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양헌용(羊獻容): 육폐칠립(六廢七立)의 황후

중은우시 2013. 7. 12. 22:38

글: 노후(老猴)

 

양헌용은 서진(西晋)의 외척인 양현지(羊玄之)의 딸이다. 그녀는 진혜제 사마충의 두번째 황후였을 뿐아니라, 양진시기 십육국중 하나인 전조(前趙)의 말제(末帝) 유요(劉曜)의 황후이기도 하다. 그는 두 황제를 22년간 모시면서 복잡한 궁중투쟁과 사회정치배경하에 그녀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물건처럼 앞뒤로 6번이나 폐위되고 7번 황후에 오르는 인생경력을 갖게 된다. 때로는 황후로 올라가고, 때로는 폐위되어 서인이 된다. 황후의 자리가 무슨 애들 장난감처럼 취급되었다. "이 양황후는 명운이 박복하다고 할 수 있다. 계후가 되자마자 조왕륜의 난화를 맞이하여, 나중에 다섯번 폐위되고 다섯번 다시 황후에 오른다. 정말 죽었다가 살아나는 형국이다." 이 한마디 말은 양헌용의 복잡한 인생궤적을 보여준다. 다만 최종적으로는 그래도 비교적 좋은 결말을 맞이했다. 복위되어 유요의 황후가 되었을 뿐아니라 3명의 아들을 낳고 병으로 사망한다.

 

폐립의 경위: 양황후가 폐립된 횟수는 어떤 설에 따르면 5폐5립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6폐7립이라고 한다. 필자가 조사해보니 "6폐7립"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립(一立): 영강원년(300년) 중동(仲冬), 조왕 사마륜이 표기장군 손수와 얘기되어, 양헌용은 진혜제 사마충에게 시집간다. 양씨는 황후에 봉해진다.

 

일폐(一廢): 영강2년(301년) 봄, 조왕 사마륜의 찬위가 성공하여 그가 황제에 오른다. 진혜제 및 양황후는 금용성(감옥과 같은 성격)으로 쫓겨나 거주한다. 겉으로는 진혜제를 태상황으로 모시고, 금용성을 영창궁으로 개명한다.

 

이립(二立): 손수가 반란을 일으키나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좌위장군 왕여에게 살해당한다. 사마륜은 패배한다. 왕여는 사마륜을 압박하여 진혜제를 다시 모셔오게 한다. 사마륜은 할 수 없이 왕여에게 금용성으로 가서 진혜제와 양황후를 다시 모셔오도록 명한다. 진혜제는 사마륜부자를 금용성에 감금하도록 한다.

 

이폐(二廢): 영흥원년(304년) 이월, 성도왕 사마영이 장사왕 사마의를 격파하고, 낙양에서 대권을 장악한 후, 양황후는 사마륜이 황후에 올렸다고 하여 진혜제를 핍박하여 양황후를 서인으로 폐하게 한다. 양황후는 금용성으로 옮겨서 거주한다.

 

삼립(三立): 영흥원년 칠월, 사마영이 낙양을 떠나고 성도에서 국사를 원격조종한다. 동해왕 사마월이 이 기회를 틈타 거사를 한다. 우장군 진진은 사마월을 종용하여 함께 사마영을 토벌하고, 사마영을 몰아내고 낙양을 지키던 수비장수 석초는 금용성으로 가서 서인이 된 양헌용을 모셔온다. 그녀를 다시 황후에 모신다.

 

삼폐(三廢): 영흥원년 팔월, 하간왕 사마옹의 부장 장방은 성도왕 사마영과 동해왕 사마월이 진혜제를 기고 업성에서 혼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서,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고 있는 낙양성을 차지한다. 성에 들어간 다음 날, 장방은 양헌용의 황후위를 폐위시킨다. 이 때, 진혜제는 이미 성도왕 사마영에게 잡혀 갔다. 장방은 스스로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사립(四立): 영흥2년(305년) 사월, 장방은 진혜제를 출궁하게 하여 낙양을 떠나 장안으로 간다. 복야 순번, 사례 유돈과 태상 정구, 하남윤 주복등은 아직 낙양에 있었다. 양헌용은 여전히 금용성에 거주했고, 황제를 따라 장안으로 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낙양에 남은 여러 관리들은 다시 양헌용을 모시고 궁으로 데려와 황후로 모신다.

 

사폐(四廢): 영흥3년 사월, 진혜제가 장안에 도착한 후, 당시 중령군, 녹상서사, 영경조태수로 대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방은 진혜제를 핍박하여 낙양에서 조서를 반포한다. 양황후의 황후위를 폐위시키고, 금용성에 유거하게 한다. 남아있던 관리들은 부득이 그 명에 따른다.

 

오립(五立): 영흥2년 십일월, 낙양에 남아 있던 입절장군 주권은 거짓으로 멀리 장안의 진혜제가 밀조를 내렸다고 하면서, 양헌용을 황후로 올린다. 이 공로를 가지고 스스로 평서장군이라 칭한다. 그 뜻은 하간왕 사마옹을 토벌하겠다는 것이다.

 

오폐(五廢): 영흥2년 십일월, 주권이 양헌용을 황후로 다시 모신후 얼마되지 않아, 장방이 관할하는 낙양현령 하교는 주권이 조서를 사칭한 음모를 발견하고, 병력을 일으켜 주권을 죽인다. 그리고, 양황후를 다시 폐위시키고, 양황후는 낙양을 떠난다.

 

육립(六立): 광희원년(306년) 육월, 장안이 선비족의 기병에게 공격을 받아 함락되고, 국면이 혼란스러워진다. 동해왕 사마월은 진헤제를 낙양으로 다시 모셔온다. 그후, 적막하게 지내던 진혜제는 조서를 내려 궁감을 금용성으로 보내어 대난에도 죽지 않은 양헌용을 낙양으로 다시 모셔오게 하고 다시 황후로 세운다.

 

육폐(六廢): 진회제 원가6년(311년) 육월, 황태제 사마치가 즉위하니 그가 진회제(晋懷帝)이다. 양헌용은 혜황후가 칭하며 홍훈궁으로 옮겨서 연금당한다. 같은 달 한장(漢將) 유요, 왕미가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태보 호연안을 보내어 진회제 사마치를 평양으로 쫓아보낸다. 자신은 양헌용을 데리고 병력을 이끌고 북상한다. 양황후는 포로가 된다.

 

칠립(七立): 진원제 태흥원년(318년) 십월, 한장 유요는 평양에서 적벽으로 간다. 거기에 단을 만들고 황제를 칭한다. 그후 장안으로 천도한다. 319년 사월 한(漢)은 조(趙)로 개명한다. 역사에서 말하는 '전조"이다. 양헌용을 황후로 세운다.

 

그렇다면, 양헌용은 왜 육폐칠립하는 특이한 인생경력을 갖게 되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이다.

 

첫째, 진혜제 사마충은 멍청하고 무능했으며, 우둔하고 나약했고, 스스로를 돌볼 수 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양황후는 진혜제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했다. 봉건제왕시대에, 황후를 폐위시키는 것은 조정대사이다. 통상적인 상황하에서, 만일 황제가 황후를 폐위시키고자 하면, 황태후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황제의 수하 신하 장수들은 황후를 폐위시킬 권한이 없다. 그러나 백치황제 사마충은 양헌용을 황후로 책봉한 수, 자신이 재위하고 있었지만, 그는 괴뢰였고, 실권이 없었다. 자신의 눈아래에서 눈을 멀거니 뜨고 여러 왕들이 권력을 함부로 가지고 노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양황후를 마음대로 폐위시킬 수 있게 놔두었다. 여러 왕들도 폐위시키고, 여러 장군들도 폐위시켰고, 현령도 폐위시켰고, 오랑캐도 폐위시켰다. 그러나 진혜제는 아무런 보호작용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양황후는 진혜제와 같이 있던 6년동안 진혜제로부터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5번이나 폐위당한다. 양황후가 한장 유요에게 포로로 잡혀간 후, 일찌기 유요에게 말한 바 있다: "혜제는 망국도부(亡國屠夫)이다." "귀하기는 제왕이면서도, 일처일자 및 본인의 삼인조차도 보호하지 못하여, 처자식이 서인의 수중에 욕을 당하게 놔두었다...."(여기서 일처는 양헌용이고 일자는 헤제와 사민재인 사이에 태어난 태자 사마휼을 말한다. 본인은 진혜제 자신이다). 이를 보면 진혜제는 양황후를 보호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신하들이 양황후에 대하여 마음대로 하였으니, 양황후를 다섯번이나 폐위시킨 것도 이해가 된다.

 

둘째, 여러 왕간의 권력투쟁으로 양황후를 통하여 각자의 권력과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그래서 양헌용은 여러번 폐위되었지만, 기사회생한다. 황제가 있으면 황후도 있다. 이는 진왕조의 정궁부인이 제 자리에 있으면 괴뢰인 진혜제를 장악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양헌용이 처음에 황후에 책봉된 것은 바로 조왕 사마륜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한 결과이다. 사마륜과 양왕 사마동이 진혜제의 전임황후 가남풍을 죽인 것으로 인하여 황후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리하여 진혜제의 딸 하동공주를 첫째 심복인 손수의 아들 손회에게 시집보내게 한다. 동시에 다시 손수가 중매를 서서, 동족인 손기의 외생질(사위 양현지의 딸)인 양헌용을 진혜제 사마충에게 시집보낸다. 이렇게 하여 양헌용은 졸지에 국모가 되고, 양현지는 국장(國丈)이 되어, 작위가 흥진공(興晋公)이 된다. 손기는 황후의 할아버지가 되고, 거기장군을 받는다. 손수는 표기장군을 겸한다. 양황후의 외숙인 손필 그리고 당숙인 손모, 손보, 손염은 모두 사마륜에 의탁한다. 그들은 모두 세단계나 승진하여 모두 장군이 된다. 손씨천하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형국이었다. 사마륜이 찬위한 후에 세력은 신속히 확장한다. 양황후는 사마륜의 어용도구가 되었다.

 

여러번 양황후를 폐립하는 과정에서, 양헌용은 주권, 하교, 사마월등 폐립자들이 개인적인 목적을 숨기고 정치적인 자본을 획득하려는 도구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동해왕 사마월은 자신의 권력찬탈의 야심을 숨기기 위하여, 진헤제를 환도시킨다는 기치를 내걸고, 아직 행궁에 있으면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목숨이 위험한 진헤제를 우마차를 이용하여 급히 낙양으로 데려온다. 진혜제는 조서를 내려, 궁감을 금용성으로 보내어 양헌용을 모셔오게 한다. 이렇게 하여 사마월은 '불세지공'이라는 정치자본을 갖게 된다. 나중에 그는 진혜제를 독살하고, 무제 사마염의 어린 아들 사마치(진회제)를 즉위시킨다. 나아가 자신이 진회제의 보정이 된다. 크고 작은 정치적인 지시는 모조리 사마월이 인가해야만 시행되었다. 이를 통하여 그는 권력찬탈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다.

 

셋째, 양헌용은 "절개를 잃더라도, 목숨을 잃지는 않겠다"는 삶을 탐하는 인생관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미모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심리적으로 부침이 많은 인생의 폐립국면을 견뎌낼 수 있었다.

 

양헌용은 22년간 여섯번 폐위되고 일곱번 황후에 오른다. 그럼에도 중도에 목숨을 잃지 않고, 여러번에 걸친 굴욕과 습격을 견뎌내며 두 황조의 황후가 된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이상의 여러가지 요소들 외에, 그녀의 강인한 적응력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한장 유요가 진나라수도 낙양을 함락시키고 여러 후비를 얻었으면서, 그는 오로지 양황후만을 데려가서 자신이 가진다. 바로 그녀가 "진혜제때 구사일생하며, 나이가 이미 삼십가량이고, 비록 여러해에 걸쳐서 곤란을 겪었고, 혼자서 살아왔지만 여전히 예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전혀 초췌해지지 않았다"는데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유요에게 핍박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여 부득이 자신의 몸을 낮추어 그의 음욕을 채워주었다." 양헌용은 전조의 황제 유요의 황후가 된다. 그는 외국황제의 정궁이 된 것이다. 유요의 앞에서 그녀는 그저 듣기 좋은 말만 했다. 예를 들어, 그녀는 유요에게 이렇게 말한다: "폐하는 개국의 성주이니 어찌 망국의 도부(진혜제를 가리킴)와 서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유요에게 이전에 겪은 고초를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첩은 당시에 이미 분개하여 더 이상 살고싶지 않았습니다. 어찌 오늘같은 날이 다시 올 줄 알았겠습니까. 첩은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잘못하여 멍청한 자(庸奴, 진혜제를 가리킴)에게 시집가서, 세상의 남자를 원망한 적이 있습니다. 왜 사내대장부의 패기가 없는가. 이제 폐하를 모시게 되니 천하에 대장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요는 양황후의 이런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더욱 총애했다. 양황후는 아주 잘 맞춰주면서 유요와 잘 지냈다. 그녀는 연이어 3명의 아들을 낳는다. 유희(劉熙), 유습(劉襲), 유천(劉闡).

 

양헌용은 용모가 뛰어나서 옥과 같고 꽃과 같았다. 경국경성이었다. 전황후 가남풍과 비교하자면 천양지차의 용모와 자색이었다. 이것도 그녀가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양헌용은 기구한 인생의 길에서 금용성에서 지내건 냉궁에 들어가건 과부같은 연금생활을 지내든 아니면 다시 복위하여 황후가 되었든, 총애를 받는 황후로서의 생활에 그녀는 언제든지 물흐르는대로 굽힐 줄도 알고 펼 줄도 알면서 출중한 지혜와 강인한 의지를 지녔다. 그리하여 자신이 권력투쟁의 틈바구니에서 완강하게 생존해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