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비상(史飛翔)
노신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항상 허광평(許廣平)을 떠올린다. 또 다른 적막하게 집을 지킨 여인 주안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주 적다. 주안은 노신의 본부인이다. 그러나, 항상 유명무실했다.
1906년 여름, 일본유학중이던 노신은 집안의 전보를 받는다: "모병속귀(母病速歸, 모친이 아프니 빨리 돌아오라)" 집에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이 모든 것이 그저 정교하게 계획된 한 편의 기만극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원래 집안에서는 이런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노신이 일본에서 일본여자와 결혼했고, 아이를 데리고 동경을 산책한다고, 모친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이런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목적은 그를 집으로 돌아오게 해서 결혼시키는 것이다. 노신은 효자였고, 모친츼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묵묵히 이를 받아들인다.
다음 날, 즉 1906년 7월 6일, 노신은 모친의 명을 받아 자신보다 3살많은 주안과 혼인식을 올린다.주인은 노신의 본가 숙조(叔祖) 주옥전(朱玉田) 부인의 동족이고, 평소에 노신의 모친과 마음이 잘 맞았다. 친척들은 모두 그녀를 "안고(安姑)"라고 불렀다. 1901년 4월 3일, 노신의 모친은 아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주씨집안에 "청강(請康)"하였다. 이를 보면 노신의 결혼은 전형적인 봉건식 포판(包辦)혼인임을 알 수 있다.
1908년, 노신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항주(杭州)의 한 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평소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드물었다. 가끔 돌아오더라도 밤새도록 글을 쓰고 고치는 일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고적을 절이했고, 주안과 접촉하지 않았다. 모친은 손자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계속 그를 몰아부쳤다. 그리하여 노신의 심정은 침울하고 광조(狂躁)하게 바뀐다. 그는 자포자기하기 시작했고, 죽어라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머리카락은 흐트리고 옷도 남루하게 입고 다니며, 자신의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막 서른이 넘은 나이에 겉으로 보기에는 5,6십세의 노인같이 창로했다. 주안은 이를 보고 마음이 아파서, 노신에게 그러지 말라고 권한다. 노신도 마음 속으로 미안한 감이 있었지만, 그녀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그저 책에서 이렇게 쓸 뿐이었다: "일생동안 희생을 하여 같이 살면서, 4천년의 묵은 빚을 갚겠다."
10년동안의 고독한 생활을 거친 후, 1919년 11월 주안은 노신의 모친을 모시고 북경으로 간다. 북경 서도문내 팔도만 11호의 주택에서 살게 된다. 동시에 이사들어온 사람은 노신의 동생 주건인(周建人)과 주작인(周作人) 두 집이었다. 비록 같이 모이기는 했지만, 노신은 주안에 대하여 여전히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듯 했다. 1923년 여름, 노신은 주작인과 반목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노신은 팔도만을 떠나서 이사사기로 결정한다. 이때 노신은 주안의 의견을 묻는다. 친정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를 따라 이사나갈 것인지. 주안은 노신을 따라가겠다고 말한다. 몇달 후, 노신은 부성문내 서삼조후통의 주택을 하나 매입해서 이사들어간다. 얼마후, 모친도 팔도만에서 이사와 노신 및 주안과 함께 산다.
1923년 가을, 노신은 허광평을 알게 된다. 그후 주안은 더욱 적막해지고, 처량해진다. 비록 주안의 내심은 아주 고통스러웠지만, 그녀는 노신에 대하여, 허광평에 대하여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노신을 얘기할 때면, "노선생은 나에게 잘 대해주신다."고만 반복하여 말할 뿐이었다. 1936년 노신이 사망한다. 노신은 생전에 여러 번 친구들에게 말한 바 있다: "그녀(주안)은 모친의 부인이지, 내 부인은 아니다." 그녀는 모친이 그에게 준 선물이다. 나는 그저 일종의 부양의무를 지니고 있다.애정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노신이 사망한 후,주안과 모친의 생활은 주로 허광평이 부담한다. 당시는 사회가 혼란스러웠고, 물가도 뛰었다. 주안의 생활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매일 먹는 것은 주로 소미면와두(小米麵窩頭), 채탕(菜湯)과 집에서 만든 절인 야채였다. 이것마저도 항상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힘들지언정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는 않았다. 한번은 누군가 어떤 신문사의 사람이 그녀에게 돈을 주고 싶어하는데, 조건은 노신의 유작을 내놓는 것이라고 했다. 주안은 그 자리에서 말한다. "감사하지만 받을 수 없다." 그리고 노신의 여하한 원고나 글자도 내놓기를 거절한다. 얼마후, 또 하나의 예술단체의 이사장이 그녀에게 돈을 보낸다. 그러나 그는 완곡하게 거절한다. 이것을 보면 주안은 원칙이 있는 사람이고, 기개가 있는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47년 6월 29일 새벽, 주안은 고독하고, 처량하게 세상을 떠난다. 향년 69세이다. 임종때,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를 선생의 곁에 묻어달라. 나는 선생을 그리워하고, 선생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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