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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동진 저태후(褚太后): 수렴청정을 세 번이나 하다

by 중은우시 2014. 12. 12.

글: 일득재주(一得齋主)

 

수렴청정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국왕이 요절하고 후계자의 연령이 어리면 그 모친이 정무를 보좌한다. 당시 궁중의 규정에 따르면 황태후는 함부로 신민들이 볼 수 있게 하거나 접촉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렴을 늘어뜨리고 건너편에 앉아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다. 황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일은 중국역사상 여러번 나타났다. 그러나 일국의 황태후로서 한 사람은 일생동안 5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3번이나 나서서 수렴청정을 하고 매번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였고(모친, 숙모, 당형수); 세번 이나 국중의 대사는 모두 '황태후조령'의 형식으로 반포시행하였으며, 세번에 걸처 임조칭정하고, 다시 세번에 걸쳐 은퇴하였고,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 했을 뿐아니라 권신들과도 잘 소통하여 사람들이 탄복할만한 담량과 모략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귀한 것은 엄청난 흉금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동진 강제 사마악의 황후 저산자(褚蒜子)는 중국고대역사상 여러 위대한 여성중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저산자(324-384), 명문망족 출신으로 저씨집안은 대대로 관료를 지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기질과 견식이 모두 남달랐다. 그리하여 낭야왕 사마악의 왕비로 뽑힌다.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총명하고 기식(器識)이 있으며, 어려서 명가출신으로 낭야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342년, 진성제 사마연이 병사하는데, 아들이 아직 어려서 동생 사마악에게 황위가 전해진다. 그래서 19살의 저산자는 당연히 황후에 책봉된다.

 

어린아들을 안고 처음 수렴청정을 하다.

 

사마악이 황제가 된지 2년만에 사망한다. 2살짜리 어린아들 사마담이 황위를 잇는다. 저산자는 황태후가 된다. 사마담이 나이가 어려 국정을 장악할 수 없으므로 조정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저산자가 임조집정한다. 저산자는 시세를 잘 읽고 대신들이 올리는 건의를 잘 받아주었다. 아들을 안고 그녀는 제1차 수렴청정을 한다. <진서>에 따르면, "황태후(저산자)는 흰색 비단장막을 태극전에 걸고, 황제를 안고 자리했다." 그녀의 통치하에, 동진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군사력도 크게 늘어난다. 그동안 대장 환온은 서남이 성한(成漢)정권을 멸망시켜 촉(蜀)의 땅을 모조리 거둔다. 다시 병력을 이끌고 3차에 걸쳐 북벌하여 동진의 위세를 크게 떨친다. 환온은 신하로서 더 이상 높이 오를 곳이 없을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고 이때부터 점차 교만해진다. 저산자의 이후 집정에 화근을 심었다.

 

357년 사마담이 15살때, 저태후는 정무를 아들에게 돌려준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승평원년 봄 정월 임술삭, 황제는 원복을 입고, 태묘에 고하여 친히 만기를 통람한다. 황태후는 숭덕궁에 거한다." 그녀는 조서를 내려 여러 신하들에게 국가사직이 중요하니 전력을 다하여 어린 황제를 보좌해달라고 말한다. 자신은 영원히 별궁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마치겠다고 한다. 그녀의 말은 간절했다. 이를 보면 저산자의 흉금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민감한 정치적 두뇌가 있음도 알 수 있다. 저산자가 숭덕전으로 물러난 후 환온은 더욱 방종하게 된다.

 

위기에 명을 받아 제2차 수렴청정하다. 361년, 나이 겨우 19세의 사마담이 병으로 급사한다. 이때 성제 사마연의 아들 사마비(司馬丕)가 이미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저산자는 황위를 정통으로 돌려주어, 사마비를 황제로 앉힌다. 누가 알았으랴. 사마비는 정무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방사를 미신하여 하루 종일 밥을 먹지 않고 그저 금석약을 먹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젊은 나이에 병석에 들어눕는다. 대신들은 할 수 없이 상소를 올려 사마비의 숙모인 저태후에게 제1차 수렴청정을 요청한다. 

 

이렇게 하여 저산자는 제2차 수렴청정을 한다. 1년만에 사마비는 우화등선하여 사망한다. 저산자는 다시 황제를 정하는 태후조서를 내린다. 사마비의 동생인 사마혁(司馬奕)을 황제에 앉힌다. 이때 환온의 공은 이미 황제를 덮을 정도였고, 황위를 찬탈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진서>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처음에 환온은 더 이상 신하로 남지 않겠다는 마음을 품는다. 먼저 하삭에서 공을 세워 중망을 얻고자 했다" 그는 전공을 세워 명성을 높이고 이를 통해서 황제위를 찬탈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은 생각과 달리 진행되었다. 369년, 환온이 전연을 북벌하다가 방두(지금의 하남성 급현 동북지방)에서 모용수에게 패배당한다. 환온은 이로 인하여 명성이 크게 떨어진다. 그리하여 황제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새로 황제를 옹립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자 한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방백세(流芳百世)하지 않으려면 유취만재(遺臭萬載)할 것이다"(좋은 명성을 역사에 남기지 못할 바에는 악명이라도 떨치겠다는 의미임). 

 

음모가는 항상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일을 하기 전에 왕왕 먼저 환경을 조성한다. 환온은 목적달성을 위하여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사마혁은 실제 성능력을 상실한 폐인이라고. 그리하여 그의 남총인 상룡, 계호, 주령보가 두 미인 전씨, 맹씨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둔 것이라고. 유언비어는 실로 무서울 정도였다. 당시의 사람들이 진위를 가릴 수 없었다. 환온은 저산자에게 사마혁을 폐위시키고, 승상 사마욱(司馬昱)을 새 황제로 세우도록 건의한다. 저태후는 당시 환온의 기세에 밀리고, 또한 사마혁의 명성이 땅바닥에 떨어졌으므로, 이해득실을 고려한 다음 할 수 없이 사마혁을 폐위시킨다. 저산자는 다시 한번 숭덕궁으로 물러나고, 숭덕태후라는 존호를 받는다.

 

당시 동진의 황궁은 정말 사건이 많았다. 사마욱은 환온의 괴뢰였다. 황제로서 존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종일 겁을 먹고 살았다. 재위한지 8개월만에 죽어버린다. 사마욱은 멍청하게 평생을 살았지만 죽기 전에 한 가지 일을 스스로 해낸다. 그것은 환온과 힘겨루기를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11살된 아들 사마요(司馬曜)에게 다음 황위를 물려준다고 유조를 썼다. 환온의 생각처럼 환온에게 황위를 선양하지 않았다. 환온도 이로 인하여 홧병이 나서 병사한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은 다시 상소를 올려 숭덕궁에 물러나 있던 저산자에게 다시 한번 수렴청정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미 50세가 된 저산자는  당형수로서 제3차 수렴청정을 한다. 오랫동안 정치에 간여하다보니 그녀는 아주 성숙했다. 이번에 그녀는 아주 확실하게 회복한다. 이번에 저산자는 환온의 잔여세력을 몰아내고 조정의 국면을 장악하다. 저산자는 인의로 천하를 다스리며 국가를 잘 다스린다. 그녀는 일찌기 재해를 입은 백성을 구휼하도록 하는 조서를 내린 바 있다. 

 

376년, 저태후는 다시 조서를 내려 효무제 사마요에게 정권을 물려준다. 저태후의 수렴청정은 이렇게 끝난다. 그후 그녀는 궁중에 깊이 거처하며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384년, 동진왕조에 사라지지 않을 공을 세운 황후는 병으로 사망한다. 향년 6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