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사열독(文史悅讀)
역사상 깡패황제는 아주 많다. 다만 그중 제1류의 깡패황제를 꼽으라면 후량(後梁) 태조(太祖) 주온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주온은 중국역사상 전설적인 인물이다. 모택동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주온은 사방과 싸워야 하는 처지여서, 조조와 약간 비슷하다. 그러나 조조보다 더 교활했다." 조조보다도 교활했다니, 이를 보면, 주온이 얼마나 간사하고 교활했을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주온은 송주(宋州) 탕산(碭山) 사람이다. 형제 3명중 셋재였다. 주온이 아직 미성년일 때, 부친은 돌아가셨다. 주온의 모친은 세 아들을 데리고 소현(蕭縣)의 지주인 유숭(劉崇)의 집에서 일을 했다. 주온의 모친은 유숭의 집에서 베를 짜고 빨래를 하는 일을 했다. 첫째,둘째는 소를 키우고 밭을 갈았으며, 주온은 돼지를 키웠다. 이때까지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돼지를 키우던 아이가 나중에 후량의 개국황제가 될 줄이야.
주온은 어려서부터 창(槍), 봉(棒)을 가지고 놀기를 즐겼다. 만용흉한(蠻勇凶悍)했다. 자주 마을에서 시비를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고향사람들은 그를 싫어했다. 집안에서 막내이므로, 주온은 모친의 사랑을 듬쁙 받는다. 그러나 남의 집에 살다보니 다른 사람보다 지위가 한 단계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수를 지키려 하지 않았고, 주온의 모친도 그에게 남보다 못하게 살지 말라고 질책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친의 앞에서 사랑도 받고 질책도 받았다; 그러나 주인 유숭의 앞에서는 백안시당하고 얻어맞기까지 했다. 이런 성장환경은 자연스럽게 주온에게 교활하고 간사한 품성을 기르게 했다. 나중에 그가 천하군웅이 쟁패하는 도도한 흐름에 뛰어들었을 때, 교활함은 즉시 도략(韜略)이 되고, 간사함은 즉시 지모(智謀)가 된다. 그리하여, 이 밑바닥 청년은 험악한 환경속에서도 연이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고, 결국은 그의 제업(帝業)을 완성하게 된다.
주온이 젊었을 때 사냥을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그가 사냥을 좋아한 덕분에 혼인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하루는 그가 둘째형과 송주의 교외로 사냥을 나갔다. 우연히 용원사(龍元寺)로 향을 올리러 가던 대갓집규수 장혜(張惠)를 만난다. 이 장혜는 바로 송주자사(宋州刺史) 송유(宋蕤)의 딸이었고, 온유하며 현숙했고, 총명하며 아름다웟다. 그녀의 이름 그대로였다. 주온은 장혜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그래서 둘째형에게 말한다: "한나라 광무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않느냐. '관직에 나가려면 집금오를 해야 하고, 처로 취하려면 음려화를 취해야 한다'고 옛날의 음려화도 이러했을 것이다. 나라고 한나라 광무제처럼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언젠가 나는 장씨집안의 딸을 취해서 처로 삼아야 겠다고 말한 것이다. 둘째형 주존(朱存)은 동생을 비둣으면서, 게으른 하마가 거위고기를 먹으려는 것이라며 스스로의 주제를 알지 못한다고 놀리고, 동생의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던 그 가난뱅이 아이가, 나중에 자신이 원하던대로 장혜를 처로 맞이하게 될 줄이야. 그리고 이 대갓집규수를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해서, 천고의 전설로 남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길 줄이야.
당희종(唐僖宗) 건부(乾符)2년, 즉 875년, 기세가 엄청난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난다. 당시 나이 26살이던 주온은 둘째형 주존과 함께 농민반란군에 가담한다. 얼마후 주온은 신체건장하고 전투에서 욤맹하여, 적진을 뚫고 들어가 함락시켜 여러번 승리를 거두게 되니, 반란군내에서 금방 두각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반란군의 두령인 황소의 심복장수로 성장한다.
반란군에 가담한 후, 주온은 꿈속의 애인인 장혜를 잊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농민군장군들처럼 포로로 잡아온 양갓집규수를 자신의 처로 삼지 않았다.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애인을 만나기 위하여, 그는 황소에게 송주를 공격하도록 종용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주자사 송유는 이미 퇴임했고, 후임자사는 성을 굳게 지켰고, 게다가 관병이 사방에서 지원을 오게 됨에 따라, 농민군은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다.
황소가 장안을 함락시켜 대제(大齊)정권을 건립한 후, 주온을 동주방어사(同州防禦使)에 임명한다. 그러나, 바로 이때, 그는 부모가 모두 죽고 난민이 되어 떠돌던 장혜와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당시, 장혜는 동주로 흘러들어왔다가, 주온의 부하에게 약취된다. 그녀의 미모가 출중한 것을 보고, 부하는 그녀를 주온에게 바친다. 주온은 눈앞의 여자가 장혜라는 것을 알아보고나서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그러나 장혜는 주온을 아예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주온이 자신의 고향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고 수년전에 자신에게 마음을 주고, 지금까지 잊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아주 감격한다. 주온은 그 기회에 그녀에게 잘 대해주면서 장혜를 처로 삼고싶다고 얘기한다. 이때의 장혜는 집안도 망하고 가족도 흩여져서, 유리걸식하며 갈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주온이 진심을 보고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융중하게 혼인을 치르기 위하여, 주온은 천신만고끝에 장혜의 숙부를 찾아내고, 고대의 예의에 따라 삼매육빙(三媒六聘)하고 길일을 택하여 성혼한다. 이를 보면 그가 이 결혼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비록 이 전설은 일시의 기담으로 전해지지만, 일부 농민군에 반대하는 사람은 이 결혼에 대하여 반대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이런 타유시(打油詩)를 남겼다: "거연강도식풍류(居然强盜識風流), 숙녀야지부호구(淑女也知賦好逑). 시간동주교배일(是看同州交配日), 명봉경이배추구(鳴鳳竟爾配啾鳩)(강도도 풍류는 알고, 숙녀도 짝을 찾을 줄 안다. 동주에서 결혼하는 날을 보라. 봉황이 까마귀와 결혼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성공한 남자의 배후에는 반드시 현명한 여인이 있다고. 장혜는 바로 주온을 도와 제업을 이루게한 현명한 여인이다. 바로 정치적 재능이 뛰어난 장혜가 도와주었기 대문에, 주온은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풀뿌리황제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소종(唐昭宗) 천우(天佑) 원년, 즉 904년, 장혜는 병이 위중해진다. 당시 당나라황실의 대권은 주온이 장악하고 있었다. 주온은 당소종을 핍박하여 선위하게 하려는 때였다. 그러나, 장혜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밤을 새워가며 달려서 변경으로 간다. 장혜는 당시 이미 몸이 말라서 작대기같았고, 혼미하여 정신도 없는 상황이었다. 주온은 대성통곡을 한다.
장혜는 곡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눈을 뜬다. 주온이 침대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슬프게 오열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주온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더욱 비통해하였다. 장혜는 주온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장탄식을 하며 온 몸의 힘을 끌어내어 말한다: "부군께서 홍곡의 뜻을 지니고 있으니, 그것은 신첩이 잘 아는 분야가 아니다. 다만 첩에게 한 가지 할 말이 있다. 그것은 부군이 영무과인(英武過人)하여 다른 일은 걱정되지 않으나 단지 "계살원색(戒殺遠色, 살인을 삼가고 여색을 멀리하라)"의 네 글자는 부군이 수시로 주의해주길 간청한다. 그래야 신첩은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 장혜는 그 말을 마치고 홀연히 세상을 뜬다. 주온은 통곡을 그치지 못하고 상심해 마지 않는다. 장혜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표시하기 위하여 주온은 황제위에 오른 후 장혜를 원정황후(元貞皇后)로 추존한다.
기실, 주온은 일생동안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인다. 그는 기업을 개창한 명군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자는 절대로 오래갈 수가 없다. 그가 한동안 북방에서 종횡무적할 수 있었던 것은, 천시, 지리 이외에 운이 좋았던 것도 있고, 장혜가 그의 잔혹하고 포악한 성격을 견제해줄 수 있었던 것도 아주 중요한 원인이다. 다만 어찌되었건, 잔혹하기가 이리와 같은 효웅이 섬섬옥수의 약한 여자에게 제압당하다니, 그것은 놀라서 탄식해 마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전설적인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천우4년, 즉 907년, 56세의 주온은 심복들의 기획하에, 당애제(唐哀帝)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국호는 양(梁)이라 하니, 그가 양태조이다. 황제에 오른 주온은 시종 농민의 근성과 도적의 행태를 버리지 못했다. 자주 궁내에서 하고싶은대로 하곤 했다.
한번은, 주온이 궁중에서 집안연회를 연다. 술에 잔뜩 취한 후에, 동생,형,조카들과 주사위를 던져서 도박을 했다. 도박의 열기가 뜨거워지자, 돈을 딴 사람은 기뻐서 날뛰고, 돈을 잃은 사람은 눈이 벌개졌다. 윗사람 아랫사람도 가리지 않고, 군왕과 신하의 신분도 가리지 않고 서로 욕을 해댔다. 전체 황궁이 엉망진창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주온은 여색을 밝혔다. 장혜가 살아있을 때는 그가 감히 다른 여인을 가까이 하지 못했다. 장혜가 죽은 후, 그는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성욕이 폭발한다. 그리하여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진다. 개인생활이 지저분한 정도는 듣는 사람이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자신의 죽음의 화근을 심게 된다.
주온이 대신 장전의(張全義)의 집에서 피서를 할 때, 군신의 예를 돌보지 않고, 장씨집안의 "부녀를 모조리 건드리며" 10여일간 지낸다. 더욱 사람들의 욕을 얻어먹은 것은 주온이 아들들을 지방을 지키는 관리로 외지에 보낸 후, 며느리들로 하여금 돌아가며 입궁하여 시침을 들게 한 일이다. 주온의 아들들은 부친의 난륜행위에 분노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염치없게도 처를 이용하여 부친의 침상에서 총애를 다투게 하였고, 온갖 수단을 써서 주온에게 잘보이고 환심을 사려고 했다. 이를 통하여 자신이 황위를 승계받으려 한 것이다. 주온의 양자(養子) 주우문(朱友文)의 처 왕씨는 미색이 뛰어났다. 그리하여 주온의 환심을 산다. 그녀가 계속 베갯머리송사를 하는 바람에, 주온은 나중에 주우문이 즉위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처럼 며느리의 미로를 가지고 누가 황위를 계승할지를 결정하는 방식은 천고에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다.
주온의 병이 위중할 때, 주우문을 동도에서 낙양으로 불어들여 후사를 부탁하고자 한다. 주온의 친아들 주우규(朱友珪)의 며느리 장씨는 주온의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주온이 주우문에게 황위를 전하려는 것을 보고는, 즉시 이 일을 자신의 남편에게 알린다. 주우규는 부친이 양자를 편애하는데 아주 분노했고, 먼저 손을 쓰기로 결정한다. 그는 몰래 몇몇 주온에게 불만을 가진 문무대신들과 연합하여 밤에 행동을 거행하려고 한다. 그는 먼저 옷을 갈아입고 좌용호군(左龍虎軍)으로 간다. 통군 한경(韓勍)을 만난 후, 주온이 주우문을 후계자로 앉히려 한다는 것을 한경에게 얘기한다.
한경은 공신숙장들이 여러명 작은 잘못을 저질러 주온에게 주살된 것을 보면서,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우규에 협력하기로 결정한다. 한경은 사전에 오백의 심복 아병(牙兵)을 보내어 금궁부근에 몰래 매복시킨다. 한밤중에 돌연 문을 열고 들이닥쳐서 주온의 침전으로 간다. 황궁내의 태감궁녀들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고, 사방으로 도망친다. 주온은 깨어난 후에 즉시 아들 주우규의 심복 풍정악(馮廷諤)의 칼 한방에 죽는다.
주온이 피살될 때 나이가 61세였다. 죽기전에, 그는 아마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은 일생동안 무수한 사람을 죽였는데, 마지막에는 자신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줄은. 일생동안 여색을 탐했는데, 마지막에 여자때문에 일생을 마치게 될 줄은.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그가 진심으로 장혜를 사랑했는데, 그녀가 마지막 남긴 "계살원색"의 4글자 유언을 따르지 않아서, 마지막에는 신패명렬(身敗名裂)하게 된 것이다. 주온의 성공은 현명한 처 장혜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이다. 최종적으로 피살된 것은 현처 장혜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현명한 처는 대업을 이루는 남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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