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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남제(南齊): 일년삼제삼연호(一年三帝三年號)

by 중은우시 2013. 9. 14.

글: 악망(樂

 

연호(年號)는 중국봉건제도의 일대 '발명'이다.고대황제가 기년(紀年)에 쓴 전용명칭이다; 제왕의 정통을 나타내며, 서한(西漢)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이 창시한 이래 역대제왕이 즉위하면 일반적으로 연호를 만들었다. 원세개(袁世凱)가 황제제도를 복벽한 후, "홍헌(洪憲)"이라는 연호는 마지막이면서 가장 단명한 제왕연호였다. 다른 황제는 서로 다른 연호를 쓴다. 일반적으로 다른 황제의 연호는 스지 않는다. 왕조가 바뀌면, 즉시 연호를 바꾼다. 이를 개원(改元)이라 한다; 하나의 왕조내에서 황제가 바뀌면, 원래 황제의 연호는 연말까지 계속 쓴다, 다음해 초부터 신황제의 연호로 고쳐쓴다. 예를 들어, 원평원년(기원전74년), 서한의 한소제가 붕어한다. 먼저 유하(劉賀, 역사에서 漢廢帝라 부름)가 즉위한다. 27일후 연호를 정하기도 전에 폐위되고, 다시 유순(劉詢, 즉 漢宣帝)가 황제로 즉위하며, 다음해에 연호를 "본시(本始)"로 고친다. "원평"은 한소제의 3번째 연호였다. 명청시기 이전에, 한 황제는 왕왕 몇 개의 연호를 갖는다. 사상 연호가 가장 많은 황제는 "무조성신황제(武朝聖神皇帝)" 즉 무측천이다. 모두 18개의 연호를 가졌다(21년간 재위했으며, 태후의 명의로 임조칭제한 6년도 포함한다),그중 성력3년(700년)에서 장안원년(701년)의 1년동안 3번이나 연호를 바꾼다. 성력(聖曆), 구시(久視), 대족(大足), 장안(長安). 명청시기에 역대제왕의 연호는 대부분 단지 1개였다(명영종은 두번 재위하여 제외함). 이렇게 하여 연호가 너무 많아서 기년에 혼란이 오는 폐해를 막았다.

 

다만, 당조황제가 교체될 대, 즉시 개원(연호를 고치는)하는 현상도 많지는 않지만 존재했다. 예를 들어, 976년 10월, 송태조가 급사하고, 송태종이 즉위한다. 즉시 개보9년을 태평흥국원년으로 바꾼다(사학자들은 '촉영부성'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한 왕조가 1년내에 3번 황제를 바꾸는 일도 적지 않다(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한소제 붕어후, 유하, 유순이 이어서 즉위한 경우등), 다만 그 해에 연속하여 연호를 바꾸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오늘, 남북조시대 남제에서 발생한 "일년삼제삼연호"의 황당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렇게 된 연유는 깊이 음미할 만하다.

 

남북조시기(420-589)는 왕조교체가 빈번했다. 남조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4개의 한족이 건립한 정권을 거쳤고, 북조는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의 5개 선비족 혹은 선비화된 한족이 건립한 정권이 있었다. 강산을 차지한 황제는 하나가 지나가면 하나가 나타났고, 주마간산격으로 바뀌었다. 다만 이들 황제들(특히 황2대, 황3대)는 거의 모두 강산사직에는 신경쓰지 않고, 인생을 즐기고 놀 궁리만 했다. 그들은 천하의 재물을 모아서 호화사치스럽고, 황음무도하게 생활했다. 남제의 제3대황제인 울림왕(鬱林王) 소소업(蕭昭業)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소소업(473-494)은 자가 원상(元尙)이며, 제무제(齊武帝) 소적(蕭賾, 440-493)의 손자이다. 소소업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다웠으며, 풍모가 뛰어났다.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행동거지가 우아했다. 그리고 글씨도 잘 썼는데, 특히 예서를 잘 써서 천하에 독보적이었다. 그러므로, 조정신하들의 찬사를 들었다. 조부와 부친의 편애를 받았다. 제무제 소색이 즉위하자, 소소업은 남군왕이 되어 식읍 2천호를 받는다. 당시 나이 10살이었다. 부친 문혜태자(文慧太子) 소장무(蕭長懋)가 사망하였으므로 영명11년(493년) 제무제에 의하여 황태손(皇太孫)에 봉해진다. 그해 칠월 무인(戊寅)일 제무제가 병사한다. 유조에 따라 황태손이 즉위한다. 연호는 융창(隆昌)으로 고친다. 동시에 소장무의 동모제(同母弟)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과 종실인 서창후(西昌侯) 소란(蕭鸞)이 보정(輔政)한다.

 

다만 소소업은 성격이 놀기를 좋아하고 시정에서 돌아다니기를 즐기며 닭싸움을 구경하기 좋아했다. 그의 이러한 경박하고 가식적인 행동은 조부인 제무제는 속일 수 있었다. 제무제가 붕어할 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장기를 살려, 대성통곡을 하며 혼절까지 했다. 그러나 장례수레가 단문을 나서기도 전에 그는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묘지까지 가지 않고 궁안으로 돌아와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서모(庶母)인 곽씨(霍氏)와 밤낮으로 놀아난다. 그리고 제무제의 후궁비빈가기들을 모조리 자신이 차지하여, 음행을 벌인다. 그는 천하의 미색들을 모조리 차지했을 뿐아니라, 동성애까지 했다. 그래서 궁중의 분위기는 지저분해진다. 겨우 1년여간 재위했던 그는 "기분내키는대로 상을 하사하였고, 걸핏하면 백만 수십만이었다." 옥석보기도 마음대로 가져다가 이를 깨트리면서 즐거워했다. 일시에 국고에서 몇대에 걸쳐 축적한 수억의 은자가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황제가 이러하니, 황후인 하천영(何倩英)도 따라했다. "비(妃)로 있을 때 외인과 간통했다" 그녀는 후궁의 침실대문을 밤새도록 활짝 열어놓아서 사람들이 드나들기 편리하게 했다. 밤중에 후궁의 샛길에는 젊고 튼튼한 남자들이 계속 드나들었다. 음탕한 소리가 길거리에까지 들렸다.그중에 소소업의 시정놀이친구들까지 들어 있었다. "남군왕이 무뢰배들과 놀았는데, 비는 그중 잘 생긴 자를 골라서 모두 함께 즐겼다." 마징(馬澄), 양민지(楊民之)은 모두 소소업의 동성애친구이다. "나이도 어리고 잘 생겼다" 황후는 갖은 방법을 써서 이들을 손에 넣었다. 이리하여 이들은 소소업과 황후 모두의 애인이 된다. 다만 소소업은 하천영의 이런 음탕한 행위를 못본 척 해주었다. 아예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취급했다. 역사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하루는 조조(早朝)를 마치고, 소소업이 돌연 흥이 일어 황후의 침궁으로 간다. 하천영은 마침 양민지와 방사를 즐기고 있었다. 궁녀들은 마음이 조급해서 방문을 계속 두드렸지만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할수 없이 궁녀들은 목소리를 높여 '황상이 오십니다." 라고 소리쳤다. 그제서야 그들은 황급히 일어났다. 하천영은 한편으로 옷을 챙겨입으면서 한편으로 양민지를 그의 속옷과 함께 침상 밑으로 밀어넣었다. 그후에 나른한 표정을 지으면서 문을 열고 황상을 맞이했다. 소소업은 하천영의 치마와 비녀가 흐트러져 있고, 머리모양도 바르지 못하며, 숨을 가쁘게 내쉬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묻는다: "대낮에 문을 꼭 걸어잠그고, 혹시 외간남자라도 들인 것인가?" 하천영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면서 대답한다: "폐하는 정말 신인(神人)이십니다. 바로 조금 전에 꿈 속에 황상을 만나서 운우를 즐겼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마음이 통했는지 폐하께서 정말로 오셨습니다. 첩신은 아직도 즐거움이 다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애교를 덜자 소소업의 남성호르몬은 다시 분비되었다. 그는 음탕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하, 짐이 네가 꿈속에서 즐기는 것을 망쳐버렸구나. 그럼 지금 너에게 진짜 즐거움을 주어서 보상하겠다. 그러면 되겠느냐?" 그래서 하천영을 안고, 음락을 즐긴다. 침상 밑에 숨어있던 양민지는 침상위에서 리듬감있게 움직이는 것을 들으면서 그저 자기의 옷을 꼭 끌어안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하천영이 이처럼 대담하게 행동하고, 마음대로 군 것은 그녀가 성격상 음탕한 것을 제외하고, 소소업이 멍청하고 황당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다만, 하천영은 후궁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음탕한 기운이 넘치게 만들었으니, 자연히 예교와 황실의 위엄은 없어지게 된다. 모의천하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대신들은 세상의 풍기가 문란하다고 탄식하며 그녀에 대하여 불만, 반감과 역겨움을 가지게 된다.

 

권신 소란은 소소업의 숙부이다. 하황후와 양민지가 도를 넘어서는 것을 보자, 조야에서 말들이 많아 황실의 체면이 말이 ㅇ니게 되었다. 그래서 몇몇 대신과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양민지를 주살하도록 청한다. 양민지는 황후의 애인일 뿐아니라, 소소업의 애인이기도 했다.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대신들의 상소문을 그냥 눌러두고 만다.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리하여, 소란은 다시 보국장군 소심(蕭諶), 우장군 소탄지(蕭坦之) 두 사람을 궁중으로 보내어 극력 간언하게 한다. 여러 대신들도 함께 소소업에게 국사를 중시하고 천하창생을 생각해 양민지라는 황실의 암적인 존재를 처치해달라고 애절하게 권한다. 소소업은 체면을 크게 상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모른척 하고 있게 되면 대신들이 그를 멸시할 것으로 생각하여 '부득이하게 허락한다' 양민지를 사형에 처하는 칙령에 서명한다. 소소업이 다시 양민지의 면사령(免死令)을 내렸을 때는 이미 소란의 수하가 양민지를 처형해버린 다음이었다.

 

하천영은 자신이 아끼던 양민지가 피살되자, 곡을 하며 혼절한다. 그리고 먹는 것도 잊고, 소소업의 앞에서 밤낮으로 울며 호소한다. 그녀는 소란에 대하여 절치부심하며 원한을 품고, 소소업에게 베겟머리송사를 통하여 하루빨리 소란을 제거하도록 권한다. 소란은 유조로 보정이 된 후,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했고, 밤낮으로 일에 매진하였으며, 황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서 뛰어다녔다. 조정내에서는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강대한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양민지는 소소업이 아끼던 인물이다. 이것을 생각하자 그의 마음 속에는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소란을 제거할 수 있을지에 골몰하게 된다.

 

이때의 소란은 자신이 여러번 직간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충성심을 의심받는 상황에 이르자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하여 폐립을 도모하게 된다. 그는 먼저 전 진서자의참군 소연(蕭衍)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소소업의 곁에 비밀리에 자신의 눈과 귀를 심어 놓는다. 소소업의 일거일동, 일언일행을 그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소업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건무원년(494년) 7월 22일, 소란은 정변을 일으킨다. 이때의 소소업은 수창전에서 곽씨와 나신으로 앉아 있으면서 운우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병사들이 궁중으로 쳐들어가자, 소소업은 연신 물러나면서, 마지막에는 애희(愛姬) 서씨(徐氏)의 방까지 물러난다. 거기서 칼을 뽑아 자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파서 제대로 찌르지 않아 죽지는 않는다. 결국 소심이 한칼로 그를 죽여버린다. 일대의 황음한 황제는 이렇게 제왕생애를 마쳤다. 그후 소란은 태후의 명을 거짓으로 빌려서, 소소업의 황제존호를 폐지하고, 울림왕으로 끌어내리고, 친왕의 예의로 수안릉에 장사지낸다; 하천영의 황후 칭호도 폐지하고, 울림왕비로 강등시켰다. 얼마후 하천영도 죽여버린다.

 

7월 25일, 소란은 소소업의 동생이자 15살된 신안왕(新安王) 소소문(蕭昭文)(480-494)을 괴뢰황제에 올려 과도황제로 삼는다. 연호는 연흥(延興)으로 고친다. 소란은 대권을 장악한 후 나라를 빼앗고자 종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10월 10일, 소란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소소문을 핍박하여 그에게 양위하게 한다. 소소문을 황제에서 폐위시켜 해릉왕으로 앉힌다. 10월 22일, 소란은 당당하게 황제위에 오른다. 그리고 연호를 건무(建武)로 고친다. 11월, 소소문은 소란에게 피살되고 공왕(恭王)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영태원년(498년) 칠월 기유일, 소란이 병사하니 나이 47세였다. 시호는 명황제이고, 묘호는 고종이다. 4년후, 즉 남제 중흥2년(502년), 소란의 여덟째 아들인 제화제(齊和帝) 소실융(蕭室融)이 핍박을 받아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에게 선양한다. 이로써 남제는 멸망한다.

 

494년, 남제의 역사상 기괴한 '일년삼제삼연호"의 현상이 나타났다. 즉, 소소업의 융창원년(494년 정월에서 칠월), 소소문의 연흥원년(494년 칠월 - 십월) 그리고 소란의 건무원년. 이 모든 것은 소소업과 황후 하천영이 절제하지 않고 음탕함을 즐긴 결과이다. 그들이 붙인 욕망의 불꽃은 자신들을 불태웠다. 그리고 강산사직도 불태웠다. 결국 음란으로 몸과 명예를 잃었다. 남제는 나중의 '금수왕조' 북제(北齊)에 비견할 만하다. 역사를 공부하며 이 시기를 읽을 때면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후세인들이 경계로 삼아야 할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