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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북제(北齊): 금수왕조

by 중은우시 2013. 9. 14.

글: 악망(樂奀) 

 

1. 역사상의 북제정권

 

남북조(420-589)는 중국역사상의 분열시기이다. 유유(劉裕)가 동진(東晋)을 멸하고 황위를 찬탈하여 남조 송(宋)을 건립할 때로부터, 소나라가 남조 진(陳)을 멸할 때까지, 남조는 송, 제, 양, 진의 4왕조를 지난다. 모두 한족이 건립한 정권이다. 북조(439-589)는 북위, 동위, 서위, 북제와 북주의 5왕조를 포함하는데, 모두 선비족 또는 선비화된 한족이 건립한 정권이다.

 

북위말기, 난세효웅 이주영(爾朱榮)이 나타난다. 그는 나중에 효장제에게 피살되는데, 이주영의 수하장수인 고환(高歡), 우문태(宇文泰)는 조정내에서 권력을 다투게 된다. 534년, 선비화된 한족이며 권신인 고환이 세운 북위 효무제 원수(元修)는 더 이상 괴뢰황제를 하기 싫다고 하여, 관중으로 도망가서 관농군벌 우문태에게 의탁한다. 고환은 다시 북위 효문제의 증손이자 나이 겨우 11살인 원선견(元善見)을 황제로 세우니 동위 효정제이다. 그리고 낙양에서 업성으로 천도하고 성직으로 북위에서 동위가 분리되었음을 선언하는 동시에, 고환은 동위의 조정을 장악한다. 그는 이후의 북제정권의 실질적인 창업자가 된다. 다음 해, 우문태는 효무제를 죽이고, 원보거(元寶炬)를 황제로 앉히니 그가 서위문제이다. 그는 여전히 장안을 도성으로 삼는데, 역사에서 서위로 칭한다. 우문태는 실질적으로 서위 정권을 장악한다. 547년 고환이 죽고, 장남 고징(高澄, 521-549)이 고환을 대신하여 동위의 정권을 장악하고, 동위를 대체하려고 준비할 때 집안의 요리사에게 독살당해 죽는다. 550년, 동위 효정제 원선견은 고환의 차님, 북제문선제(文宣帝) 고양(高洋)에게 선양한다; 557년, 서위공제 원곽(元廓)은 우문태의 아들, 북주 효민제 우문각(宇文覺)에게 선양한다. 이렇게 하여 고씨와 우문씨의 동서대결은 계속된다.

 

북제(550-577)는 고양이 경오년 오월 무오일에 동위를 대체하여 건립하고, 국호를 대제(大齊)라 하며 연호는 천보(天保)라 한다. 수도를 업성(지금의 안양)에 정하고, 고환이 통치하던 동위의 영토를 그대로 지배한다. 역사에서 후제(後齊)라 칭한다. 문선제 고양(高洋, 재위기간 550-559), 폐제 고은(高殷, 고양의 장남, 재위기간 559-560), 효소제 고연(高演, 고환의 차남, 재위기간 560-561), 무성제 고담(高湛, 고환의 9남, 재위기간 561-565), 후주 고위(高緯, 고연의 장남, 재위기간 565-577), 유주 고항(高恒, 고위의 장남, 재위기간: 577)의 모두 황제이다. 577년 숙적인 북주에 멸망당한다. 국가로서 28년간 존속한다. 고양이 즉위할 때 21살이었다. 그는 중국역사상 가장 젊은 개국황제이다. 그가 즉우한 후, 부친 고환을 신무제, 형인 고징을 문양제로 추존한다. 이들 황제들은 고환을 제외하고, 북제단명정권과 마찬가지로 모두 하나같이 단명하고, 선종하지 못했다.

 

2. 고양, 고연, 고담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나온 동모형제이다.

 

먼저 북제의 6황제가 승계한 순서를 말해보자. 고양(529-559), 550년 오월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오른다. 재위초반에는 정무를 열심히 하고, 법으로 아랫사람들을 다스렸으며 사람들을 잘 기용하고 군사준비도 착실히 했으며 사방을 정벌한다. 나중에는 정신이 혼란해지고, 시기심이 많고 포악해진다. 형제를 학살하고, 음주에 절제가 없었다. 그리하여 음주과다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천보10년(559) 사망하니, 나이 겨우 31살이다. 태자 고은(545-561)이 황위를 승계한다. 다음 해 팔월, 고연이 정변을 일으키고, 태황태후(즉 누태후)는 명을 내려 고은을 폐위시켜 제남왕으로 삼는다. 그리고 별궁에 나가서 거주하게 한다. 고연이 황제로 즉위하고, 황건2년(561) 구월, 고은은 고연에게 피살당한다. 나이 겨우 17살이었다. 얼마후, 고연은 중병에 걸려 죽는다. 아들 고백년(高百年)의 목숨을 부지시키기 위하여 9째동생 장광왕 고담에게 황위를 넘긴다. 그러나 고백년은 그래도 고담에게 죽는다. 고담(537-568)은 4년간 재위한다. 그는 의표가 당당하고 잘 생겼다. 그러나 성격이 부드럽고 황음했다. 즉위후에는 어리석고 무능했으며 여색에 빠진다. 국사는 생각지 않는다. 북제는 위기에 처한다. 565년, 태자 고위에게 황위를 전하고 스스로 태상황이 된다. 그러나 주색에 과도하게 빠져서 죽고 만다. 나이 겨우 32살때였다. 고위(556-577)은 9살때 부친에게 황위를 물려받고 12년간 재위한다. 그는 성격이 인색하고 황음했다. 즉위때 부패한 북제정권은 이미 비바람에 흔들리는 위험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황음무도했고, 자칭 "무수천자(無愁天子)"라 칭했다. 정치는 부패하고 명장은 주살했으며 결국 멸망으로 이끈다. 북주의 군대가 경사를 공격하여 함락시킬 때, 고위는 황망하여 황위를 자신의 8살된 아들 고항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남방의 진나라에 투항할 준비를 한다. 다만 도중에 북주군대에 붙잡혀 포로가 된다. 얼마후 유주 고항과 함께 사사되니 향년 22세였다.

 

역사상이 누태후(고은이 정권을 잡았을 때의 태황태후)는 황음한 북제왕조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누태후(501-562)의 성명은 누소군(婁昭君)이다. 북제 무명황후이며 고환의 처이다. 고환과의 사이에 6명의 아들을 낳는다. 그중 4명의 아들이 북제황제가 된다. 그들은 각각 고징(추존), 고양, 고연, 고담이다. 다른 2아들은 각각 고환의 8남 고육(高淯)과 12남 고제(高濟)이다. 누소군은 대군 평성(지금의 산서성 대동) 사람이다. 선비족이며, 사도 내간(內干)의 딸이다. 누소군은 평소에 유순하고 근검했으며 자신을 낮추고 겸손했다. 친히 방직과 침선을 하였으며 희첩들이 낳은 자식들도 아주 자애롭게 대해주었고, 자신이 낳은 자식들과 차별대우하지 않고, 여러 아들들에게 바지와 웃옷을 모두 한 개씩 나누어주었다. 자주 고환에게 진언하여 능력있는 사람을 기용하도록 하고, 사적인 이유로 공적인 업무를 망치지 말도록 권했다. 일처리에서 대국을 고려하고, 위곡구전(委曲求全)했다. 국가이익을 중히 여기고, 남편 고환이 유유공주를 취하는데 동의한다. 그리고 스스로 정실의 자리를 내놓고, 고환과 결혼하도록 해준다. 고양이즉위한 후에는 황태후에 봉해지고, 고은이 물려받은 후에는 태황태후가 된다. 고연이 병사하고, 고담이 즉위한 1년후에 사망하니 향년 62세였다. 

 

3. 북제는 중국역사상 오명을 떨친 '금수왕조'이다.

 

북제의 전후 28년간 6명의 황제는 폭정 흉악 음란으로 유명하여 '금수왕조'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중 북제통치의 절반기간은 법도 없었다. 즉 국가는 14년간 법률이 없었고, 모조리 개인적인 기호 혹은 그날의 기분에 따라 처리했다. 죽이고 싶으면 누구든지 죽이고, 살리고 싶으면 사람을 죽여도 무죄였다. 노비를 대거 파견하여 현장으로 삼았고, 능력이나 재능이 있다고 하여 지방관리에 임명되지 않았다.

 

북제는 일부일처제가 아니었다. 황실은 거의 계속하여 탈처통간(奪妻通奸)이 일어났다. 이는 북제를 건립하기 전의 고환, 고징 부자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북제의 신무제 고환은 전후로 이주영의 딸(위장제의 황후), 이주조(爾朱兆)의 딸(건명제의 황후), 정대거(鄭大車, 위광평왕비), 풍씨(임성왕비), 이씨(성양왕비)를 취했다. 이들은 모두 위(魏)나라의 종실왕비들인데, 고환이 모조리 받아들여서 차지했다. 북제 문양제 고징은 원씨(설치의 처)를 핍박하여 취한 후, 고신의 처를 강탈하고, 다시 원옥의(元玉儀, 손등의 妓), 원정의(왕의의 누나, 최괄의 처)를 취하고, 정대거(원 위광평왕비, 나중에 고환의 비)와 사통했으며, 최종적으로 유유공주(고환의 처, 고징의 서모)를 취하여 딸을 하나 낳는다.

 

고양이 찬탈할 수, 형인 고징의 처 원씨를 간음하는데, 이는 고징이 고양의 처를 간음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고양은 다시 왕씨(최수의 처), 설씨자매(희곡을 부르고 춤추는 가녀) 를 취한다. 그외에 다른 사람의 처를 신하에 상으로 하사하기도 했다. 고양은 유욱첩을 보내어 영안왕 고준을 죽였는데, 고준의 처를 그에게 하사한다. 풍문락을 보내어 상당왕 고환을 죽이게 했는데, 고환의 처를 그에게 하사한다. 고준, 고환은 고양의 이모형제이다. 나머지 고씨부녀는 친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고양의 좌우에서 그의 뜻에 따라 간음한다. 고양은 심지어 신체를 드러내는 습관이 있었다. 문무대신들의 앞에서도 가리지 않았다.

 

고담은 고양의 황후 이씨(이조아)를 핍박하여 간음한다. 만일 다르지 않으면 이씨의 아들 고소덕을 죽이겠다고 한다. 그 결과 이씨는 임신하여 딸을 하나 낳는다. 고담은 나중에 이씨의 앞에서 고소덕을 죽인다. 그리고 이씨의 옷을 벗겨 채찍질을 해서 분을 푼다. 나중에 고담은 다시 이씨(위정제의 비빈), 왕씨(고양의 비빈), 팽악의 딸 및 임상이 딸(모두 고양이 책봉하지 않은 비)을 취하여 모두 부인으로 삼는다.

 

고담의 황후이자, 고위의 생모인 호씨는 고담의 총애를 받지 못하여 고담의 심복부하 화사개(和士介)와 사통한다. 화사개는 고담의 동성애 애인이었다. 고담의 또 다른 동성애 애인은 그의 조카인 고효유였다. 고담이 황위를 선양한 후, 9살된 고위가 즉위한다. 조정대권은 호태후와 그의 정부인 화사개의 수중에 장악된다. 그들의 간통은 공개화된다. 고위의 동생인 고엄은 계책을 세워 화사개를 죽인다. 호태후는 이때부터 더 이상 후궁과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고, 한 무리의 화상들과 통간하며 음탕한 생활을 보낸다. 북제는 북주에게 멸망당하는데, 호태후는 포로로 잡히기 전에 황궁에서 쫓겨난다. 그런데 며느리 목황화(穆黃花, 고위의 세번째 황후)를 끌어들여, 함께 기녀(妓女)가 된다. 이리하여 역사의 기담으로 남는다. 이때 나이가 이미 마흔이 넘었던 그녀는 양기를 많이 흡수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서른도 안되어 보였다. 성숙미가 넘쳤다고 할 수 있고,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침상에서 뛰어난 재주를 지녔고, 전왕조태후라는 배경도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장사는 아주 잘 되었다. 금액은 계속 올라갔고, 쉴 틈이 없을 정도였다. 고위의 첫번째 황후인 곡률씨(斛律氏)는 북제가 멸망한 후, 먼저 여승이 된다. 나중에는 원인(元仁)에게 개가하여 그의 처가 된다; 고위의 형인 남양왕작비 정씨(鄭氏)는 주무제에게 간음당한다.

 

후주 고위는 원래 태위 곡률광이 딸을 황후로 취했다. 다만 나중에 황후가 데려온 시비 목황화를 총애하여 황자 고항을 낳는다. 어린황제 고위는 조상들이 혼폭, 사치한 악습을 그대로 배웠다. 하루종일 후궁에서 음락을 즐기고, 목황후와 놀아났다. 그리고 그녀의 시녀인 풍소련(馮小憐, 나중의 풍숙비. 옥체횡진의 고사가 나온 여인)과 눈이 맞는다. 함께 무양으로 가서 운우지락을 즐기면서, 인체예술전 '여체성'을 즐긴다. 나중에 홍안화수로 망국의 군주가 된 고위는 집안을 완전히 말아먹는다. 목숨도 잃는다. 홍안화수의 풍숙비는 전리품으로 북주무제가 동생인 대왕 우문달의 첩으로 보낸다. 얼마후 수나라가 북주를 대체한다. 우문달은 수문제 양견에게 피살당한다. 그녀는 다시 무장군 이순의 첩이 된다. 귀비에서 첩까지, 그녀는 온갖 고난을 당하다가 결국은 자결하고 만다. 역사에는 "풍소련이라는 약한 여자 한 명이 적군 이십만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금주왕조 북주의 궁정의 추악함은 겉으로 보기에는 금옥이지만, 안으로는 패서(敗絮)이다.

 

4. 육영훤(陸令萱)은 1품의 관직을 받았으나 망국요녀이다.

 

위에서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역사상 진실한 고담은 말그대로 황음지도 혼폭지군이다. 재덕을 겸비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고담은 부친과 형의 능사인 다른 사람의 처를 빼앗는 것으로부터 선대보다 심하게 형수, 조카를 모조리 취하는 양성애를 하기도 한다. 그는 변태의 극치라 할 만하다. 그의 짧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한 여인이라면 그의 형수이자 고양의 처인 이조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정(즉, 육영훤)이 아니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육영훤(?-577)은 고환의 부하인 낙초의 처이다. 아들 목제파를 낳았다. 낙초는 나중에 모반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육영훤은 궁중에 들어가서 황궁의 궁녀가 된다. 육영훤은 기지가 있고 총명하며, 일처리를 잘하고 언행이 법도에 맞으며, 윗사람에게 잘 보였다. 아들을 낳은지 얼마되지 않았다. 그래서 광장왕 고담의 왕비 호씨의 마음에 든다. 왕부오 가서 강보에 쌓인 아들 고위를 보살핀다. 육영훤은 궁에 들어갈 때 이미 자식을 낳은 여인이다. 단순한 노처녀가 아니었다. 고담의 사랑을 깊이 받았다는 것은 헛소리이다.

 

육영훤은 심계가 깊었다. 고위의 유모가 된 후,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한다. 죽어라 고위의 생모인 호씨에게 잘보이면서, 그들의 총애를 받는다. 이때부터 궁중에서 신임을 얻는다. 고위가 즉위한 후, 조정대권은 처음에 모친 호태후와 그녀의 정부이자 상서좌복야인 화사개의 수중에 떨어진다. 후주 고위는 육영훤이 직접 키웠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육영훤과 더욱 가까웠다. 육영훤의 말이라면 고위는 모두 따랐다. 후주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육영훤의 권력도 갈수록 커진다. 관직이 여시중(女侍中)에 이른다. 그녀는 궁중총감이 된 것이다. 후궁내에서 중요한 지위에 오른다. 화사개도 육영훤을 의모(義母)로 모신다. 그것은 첫째, 어린 황제를 마음대로 하기 편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후궁에서 호태후와 간통하는데 편리하기 위해서이다.

 

고위는 원래 태위 곡율광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나중에 황후가 데려온 시비 목황화를 총애한다. 무평원년(570), 목황화가 황자 고항을 낳는다. 육영훤은 목황화를 의녀로 삼고, 그녀를 도와 '홍덕부인'이라는 봉호를 얻게 해준다. 동시에 고항을 곡률황후의 양자로 삼게 한다. 이렇게 하여 고항은 태자가 된다. 곡률황후가 폐출된 후, 육영훤은 여러번 고위에게 목부인을 황후로 삼도록 권한다. 호태후는 그러나 자신의 조카인 호소의(胡昭儀)를 황후로 삼는다. 육영훤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목부인의 아들 고항이 태자라는 것을 이유로 들어, 밤낮으로 설득한다. 결국 목부인이 좌황후에 오른다. 얼마후 육영훤은 기회를 보아 호태후의 앞에서 호황후에 대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호태후는 마침내 조카인 호황후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목부인이 정식으로 황후에 오른다. 육영훤은 목황후이 모친이므로 '대희(大姬, 태희는 황후의 모친을 부르는 존칭이다)'가 되어 1품이 된다. 장공주보다 높은 반열에 오른다. 이렇게 그녀는 실질적인 '황태후'가 된다.

 

나중에 화사개가 피살되고, 호태후는 그저 화상들과 간통하며 즐기는데만 신경쓰고 후궁, 조정의 일은 신경쓰지 않는다.  황제 고위는 풍숙비와 노는데만 신경썼다. 조강이 문란한 북제후주정권은 자연히 황제의 유모 겸 황후의 의모인 육영훤 및 그의 아들 목제파(목황후의 성을 따름) 두 사람에게 넘어간다. 그들은 전면적으로 조정을 장악하고, 후궁을 통령했다. 친당들과 결탁하여 뇌물이 성행하고, 재판은 불공정했으며, 관작이 남발된다. 일시에 노비, 태감, 창우(倡優)등도 모두 관직을 받는다. 나중에 고위의 동생 고엄을 주살하고, 대장군 곡률광을 유인하여 죽이고, 시중 조정을 파면한다. 결국 목제파는 군정대권을 한 손에 장악한다. 무평7년(576년), 북주가 대거 북제로 쳐들어온다. 북제군은 계속 패퇴한다. 다음 해, 북주의 군대가 북제의 업도를 함락시키고, 후주는 유주 고항을 이끌고 청주(산동성 익도)로 도망친다. 관건적인 시기에, 그의 총신 고아나굉(高阿那宏)은 북주군에 투항한다. 그리고 후주, 유주를 포로로 잡아서 예물로 바친다. 이렇게 하여 북제는 멸망한다.육영훤는 그 아들 목제파가 북주에 투항한 후 핍박으로 자살한다. 북주무제는 목제파를 주국(柱國), 의주자사로 삼았으나 얼마후 주살한다. 후주와 북제의 여러 왕들도 모두 비명에 간다. 마지막으로 고씨자손은 모조리 도륙되어 거의 멸족당한다.

 

육영훤은 북제조정을 꼬박 8년이나 조종한다. 정치를 어지럽히고 나라에 화를 끼친다. 그리하여 북제왕조는 황제도 죽고, 나라도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