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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기업가

손춘양(孫春陽): 중국인의 상업지혜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오구(吳鉤) 

 

이전에 미국의 한학자 고가룡(高家龍) 선생의 <대기업과 관계망>이라는 저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안에는 청말과 민국시기의 중국내 6개의 서방기업, 일본기업 및 화상기업의 상업발전모델을 얘기하고 있다. 그것은 각각 모빌(Mobil)석유회사, BAT(British American Tabacco), 미쓰이(三井)물산주식회사, 나이가이면(內外綿)주식회사, 신신사창(申新紗廠), 대중화(大中華)성냥회사. 이 여섯 개 기업의 이후 운명은 각각 다르다. 모빌, BAT와 미쓰이는 지금까지오 여전히 세계에서 유명한 대기업이다; 중국의 신신사창, 대중화성냥회사는 민간기업으로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모빌, BAT와 미쓰이는 모두 19세기하반기 혹은 20세기 초반에 창업하였고. 지금까지 100년여밖에 되지 않았지만, 장수기업이라 할 만하다. 2006년 후룬(胡潤)은 "전세계최장수가족기업랭킹"을 발표한 바 있는데,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일본 오사카의 사묘건축기업인 콘고구미(金剛組)로, 14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랭킹에서, 중국기업은 하나도 들어가지 못했다. 한 가족기업을 연구한 미국학자에 따르면, 유럽, 미국 및 남미의 각종 기업에 대하여 10여년간 분류연구를 한 바에 따르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가족기업의 실적이 비가족기업보다 좋고, 수명도 더욱 길다." 그러나 이 결론은 중국의 가족기업에는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2011년 전국공상련이 공표한 <중국가족기업발전보고>에 따르면, 중국가족기업의 경영연한은 평균 8.8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만일 중국인의 기업조직의 상업경험과 민족습관으로 보아, 100년기업을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필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사실상, 만일 우리가 중국의 상업사를 연구해보면, 수백년간 전승되어온 전통기업이 드물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쑤저우의 손춘양(孫春陽)남화포(南貨鋪)가 있다. 여러명의 청나라때 미식가들은 모두 이 저명한 전통점포를 언급했다. 원목(袁牧)은 <수원식단>에서 "쑤저우 손춘양가에는 염(鹽), 첨(甛)의 두 가지가 있는데, '염'한 것이 좋다."라고 하였고, 김안청(金安淸)의 <수창춘예>에는 "화퇴(火腿, 햄)은 금화(金華)가 최고이다. 그러나 쑤저우 손춘양의 차퇴(茶腿)가 더욱 낫다." 양장거의 <낭적속담>에는 "경성의 사람들은 음식을 따지는데, 쑤저우 손춘양의 소채를 정품으로 추천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청나라때의 요리서인 <조정집>에도 이런 기술이 있다. "훈어(薰魚)는 쑤저우 손춘양가에서 나오는데, 새것일수록 좋다."

 

"손춘양가"는 바로 당시 쑤저우성에서 가장 유명한 백화점(지금으로 따지면 수퍼마켓)이다. 그 창시자는 손춘양이며, 명나라 만력연간에 생활했다. 즉, 청나라 미식가인 원목이 손춘양 남화포에서 파는 '염동순홍편'에 탄복하였을 대, 이 '수퍼마켓'은 이미 200년간 생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명청의 교체기 및 왕조교체를 겪으면서, '작은 점포'에서 '천하에 이름을 떨치며, 점포의 물건을 황실이 납품하는" 대형 브랜드로 성장하였다.

 

손씨집안이 가족기업을 이렇게 긴 기간동안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건립한 완벽한 기업제도에 있었다. 청나때 사람인 전빙의 <이원총화>에는 이런 기술이 있다. 손춘양 남화포는 "주,현의 관아와 같이 육방(六房)이 있는데, 납북화방, 해화방, 엄랍방, 장화방, 밀선방, 납촉방이 있다. 판매하는 사람은 판매대에 돈을 주면 포를 받아서, 스스로 각 방으로 가서 물건을 받는다. 총관리하는 사람이 이를 장악하여, 하루에 작게 결산하고, 일년에 크게 결산한다. 명나라때부터 지금(청)까지 이백삼십사년이 되었으며, 자손들이 그 번 돈으로 먹고 산다. 다른 성의 사람이 대체한 적이 없다." <낭적속담>에도 손춘양남화포는 "점포의 규칙이 엄격하고, 선별과 제조가 정교하여, 일찌기 없던 것들이다." 이런 기록을 보면, 손춘양남화포는 종류별로 나누어 파는 형식을 취했고, 아주 엄격한 재무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품질감독절차가 명확했다.

 

중국가족기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습관적으로 중국인들은 재산상속에서 보편적으로 "제자균분제(諸子均分制)"를 취하여 중국가족기업이 장기간 유지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산업이 2대 3대를 내려가면 서로 잘게 쪼개진다는 것이다. 일본의 '장자상속제'는 재산이 대대로 축적되는데 유리했다. 이를 통하여 가족기업의 해체를 막을 수 있었다. 이런 분석은 사실 중국고인들의 상업지혜를 무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왜 "제자균분제"를 택한 "손춘양"등 전통점포들이 수백년간 이어져 내려왔는지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제자균분제"의 결함은 기업가정신이 풍부한 중국전통상인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예를 들어, 청나라때 휘상(徽商) 호천주(胡天注)가 창업한 "호개문(胡開文)" 먹집(墨店)은 그가 죽은 후 가산을 8주로 나누어 각각 8명의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이것은 '제자균분제'이다. 그러나, 동시에 호천주는 호개묵 먹집은 한 아들이 경영하도록 하였다. 이는 '분가불분점(分家不分店)'이다. 소유권을 지분으로 나누어 여러 아들로 갈라놓았지만, 경영권은 그중 한 명에게 넘겼다. 이것이 바로 '호개묵'먹집이 200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손춘양남화포의 가업승계도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자손들이 그 이익으로 먹고 살았다"는 기록이 남은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 명성이 높은 '손춘양'이 최종적으로 태평천국의 전화에 멸망한다는 것이다. 중국상인에 있어서, 최대의 비극은 바로, 그들의 기업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흥성하고 멸망한 것이 아니라, 정치국세에 따라서 재편되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