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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노신)

노신(魯迅)의 북평5강(北平五講)에 청화대학이 빠진 이유는?

by 중은우시 2007. 12. 26.

글: 송지견(宋志堅)

 

1932년 11월, 노신은 상해에서 북경(당시 北平으로 불리웠음)으로 와서 모친의 병을 간호하는 동안에, 모두 5차례에 걸쳐 강연을 했다. 이 다섯차례의 강연을 "북평5강"이라고 부른다.

 

11월 12일은 북경대학 제2학원에서 <<방망문학과 방한문학>>

같은 날 보인대학에서 <<금년 봄의 두 가지 감상>>

11월 24일은 북평대학여자문리학원에서 <<혁명문학과 존명문학>>

11월 27일은 북경사범대학에서 <<"제3종인"을 다시 논함>>

11월 28일은 중국대학에서 <<문학과 무력>>

 

"북평5강"에 청화대학이 빠졌는데, 청화대학에서는 노신에게 강연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렇지는 않다. 주자청(朱自淸)의 일생에서 노신과 세번 만났는데, 그중 두 번이 바로 1932년 11월 노신이 북경에 있는 동안이었다. 그리고, 막 유럽에서 유학을 마치고 정식으로 청화대학 중국문학과의 주임이 된지 얼마되지 않은 주자청은 두번이나 노신의 집을 방문하여, 노신에게 청화대학에 와서 강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번째는 11월 24일이다. 그날의 <<노신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오전에 주자청이 왔고, 청화대학에 와서 강연해달라고 했지만, 사절했다. 오후에는 범중운이 왔고, 여자문리학원으로 같이 가서 약 40분간 강연했다. 같이 나와서 그의 집에서 저녁을 했는데, 8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주자청도 이날의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 "노신 방문. 강연요청, 허락받지 못함" 그는 사후에 <<나와 노신>>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이날 그가 서삼조로 가서 노신선생에게 강연을 청할 때, 노신은 "아마도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얘기를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나는 떠났다. 그는 그저 어느 서범에서 최근 문자를 모아서 출판하는데 <<이심집>>이라고 한다고 하였고, 북경에서 보았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아마도 사기 힘든 것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은 판권을 판 것이라고 하였다" <<노신일기>>에 의하든 주자청일기에 의하던, 아니면 주자청의 사후 회고에 의하든, 주자청과 노신은 깊이 있게 얘기를 나누지 못한 것같다. 노신의 <<이심집>>은 그해 10월에 상해합중서점에서 출판되었고, 얼마되지 않아 국민당이 금서로 지정했다. 나중에 합중서점이 국만당도서심사시관에 보내서 심사를 받아서 16편을 삭제하고 다시 <<습령집>>이라고 제목을 고쳐서 1934년 10월에 출판했다. 이 책의 출판에 관하여, 노신은 그저 주자청에게 "북경에서 본 적이 있는지"를 물어보았을 뿐이고, 더 깊이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주자청은 "아마도 사기 힘든 것같다"는 정도로 대답하였는데,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 것같다. 노신도 이 이야기를 더 이상 끌고가지 않았고, 그저 "이 책은 판권을 판 것이다"라고만 ㅏ였다. 그날 오후와 저녁에는 모두 일정이 잡혀 있었고, 저녁에는 범문란의 집에서 저녁을 했다. 사실 이는 북경의 좌익문화단체의 대표들끼리 얼굴을 보는 자리였다. 그러나, 노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주자청에게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두번째는 11월 27일이다. <<노신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오후에 사범대학에 가서 강연했다. 신원재로 가서 밀전 5가지를 샀는데, 모두 11원5전이었다. 오후에 정농(靜農)이 왔다. 주자청이 왔다. 손석진이 왔으나, 보지 않았다. 저녁에 광평(허광평, 노신의 처)의 편지를 받았다. 24일에 보낸 것이다" 이날의 주자청일기에도 이런 기재가 있다: "오후 노신방문, 강연요청, 허락받지 못함" 노신은 오후에 사범대학에 강연을 가야 했고, 강연후에는 "신원재로 가서 밀전을 샀다" 주자청은 아마도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주자청이 나중에 회고한 바에 의하면, "조금 있으니, 과연 돌아왔다. 노신선생의 앞에는 T선생과 3,4명의 청년이 있었다. 나는 강연이 어떠했는지 물었고, 그는 아무거나 말했다고 답했다. 다음날 신문을 보고서야 제목이 <<가죽신을 신은 사람과 짚신을 신은 사람>>(개략 이런 뜻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강연해줄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와 T선생과 각각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돌아왔다. 그는 문앞까지 마중했고, 나는 그에게 언제 다시 북경에 오느냐고 물었다. 그는 잘 모르겠다고 하였고, 아마도 내년 봄이 될 거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후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는 지금도 다시 그를 만나지 못했다" 보기에 이번의 주자청과 노신의 만남에서도 그들은 깊이있게 얘기를 나눈 것같지 않다. 노신은 막 북경사범대학에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이 날은 노천강연이었고, 아주 장관이었다. 그러나 이번 강연에 대하여 노신은 주자청에게 많이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렇게나 얘기했다"고 대응했다. 강연의 제목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태정농(台靜農)이 온 것은 노신으로 하여금 그의 집에서 북경의 각 좌익단체환영회에 참가하도록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신은 주자청에게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노신이 북경사범대학에서 강연한 것은 1981년판 <<노신전집>>에서 <<"제3종인"을 다시 논함>>이라고 되어 있는데, 주자청은 <<가죽신을 신은 사람과 짚신을 신은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이렇게 기억한데도 연유는 있다. 왜냐하면 노신이 강연하면서 중간에 "가죽신을 신은 사람과 짚신을 신은 사람"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고, 이 부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는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왕삼연이라는 사람은 아주 영민하였다. 왕삼연은 그가 이후 북경사범대학 운동장에서 이 논술을 들었을 때, "북경의 몇 신문에서는 이를 가지고 글을 써서 선생을 공격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주자청의 기억에서든 이번 강연이 <<가죽신을 신은 사람과 짚신을 신은 사람>>이라고 기억하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더구나 그는 확실히는 모른다고 괄호로 적어놓지 않았는가.

 

노신은 정말 청화대학에 가서 강연할 시간이 없었을까? 만일 11월 27일 오후에 그가 주자청에게 이렇게 말하였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11월 28일 저녁에 북경을 떠나야 했고, "북평5강"의 마지막 강연이 <<문학과 무력>>이라는 제목으로 11월 28일 오전에 중국대학에서 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북경행에서 노신은 모두 15일을 머물렀다. "북경5강"이라고 하지만, 매번 강연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떤 때는 하루에 "연속해서 진행"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1월 22일에는 북경대학제2학원에서 40분을 강연하고, 마친 후 보인대학에 가서 다시 40분을 강연했다. 주자청이 두번에 걸쳐 진심으로 강연을 요청하는 것을 봐서 청화대학에 가서 몇십분 강연하는 것은 크게 문제있을 것같지 않았다.

 

두번의 요청이 모두 무산되자, 주자청도 느낀 점이 있을 것이다. 그는 학교로 돌아온 후 학생들에게 말했다: "그는 오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청화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가 보다. 아니면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 그는 시내의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한다. 북대, 사대...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자. 너희가 시내로 가서 그가 강연하는 것을 들으면 되지 않겠는가. 어쨌든 같은 거니까" 그러나,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말이 성립되기 힘든 것처럼, "청화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다"는 것도 평지돌출한 말이다. "그가 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다. "그가 오기 곤란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수는 있겠지만, 주자청은 사정을 몰랐으니 그저 "그가 오려고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 "그가 오기 곤란하다"는 점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오려고 하지 않는다"와 "오기 곤란하다"는 말의 배경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아마도 진기(陳沂)가 진속유(陳漱유)에게 보낸 장문의 서신에 나오는 배경과 관련이 있을 것디다: "노신의 5강은 좌련(左聯), 교련(敎聯), 문총(文總)이 앞장서서 어레인지 한 것이며, 구체적인 책임은 나, 범문란, 육만미 3 사람이 담당했다" "어떻게 노신을 접대하는지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문총과 토론한 적이 있고, 나는 범문란 동지와 특히 얘기한 적이 있다" 주자청은 "좌련"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좌익작가도 아니다. 그의 문장은 정치적인 색채를 띄지 않는다. 그래서 노신은 그와는 그저 수박겉핥기식의 얘기만 하였고, "좌련"에 관련되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주자청이 노신으로 하여금 청화에 와서 강연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진심이었고 성의있는 것이긴 했지만, 좌련,교련,문총이 나서서 어레인지하지 않은 것이므로, 노신이 가기 곤란했을 것이다. 당시 북경문총은 노신을 배우자고 주장하는 것이 구호중의 하나였고, 그의 "조직성"과 "기율성"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었다.

 

"좌련"의 업무에는 모종의 "좌"경관문주의경향이 강했다. "좌련"의 성립때부터, 노신은 이점을 아주 경계했다. 그는 <<좌익작가연맹에 대한 의견>>에서도 이렇게 제기한 바 있다: "전선은 확대되어야 한다". 북경의 좌익문화단체는 노신의 "북평5강"을 아주 조직적으로 어레인지했다. 노신이 북경에 겨우 10여일을 머물렀다. 진기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북평문총의 책임자와 얘기할 때, "좌경관문주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단결할 수 있는 사람과는 단결해야 한다"는 요구를 내놓았다. 이후 북평문총의 업무도 약간 변화가 생긴다.

 

이같은 경위로, 주자청이 두 번이나 노신에게 청화대학에 와서 강연해달라고 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노신에게 있어서,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는 5개월후, 노신이 왕지지(王志之)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33년 4월 23일, 주자청, 정진탁(鄭振鐸)은 함께 좌익의 문학잡지사에 참가했고, 북경 북해공원에서 거행된 차예화회에 참석한다. 당시 북경의 "좌련"업무를 하고 있던 왕지지는 노신에게 이 소식을 알린다. 노신은 아주 기뻐하며, 5월 10일 왕지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 주 가 모두 협력한다니 아주 좋다. 나는 우리의 태도를 약간 완화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크게 도움은 되지 않더라도, 악의만 품고 있지 않다면, 현단계에서 적이라고 할 수가 없다. 엄격하게 소리질러서 사람들을 천리밖에놔주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손실이다. 완벽한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완전한 것을 추구하면, 일부사람들은 멀어져 가고, 나쁜 자들이 와서 영합하고, 마음과 다르게 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을 뿐아니라, 가짜 친구를 얻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 편지에서 말하는 "정, 주 협력"은 바로 정진탁, 주자청이 좌련과 협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노신은 이런 "협력"을 아주 좋다고 인정했다. 이 말에서 노신이 "좌련"의 '전선은 확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주자청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도 보여준다. 그는 주자청과 그의 친구 정진탁을 동등하게 대우한다. 그가 보기에 좌련이 정진탁, 주자청같은 사람도 배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 손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