존의 지혜는 있어야 한다. 숙손통은 그날 밤에 짐을 싸서, 진나라를 떠나고, 다른 주인을 찾아나선다.
숙손통이 함양을 떠난 후, 전후로 여러번 주공을 바꾼다. 먼저 항량의 아래에서 일한다. 항량이 죽자, 초회왕의 밑에서 일한다. 초회왕이 떠난 후 항우의 밑에서 일한다. 여러번 회사를 바꾸면서 결국 안정된 직장을 가진다: 유방의 부하가 된 것이다.
유방은 인재를 아꼈다. 그러나 유학자는 좋아하지 않았다. 주공은 유생의 모자에 자주 오줌을 누곤 했다. 당시에 유가는 냉대를 받은 정도가 아니라, 모욕을 받았다. 숙손통과 동시대의 역이기는 유방을 보러 갈 때 면접 전에 소개인에게 부탁한다: 내가 유생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를 그냥 '광생(狂生)'이라고 소개시켜 주십시오.
숙손통은 주공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부득이 역이기를 배운다.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미지를 바꾸는 가장 좋은 수단은 옷을 바꾸는 것이다. 유생의 장수관포는 한나라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옷이었다. 그래서 숙손통은 청량상쾌한 초나라풍격의 짧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렇게 고치자 효과가 과연 좋았다: "한왕이 좋아한다" 주군이 좋아하자, 이제는 일을 시작할 때이다. 숙손통이 이렇게 짧은 의복을 입을 때, 이 옷은 자신의 심미관과 전혀 맞지 않았다.
발전의 안목으로 보자면, 어느 학문이든 항상 비인기인 것은 아니다. 학과와 전공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은 인류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인기는 일시적인 상태일 뿐이다. 시기가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도 시기를 기다린다.
다만 숙손통은 지나치게 냉정한 행동으로 후세인들에게 지나치게 냉막하다는 오해를 받는다. 초한전쟁때, 숙손통은 한나라에서 일을 했는데, 여러번 인재를 추천하지만 자신의 제자는 추천하지 않았다. 항상 계명구도의 무리들을 추천했다. 이것은 제자들의 불만을 산다. 그래서 스승에게 왜 내부 사람을 버려두고 외부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느냐고 말한다. 숙손통은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여러분, 전투에서 앞장서서 싸우는 것은 여러분의 장점이 아니다. 좀 더 기다려라. 나는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다.
취업과 창업은 기다린다고 하여 되는 것은 아니다. 계획을 해야 한다. 즉 전공과 사회의 최대공약수를 계획해 내야 한다. 혹은 전공과 업종을 교차시켜야 한다. 이 공약수와 교차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바로 사회의 수요와 당신의 전공이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이다. 이후에 사회의 수요에 따라 자신의 전공을 바꾸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숙손통은 당시의 사회수요를 이렇게 파악한다: 한나라초기의 공신은 주인과 직원의 구분개념이 아니다. 공신들은 술만 마시면 자신의 공로를 다투고, 검을 뽑아서 기둥을 치곤 한다. 유방으로서는 황제가 되었다는 성취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당시 사회는 급하게 예의범절을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숙손통의 전공이 바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유가는 바로 예의를 가장 중시하니까.
이어진 일은 바로 실제수요에 맞추어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유방은 이 예의제작의 과제를 숙손통에게 맡긴다. 그러면서 약간의 의심스러워하며 묻는다: "해내는데 어렵지 않겠지?" 숙손통은 "문제없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라고 답한다.
숙손통은 예의의 발원지 노(魯)의 땅에서 30여명의 유학자를 모은다. 그리고 자신의 백여명의 제자를 끌어모은다. 이렇게 전문가팀을 만즐어 자신의 전공학과에 대하여 개조하고 간화시킨다. 이렇게 하여 간소한 유가의 예의를 정리한다. 이는 유가예의의 보급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식으로 내놓기 전에, 그는 로드쇼를 한다. 특별히 유방을 모셔서 그의 생각을 파악한다. 유방이 긍정적으로 평가하자, 기원전200년 한나라궁정에서는 대규모 연습이 벌어진다.
결과는 어떠한가? 유방의 한마디 말로 알 수 있다. "나는 오늘에서야 황제가 귀한줄 알았다." 성공적으로 예의를 한나라의 각 계층이 명확히 구분되게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숙손통의 전공과 한나라초기의 사회간의 최대공약수이자 교차점이다. 제품이 성공하면, 프로젝트팀의 구성원들도 당연히 이로 인한 정치경제적 이익을 나눠갖는다. 숙손통은 사람됨이 공정하여, 주군인 유방에게 프로젝트팀의 전체인원을 추천한다: "이들은 나를 따라 몇년간 고생했습니다. 일자리를 마련해주십시오." 과연 유방은 그들에게 만족할만한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이뿐아니라, 숙손통은 한나라에서 하사받은 돈을 모조리 프로젝트팀의 전문가와 제자들에게 나눠준다.
숙솥농이 현실과 전통 사이에서 타협한 것에 대하여 사마광은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그는 숙손통이 한 무더기의 쓰레기를 가지고 시대의 '총애를 받은 것'이며 이로 인하여 진정한 유가의 예의는 실종되었다고 보았다.
기실, 문화는 생존자본과 다르다. 그러나 문화를 전파하는 것은 생존자본이 필요하다. 생존의 압력과 발전의 필요 앞에서, 손안의 문화상품을 빵과 직위로 바꿀 것인가 아니면 박물관 안에 남아있을 것인가. 양자의 선택에 대하여 정확한 답변은 없다. 아마도 우리의 문화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 서로 다른 사명을 부여한다. 어떤 사람의 사명은 보존이고, 어떤 사람의 사명은 개조와 보급이다. 아마도 보극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화가 생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화보존자에 약간의 경의를 표해야 한다; 문화를 보급하는 사람을 약간의 이해를 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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