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염(趙炎)
553년의 가을날, 후량(後梁)의 수도인 강릉(江陵, 지금의 호북성 형주)의 대로에는 도처에 쇠잔한 낙엽이 쌓여 있었다. 몇몇 내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마차를 하나 끌고 나타났다. 마차위에는 물기에 젖어 있는 여자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그들은 시중(侍中)인 서곤(徐緄)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마차위의 시신은 누구인가? 왜 마차를 끄는 사람이 모두 궁정의 내시인가? 죽은 자를 잘 대접해주던 전통사회에서 왜 그녀를 적시에 매장해주지 않았을까? 이야기하자면 이 죽은 사람은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그녀는 바로 "서낭반로, 풍운유존"이라는 고사의 여주인공이며, 정사에 그 이름이 남아있는 유명한 여장부 서소패이다. 또한 망처이혼안(亡妻離婚岸, 죽은 처와 이혼한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도대체 어떤 원한이 있기에, 남편으로 하여금 결발지정(結髮之情)도 잊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어떤 원독이 있어서 한 남자로 하여금 이처럼 악독하게 이미 죽어버린 약한 여인을 대하게 만들었을까?
서소패의 남편은 소역(蕭繹)이다.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의 일곱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눈 하나를 다쳐서 멀었다. 이런 생리상의 결함은 그로 하여금 무거운 심리적 부담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래서 외눈때문에 다른 사람을 종종 시기하곤 했고, 다른 사람들과 불쾌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 서소패도 명문규수이다. 비록 용모가 아주 예쁘지는 않았지만, 오관단정하고 개성이 있는 여인이었다. 황실로 시집간 후, 처음에는 남편의 외눈을 싫어하지 않았다.
소역은 문학청년이었다. 그의 마음은 여자에게 있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글을 읽고 글을 쓰고 학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2,3년만에 서소패와 잠자리를 한번 같이한다. 서소패가 1남1녀를 낳은 후, 더이상 그녀를 찾지 않는다. 부부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다. 서소패는 규방에서 외로웠고, 자연히 원망이 많이 쌓이게 되어 보복할 기회를 찾게 된다. 그래서 "반면장(半面粧, 얼굴 반쪽만 화장하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남편이 외눈인 것츨 조롱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소역은 원래 마음에 병이 있는 자이다. 이런 우스개를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반면장)을 보고는 대노하며 나가버렸다." 몇번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는 더 이상 서소패를 찾아가지 않게 되고, 부부관계는 유명무실해진다.
후경(侯景)의 난때, 소역은 기회를 틈타 거병하여 후경을 격패시킨다. 그리고 강릉에서 황제에 오른다. 역사상 양원제(梁元帝)라 칭하게 된다. 연호는 승성(承聖)으로 고친다. 서소패도 황비(皇妃)로 승격된다. 지위가 올라가니 담량도 커진다. 항상 기회를 보아 우울함을 풀곤 했다. 그녀는 먼저 요광사(瑤光寺)의 대화상 이지원(李智遠)과 사통한다. 나중에 양원제의 수종관(隨從官) 기계강(暨季江)은 영준하고 멋있었다. 그래서 자주 사적으로 기계강을 불러서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곤 했다.
기계강은 말이 많은 자였다. 사람들과 만나면 널리 광고하고 다녔다: "자직(柘直)의 개는 비록 늙었지만, 여전히 사냥을 할 줄 알고; 소율양(蘇溧陽)의 말은 비록 늙었지만 여전히 웅준하다; 서낭은 비록 늙었지만 아직도 정이 많다." 이것은 서소패를 말이나 개에 비유한 것이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소리다. 이것이 바로 "서낭반로, 풍운유존"의 출처이다. 항간의 소문은 널리 퍼져갔지만, 기이하게도 양원제만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몰랐을까? 아니다. 그는 기회를 기다린 것이다. 만일 부인이 바람을 피워서 처를 죽였다고 한다면 체면이 뭐가 될 것인가? 만일 다른 죄명을 찾아서 죽여버린다면, 그건 상관이 없다.
시간이라는 것은 여자의 가슴골과 같다. 모으기만 하면 생겨난다. 기회는 여성의 지스팟과 같다. 인내심을 가지고 찾으면 언젠가 찾을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과 기회가 만났다.
소역의 애비 왕씨가 아이를 낳자마자 돌연 죽는다. 그래서, 소역은 이 여인이 서소패에게 독살당했다는 핑계를 대고 서소패에게 자살을 명한다. 임금이 죽으라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다. 서소패는 어절 수 없이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관례에 따르면, 황비가 죽었을 때 죄가 있든 없든 장지를 찾아서 매장해주어야 한다. 시신을 황야에 버려둘 수는 없다. 죽은 자를 잘 대접하는 것은 살아있을 때 아무리 큰 잘못이 있더라도, 죽고 나면 따질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녀의 죄는 극악무도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양원제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는 아직 화가 덜 풀린 것이다. 알 수 없는 노화가 가슴 속에서 끓어 올랐다.
그후, 그는 아주 특이한 일을 벌인다. 사람을 시켜 서소패의 시신을 우물에서 건져올리게 한 후, 후비의 예로 안장하지 않고, 직접 서소패의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즉 이 글의 첫머리에 언급한 장면이 그것이다. 그 의미는 바로 휴처(休妻)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하자면 이혼이다. 죽은 사람을 버리다니 이것은 아마도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일 것이다. 아마도 양원제같은 자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렇게 되니 서소패는 참담해진다. 친정으로 돌아가서 다시 매장되었는데, 묘비에는 뭐라고 쓸 것인가? 그녀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된다. 이것이 끝은 아니다. 어디에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화가 남아있었는지 소역은 <탕부추사부(蕩婦秋思賦)>라는 글을 써서 서비의 추악한 일을 까발린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탕지지별십년(蕩子之別十年), 창부지거자련(倡婦之居自憐)", "상사상망(相思相望), 노원여하(路遠如何)! 빈표봉이점란(鬢飄蓬而漸亂), 심회수이전탄(心懷愁而轉嘆), 수영취미렴(愁縈翠眉斂), 제다홍분만(啼多紅粉漫)" 아...왜 죽은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하는가?
망처 서소패와 이혼한 후, 양원제의 좋은 시절도 끝이 난다. 다음 해, 즉 554년 십일월, 강릉성은 서위(西魏)의 우문태(宇文泰)에게 함락되고, 소역도 포로로 잡혀 죽는다. 성이 함락되기 전에, 그는 장서 14만권을 불태워버린다. 역사상 진시황의 분서갱유보다 더욱 참혹한 문화파괴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글을 너무 많이 읽어서 오늘날의 화를 불러왔다"고 말하면서, 이런 자이니 죽은 처에게 그렇게 대한 것도 이해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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