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노신)

왕회오(王會悟): 중공1대의 회무공작자

중은우시 2014. 1. 14. 23:10

글: 왕남방(王南方)

 

 

호주여숙(湖州女塾)의 학생시절 사진. 앞줄 가운데 앉은 사람이 왕회오. 앞줄 왼쪽은 장유정(張維楨)으로 남경중앙대학교장인 나가륜(羅家倫)의 부인이 되며, 앞줄 오른쪽은 모언문(毛彦文)으로 나중에 북양정부 총리를 지낸 웅희령(熊希齡)의 부인이 된다.

 

절강(浙江) 오진(烏鎭)메 막 도착해서, 왕회오기념관의 서료 전시품중에서 2가지 에피소드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배분으로 따지자면, 왕회오는 오진출신의 유명작가 모순(茅盾)선생의 표고(表姑)가 된다" 모순의 집은 관전가(觀前街)에 있고, 왕회오의 집은 관후가(觀後街)에 있다. 왕회오가 오진을 떠나서 상해로 간 것은 바로 모순이 안배해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왕회오가 회고글 <나는 당의 '1대" 회의장소를 안배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진귀한 사료이다. 나중에 가흥(嘉興) 남호(南湖)의 홍선(紅船) 전시품은 바로 이 글에서 제공한 사실을 기초로 복제한 것이다. 이 사료에서,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다. 욍회오의 남편 이달(李達)은 당의 "1대" 정식대표였고, 이달은 회의의 장소안배와 외지대표의 숙소안배등의 임무를 자신의 부인에게 맡겼다. 왕회오는 이렇게 하여 "1대"의 회무공작자가 된다.

 

왕회오의 옛집은 오진 서책(西柵)의 관후가에 있고, 고색창연하다. 현재는 기념관이 되었다. 관내의 전람판, 사진 및 실물은 사람들을 이 잘 알지 못하는 역사인물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문을 들어서면 서 있는 거대한 <남포풍광>의 병풍앞에, 홍선과 붙어 있는 단발머리에 대금의상(大襟衣裳), 흑색단군(黑色短裙), 유백단말(乳白短靺), 흑색포혜(黑色布鞋)의 강남소녀가 있다. 그녀가 바로 '1대'위사' '당의 초대 당무공작자'인 왕회오이다.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그녀의 얼굴에는 담정(淡定), 종용(從容), 기지(機智)와 용감(勇敢)을 느낄 수 있다.

 

왕회오의 회고록에서 두 부분의 내용은 아주 진귀하다. 여기에서 그 내용을 옮겨 적어본다.

 

"당의 '1대'에 출석한 사람에는 코민테른 대표인 마린(馬林)과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 대표인 니콜스키가 있었다. 그날, 이달은 나에게 마린과 그의 통역 양명재(揚明齋)를 회의장까지 호송하라고 했고, 그 후에 나는 아래층에서 문을 지키고 동정을 살폈다. 돌연 나는 한 낯선 사람이 상방에서 나와 위층으로 걸어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내가 급히 제지했고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이씨집안의 유리사가 답해서 말하기를 그는 질소야(侄少爺)의 학교친구라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위층으로 올라가서 양명재에게 말한다. 마린은 경계심이 아주 높았다. 소식을 들은 후 물건을 챙겨 바로 떠났다. 장국도(張國燾)는 당시 나에게 별 것도 아닌 일로 소란을 떨었다고 질책했다. 회의장은 해산했다. 해산후 얼마되지 않아 프랑스 순포(巡捕)가 과연 나타났다. 이한준(李漢俊)은 프랑스어로 순포에게 말한다: "오전에 나의 몇몇 친구들이 여기에서 19세기 르네상스운동에 대하여 토론하다가, 논쟁이 붙어서 여러분들을 놀라게 해드렸다. 미안하다." 순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여 그냥 돌아간다. 나중에 마린이 말했다: "이 여자아이(나를 가리킴0는 아주 기민하다. 잘 배양해야 한다.'"

 

"상해에서는 이미 회의를 열 수 없게 되었다. 어디로 가서 회의를 계속할 것인가? 대표들의 의견은 서로 달랐다. 내 생각에 내 고향 가흥의 남호는 관광객도 적고 숨기 좋은 곳이어서, 남호로 가서 화방(畵舫, 꽃배)을 하나 세내어 호수 가운데로 가서 회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달이 대표들과 상의했고, 대표들은 모두 이에 동의한다. 나는 구체적으로 사무를 안배하는 공작인원이 되어 먼저 출발한다. 동필무, 진담추, 하숙형와 함께 첫차를 차고 가흥으로 간다. 가흥에 도착한 후, 나는 원호여사(鴛湖旅社)에 방을 빌리고, 대표들이 쉬는 곳으로 했다. 그리고 여사에 중등의 화방을 하나 대신 빌리도록 부탁하고, 식탁과 요리를 부탁했다. 대표들이 배에 오르기 전에, 나는 아이디어를 내서, 그들에게 마작패를 한 벌 가져가도록 했다. 당의 제1차대표대회는 유람선위에서 하룻동안 개최되고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마작패를 가져갔다는 장면은 아주 재미있다. "1대" 대표들이 배에 오를 때, 왕회오는 특별히 마작패를 대표들에게 건네주고, 그들과 약정한다. 그녀가 배를 두드리면 그들은 바로 마작을 논다. 대표들이 선창내에서 회의를 하고 식사를 할 때, 그녀는 시종 뱃머리에서 보초를 선다. 다른 유람선이 가까이 오거나 순라선이 오면, 바로 가흥소조(嘉興小調)를 흥얼거리며, 뱃머리를 쳤다. 대표들은 이 신호를 받으면 바로 마작을 촤르륵 하면서 놀았다. 그리고 '칠색(七索)", "팔만(八萬)"하는 소리를 냈다.

 

사료를 보면, 당대표들은 상해북역에서 첫 기차를 타고 가흥으로 간다. 그리고 왕회오가 데리고, 배를 타고 호심도(湖心島)로 간다. 다시 작은 배를 타고 왕회오가 예약한 유람선으로 가서 회의를 한다. 이 유람선은 단협농사망선(單夾弄絲網船)이다. 길이는 약 16미터, 너비는 3미터, 뱃머리는 넓고 편평하며, 안에는 전창, 중창, 방창과 후창이 있다. 오른쪽에는 협농관통(夾弄貫通)이 있고, 회의는 중창에서 거행했다. 대표들은 호수유람이라는 명목으로 선주에게 배를 연우루(煙雨樓)에서 동남쪽방향으로 200미터 정도 떨어진 조용한 수역에서 오전 11시경, "1대"남호회의를 정식으로 개시한다. 오후 6시경, 회의는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폐막한다. 장엄하게 중국공산당의 성립을 선언하고, 전체 대표들은 가볍게 그 시대에 가장 강한 소리를 낸다: "공산당만세! 제3국제만세, 공산주의 만세!" 회의가 끝난 후, 대표들은 전후로 조용히 배를 떠난다. 그날 밤 분산하여 가흥을 떠난다.그들은 혁명의 불씨는 가지고 전국각지로 흩어진다. 중국의 역사는 이 때부터 완전히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1대"이후, 왕회오는 계속하여 혁명공작에 종사한다. 중국 최초의 부녀해방으 진보간행물 <부녀성> 반월간의 창간에 참여하고, 상해평민학교를 만들기도 했다. 저명한 작가 정령(丁玲)은 바로 그녀의 제자이다. 해방초기, 왕회오는 정무원(나중에 국무원으로 개명함)의 법제업무를 맡는다. 그후 계속 북경에서 일하다가 은퇴한다. 1993년 10월 28일 북경에서 사망하니, 향년 95세였다. "개천벽지일여걸(開天辟地一女傑)"이라는 말은 그녀에게 더 이상 타당할 수 없다.

 

1898년 7월 8일, 왕회오는 어미지향 절강성 동향현에서 태어났다. 부친 왕언진(王彦辰)은 만청 수재로 사숙을 열었다. 모친은 현숙하고 재능이 있었다. 자수는 원근에 이름을 날렸다. 왕회오는 6,7세부터 부친으로부터 교육을 받는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신사상, 신문화를 받아들여 사상이 진보적이었다. 그녀의 학교친구중에는 그녀보다 2살이 많은 친척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나중에 저명한 작가 모순이 되는 심안빙(沈雁氷)이다. 그들은 학교친구관계일 뿐아니라, 친척관계이다. 배분으로 따지면 왕회오는 심안빙의 고모뻘(표고)이다.

 

왕회오가 13살때 부친이 병사하고, 가정경제는 쪼들리게 된다. 그녀는 부득이 가흥사범학교에서 퇴학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부친의 업을 이어받아 아이들을 가르킨다. 얼마후 학생수가 점점 늘어나서 그녀는 전당을 하나 빌려 혼자서 동향현 최초의 여자소학교를 만든다. 고향사람들은 모두 말했다: "소왕선생이 가르키는 것은 노왕선생에 못지 않다!" 그리하여 이 여자소학교에 대한 지지와 격려를 나타내기 위하여, 현지의 교육부서는 교원들에게 5위안의 보조금을 주었다. 가르치는 기간동안 왕회오는 책을 가르치면서, 신사상을 선전하고 신풍속을 창도했고, 여자아이들에 머리를 자르고, 전족을 하지 말도록 얘기했다. 한번은 그녀가 한 어린아이가 두 발을 꽉 싸고있는 것을 본다. 그녀는 그녀의 발을 풀어준다. 어린 아가씨는 난감한 것이 말한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아무도 나를 안데려가면 어떡해요" 왕회오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사회가 진보한다. 네가 말을 전족하면 아무도 데려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진의 한 수재가 5위안의 보조금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사방에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왕회오는 어린 여자로 정규교육을 받은 바 없어 선생이 될 자격이 없다>" 그리고 현에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 맡겠다고 신청한다. 그리고 자신은 5위안은 필요없고, 3위안이면 된다고 말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현에서는 동의해준다. 1918년, 왕회오는 이런 멸시를 당하고 있을 수 없어 분연히 학교를 떠난다. 호주(湖州)로 가서 호주여숙(湖州女塾)에서 영어를 배운다. 이곳은 원래 미국인이 만든 교회학교였다. 처음에 그녀는 일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학교의 청소도 맡았다. 나중에 선생은 그녀의 중국어기초가 탄탄한 것을 보고, 그녀를 교장에게 추천한다. 고찰을 거쳐 교장은 왕회오에게 학교못사부인들을 가르치게 한다. 이리하여 그녀는 '교사'가 된다.

 

학교에 있는 동안, 그녀는 자주 <신청년>잡지를 읽었고, 백화문으로 대담하게 진독수, 이달, 운대영등 그녀가 존경하는 사회명사들에게 편지를 쓴다. 백화문창도에 찬성한다고 표시하고, 그들이 선전하는 신사상과 신문화운동을 옹호한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의외이게도, 진둑수가 그녀에게 회신을 보내어준다: "우리의 신사상이 교회학당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왕회오에게 "담량과 견식이 있다"고 칭찬하고 그녀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고 격려해준다.

 

1919년, "5.4"운동이 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회오는 상해로 간다. 부녀독립해방운동의 길을 찾기 위함이었다. 소개를 받아 상해중화여계연합회에서 문비(文秘)업무를 맡는다. 그 동안 이달은 일본유학생총회의 대표로 귀국하여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여련(女聯)"과도 왕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왕회오와 이달은 업무를 하면서 알게 된다. 이달은 자주 그녀에게 봉건제도를 전복시키고 부녀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공산당을 조직해야한다는 이치를 설명했다. 1920년, 이 뜻이 맞는 한 쌍은 상해 진독수의 집 객청에서 혁명화된 혼례를 개최한다.

 

1921년 7월, 중공1대회의가 상해에서 개최된다. 왕회오는 대회의 준비업무를 맡는다. 이달과 이한준은 각지대표를 상해로 불러 회의에 참가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숙식, 회의장소등 막후업무는 모조리 왕회오가 책임진다.

 

회의장소는 왕회오가 여러 곳을 찾는다. 그러나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중에 이한준의 집으로 가보고는 그 집의 진짜 주인이 이한준의 형제인 이서성(李書城)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서성은 국민당의 군사부장이었고, 마침 집에 없었다. 이한준도 프랑스조계의 한 서양식집에 살고 있었다.

 

1921년 7월 23일, 중국공산당 제1차전국인민대표대회가 이한준의 집에서 개최된다. 대표들의 회의할때, 왕회오가 후문입구에서 망을 보았다. 돌연 한 젊은이가 손에 젖은 의복을 들고 건물위로 뛰어갔다. 왕회오는 일이 이상하다고 여겨 급히 위츠으로 뛰어올라가, 상황을 문앞 부근에 있던 통역 양명재에게 말한다. 양명재는 즉시 코민테른대표인 마린에게 통역해서알려준다. 마린은 즉시 휴회를 선포하고, 급히 문건을 챙겨서 떠난다. 산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조계순포방에서 경찰차를 몰고 온다. 완전무장한 사병이 건물을 포위한다. 그중의 몇몇 순포는 이한준의 집으로 쳐들어와서 그들이 오전에 무슨 회의를 했는지 추궁한다. 이한준은 유려한 프랑스어로 답했다: "오전에 몇몇 교수들이 와서 이탈리아 문예부흥문제를 토론했다." 순포들은 헛점을 찾을 수 없었고, 꺼리를 잡지 못하여 할 수 없이 돌아간다. 그후 이달은 왕회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너는 큰 공을 세웠다!"고 말한다. 다행히 왕회오가 적시에 알려주는 바람에 대표들은 적시에 흩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개회기간 밀탐의 돌연한 침입으로 회의는 또 다른 장소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회의는 이틀동안 중단도고, 대표들은 여러 회의장소를 제안한다. 어떤 사람은 상해로 가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서호로 가자고 했다. 다만 대표들은 분석을 거쳐 모두 이들 장소가 비록 좋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너무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부결된다. 이때, 왕회오는 자신의 고향을 떠올린다. 그래서 가흥의 남호로 가서 계속 회의할 것을 제안한다. 그녀는 말한다: "우리 고향 동향에서 멀지 않은 가흥에 남호가 있다. 그 곳은 항주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풍경을 수려하다. 우리는 화방을 하나 빌려서, 서호를 구경하러 가는 길에 남호에 들른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석자들은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 왕회오는 구체적인 사무를 안배하는 업무인원으로 남호유람선에서의 중공 "1대"회의소집에서 유일한 비대표구성원이 된다.

 

회의의 안전한 진행을 확보하기 위하여, 왕회오는 주도면밀하게 안배한다. 그녀는 선주에게 배를 연우루에서 동남방향 200미터 떨어진  비교적 조용한 수역에 상앗대(篙)를 꽂아서 서 있게 하고, 대표들은 중창의 객당칸에 있는 팔선탁에 둘러앉아 안심하고 회의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 자신은 뱃머리에 앉아서 망을 보았다. 회의의 '보초'가 된 셈이다. 일단 다른 유람선이 다가오면, 가흥소조를 흥얼거리며 손가락으로 선창문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었고, 대표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가리기 위하여, 그는 특별히 마작패를 한 벌 준비해서, 대표들이 회의하는 탁자위에 놓아두었다. 점심때의 식사도 그녀는 선주로 하여금 작은 배를 타고 큰 배로 가져오게 했다. 그날 오후 회의가 진행되는 중 호수 위에 돌연 기정(汽艇)의 모터소리가 들렸다. 대표들은 경찰의 순라선이라고 생각하고 잠시 회의를 멈추고 마작을 했다. 왕회오는 즉시 작은 배를 타고 호심도로 가서 알아본다. 그리고 한 부잣집의 개인유람선이 호수를 유람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회의는 다시 원래대로 진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가흥남호의 유람선 위에서, 모택동, 동필무, 하숙형, 진담추등 대표들은 "1대"의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하고 아후 6시경 회의가 끝난다. 이 순간이 바로 중국공산당이 성립을 선언한다.

 

"1대"회의가 끝난 후, 왕회오는 중국공산당 최초의 부녀간행물 <부녀성>을 창간한다. 이 간행물은 1921년 12월 10일 창간되었고, 왕회오는 이 간행물의 주요책임자였다. 그녀는 원고심의외에 스스로 글을 쓰기도 했다. 이 간행물에 그녀가 발표한 글도 <중국부녀운동신동향>, <호남여공의각오>등의 글이 있다. <부녀성>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10기까지 발간한다. 그러나 첫번째 부녀간행물로서 세계각국부녀운동의 최신동향을 소개했고, 부녀운동의 선진형검을 소개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발휘한다.

 

1922년, 왕회오는 상해평민여자학교를 설립하는데 참여한다. 왕회오는 이 학교의 공작부 주임을 맡는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 설립된 첫번째 신형학교였다. 신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학교가 반공반독(半工半讀, 일하면서 공부하는)학교일 뿐아니라 당시 당의 비밀연락점이었다.

 

1922년말, 이달은 모택동의 요청으로 장사 호남자수대학의 교무를 주재한다. 왕회오도 같이 따라간다. 그리고 이 학교의 부속중학에서 영어를 가리킨다. 대혁명실패후, 그녀는 왕소구(王嘯鷗)로 개명하고, 필경당서점(筆耕堂書店)을 만들어 마르크스주의 저작을 많이 출판한다.

 

1937년 5월, 이달의 <사회학대강>이 출판된다. 이 책을 만드는데 글을 옮겨적는 일, 출판, 발행은 모두 왕회오의 심혈이 들어 있다. 그녀는 이 책을 연안으로 보낸다. 모택동은 아주 기쁘게 이 책을 읽었고 상새한 미비(眉批)를 쓴다. 이 책은 중국인 자신이 쓴 첫번째 마르크스레닌주의철학교과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달에게 보내는 회신에서 열정적으로 그들 부부를 칭찬한다: "너희는 진정한 사람이다."

 

1945년, 모택동은 중경으로 담판을 하러 간다. 당시 왕회오는 마침 중경에서 진보활동에 참가하고 있어서, 융중한 환영대회에 참가한다. 대회후 모택동과 단독으로 접견하기도 한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왕회오는 정무원에서 법제업무를 수행했다. 여러해동안 힘들게 일을 해서 이직하여 휴양하다가 1993년 10월 20일, 북경에서 병사하니 향년 95세이다.

 

왕회오는 일생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묵묵히 남편을 도와 마르크스주의를 선정했고, 혁명활동에 종사했다. 그녀는 중국공산당 성립의 산증인일 뿐아니라, 중공 "1대"의 유일한 여성참가자이다. 그녀는 당의 부녀해방을 위해 공헌을 하였고, 영원히 인민의 마음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