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공수(龔遂)의 "군중관(群衆觀)"

중은우시 2013. 12. 1. 03:02

글: 독서삼매(讀書三昧)

 

한선제(漢宣帝) 초기, 발해 부근의 군현에는 재난이 있었다. 배고픈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태수가 그들을 진압하지 못했다. 한선제는 능력있는 사람을 임용하여 보내어 다스리게 하고자 했다.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공수를 임용한다. 공수는 발해군으로 부임하기 전에, 한선제와 이런 말을 나눈다. 대화내용은 <한서.공수전>에 있으며 다음과 같다:

 

한선제: 발해의 반란을 짐은 매우 우려하고 있다. 그대가 어떻게 그 도적을 평정하여 짐의 뜻에 걸맞게 할 것인가?

공수: 발해는 먼 곳에 있어 성화(聖化)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백성은 굶주림과 추위를 겪고 관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폐하의 적자(赤子)가 도적이 되어 폐하의 군대를 황지에서 가지고 놀았습니다. 지금 신으로 하여금 그들을 이기고 안정시키겠다는 것입니까.

한선제: 현양(賢良)을 기용하는 것은 안정시키고자 함이다.

공수: 신이 듣기로 난민을 다스리는 것은 난승(亂繩, 얽힌 밧줄)을 다스리는 것과 같이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오로지 늦춘 다음에 다스릴 수 있습니다. 신이 원컨대, 승상, 어사가 신을 문법으로 구속하지 마시고, 모든 것을 제가 임의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말은 마음의 소리이다. 한 관리가 어떤 입장에 서느냐를 보면 그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왜 사람은 말을 하는가? 어떤 말을 하는가는 자연히 다를 수 있다. 발해군에서 반란을 일으킨 배고픈 백성을 한선제는 "도적"이라고 불렀다. 즉, 한선제가 보기에, 발해군의 문제는 아무런 의심없이 "적아모순(敵我矛盾)"이다. 공수는 한선제의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이들 소위 '도적'이 기실 한선제의 적자(赤子)라고 부른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두 가지 원인 때문이다: 하나는 발해군이 바닷가에 있어 조정에서 멀고, 교화가 마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곳의 백성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지방관리는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부득이한 점이 있다. 그 말에 숨은 뜻은 발해문제는 '인민내부모순'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을 '도적'으로 여기든 '이기든(진압하든)' 그들은 '적자'라는 것이고, '안정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필자의 견해이다. 개인적인 의견이다. 도대체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는 황상의 뜻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보라 분석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다. 권하는 태도는 간절하면서도 완곡하다. 한 마디로 한선제의 우려를 해소시킨다. 평화적으로 발해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함부로 죽이지 않고,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안정시키고', "늦추는 것'은 정확한 선택이다. 중국역대왕조를 살펴보면, 어느 왕조의 백성이 안거낙업(安居樂業)하고 싶지 않겠는가? 마누라 자식과 따스한 방안에서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싶지 않겠는가? 공수는 감히 정면으로 '성의'에 어긋나는 말을 한다. 비록 함축적으로 표현했지만, 용감하게 백성들의 죄책을 벗겨준 것이다. 결국, 그는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을 알았고, 백성들의 바램을 이해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백성이 들어 있었고, 백성을 위하여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수는 어떻게 '안정시켰을까' 그는 두 가지 구체적인 조치를 취한다:

 

첫째는 혼자 앞으로 나아가 성의로 백성들의 마음을 다독인다. 배고픈 백성의 반란은 "관성적인 사고"에 따르면, 토벌, 체포 진압하는 것이 자연그러운 '통상적인 대응방법"이다. 공수의 전임태수는 이렇게 했다. 다만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도적을 소멸시키지 못했을 뿐아니라, '도적'이 오히려 늘어나게 되었다. 안정유지를 달성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사회갈등을 심화시킨 것이다. 중국역대왕조에서 '이인위본(以人爲本)'을 소리높여 외치는 각급 의사결정자들은 많았다. 다만 진정으로 백성을 사람으로 보고, 그들의 권익에 실질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 진저으로 그들의 존엄을 보호해준 사람은 아주 적다. 그들의 눈에, 백성은 '초민(草民)'이다. 가볍고 천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공수는 혼자서 앞으로 나아갔고, 발해군에 도착하자, '도적'은 모조리 흩어진다; 원인은 다른 것이 없다. '도적'도 사람이다. 공수는 그들을 사람으로 봐주었다. 그들의 존엄을 보호해 주었다. 명나라때의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은 이런 말을 남겼다: "파산중적이(破山中賊易), 파심중적난(破心中賊難)"(산 속의 도적을 없애는 것은 쉬우나, 마음 속의 도적을 없애는 것은 어렵다). 공수는 바로 자신의 성의로 이들 소위 '도적'들의 '마음 속의 적'을 깨트린 것이다.

 

둘째는 근검절약을 실행하고, 농업과 잠업을 발전시켜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만일 '도적'을 해산시키는 것이 "치표(治標)"라면, 농업,잠업을 발전시켜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한 것은 "치본(治本)"이다. 발해군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공수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방식을 견지한다. 당시 발해군은 풍속이 사치스러워서 백성들이 공상업을 중시하고 농업을 경시했다. 공수는 앞장서서 근검절약을 실행하고, 현지백성들에게 농업과 잠업에 힘쓰도록 권한다. 모든 사람이 한 그루의 유수(楡樹, 느릅나무), 1백주의 마늘, 오십주의 파, 오십무의 미나리를 심도록 했다; 집집마다 두 마리의 암퇘지, 5마리의 닭을 기르게 했다. 백성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팔아서 소를 사도록 했다. 이때는 아주 유머스럽게 말한다: "왜 소와 송아지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가?" 봄여름 두 계절에 백성들이 논밭으로 가서 경작하도록 권했고, 가을이 되면 백성들이 수확하도록 권했다. 그리하여 집집마다 과실, 야채등이 넉넉하게 있게 된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것. 즉 한 그루의 나무, 몇 마리의 닭등등은 보기에 번잡하지만, 이것은 공수가 풍속을 바꾸려는 단단한 결심 및 민생을 개선하련느 실질적인 노력을 보여준다.

 

공수는 발해군수로 몇년간이나 있었는지, <한서>에 상세한 기록은 없다. 그저 개괄적으로 "수년"이라고 했을 뿐이다. 이 수년의 시간동안, 사회동란, 민불요생(民不聊生)의 발해군은 대단한 변화를 겪는다. 심지어 질적인 변화라고도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한서.공수전>에는 이런 두 마디가 전해진다:

 

도적은 모조리 평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자신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발해군내에는 모두 저축이 있었다. 백성과 관리가 모두 부유했고, 소송이 그쳤다.

 

즉, '치표'이건 '치본'이건 모두 풍성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발해군의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도록 견실한 기초를 닦은 것이다. 이런 말은 아주 재미있다: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 다만 좋은 결과는 무엇으로 실현할 수 있는가? 공수가 발해군을 다스린 실천은 말해준다. 어떤 군중관을 가지느냐가 어떤 방식으로 군중업무를 어떤 태도와 방법으로 수행하는지를 말해준다. 공수는 수년간의 공으로 아주 잘 한선제에게 말했던, "신이 듣기로 난민을 다스리는 것은 난승(亂繩, 얽힌 밧줄)을 다스리는 것과 같이 서둘러서는 안됩니다. 오로지 늦춘 다음에 다스릴 수 있습니다."를 실청했다. 무엇에 의존해서 해낸 것인가. 의존한 것은 아마도 아주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승상, 어사가 신을 문법으로 구속하지 마시고, 모든 것을 제가 임의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었다. 즉, 지도자와 관련부서의 이해, 협조와 지지를 구한 것이다. 다만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의존한 것은 역시 이런 "군중관"이다. 표면적인 것을 보지 않고, 단기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정치업적공정을 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고려하여 시행하였고(量力而行), 실사구시했으며, 절실하게 백성들을 위하여 생각했고, 백성들을 위하여 일했으며,  백성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공수의 이런 "군중관"은 널리 칭송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