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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오대십국)

풍도(馮道)의 육기(六奇): 중국역사상 유일한 '십조원로(十朝元老)'

by 중은우시 2012. 5. 3.

글: 손옥량(孫玉良)

 

 

 

중국역사상 세번의 대동란시대가 있었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 오대십국시대. 그 때는 정말, '네가 노래를 다 부르면 내가 올라간다'는 식으로 중화대지에는 56개민족의 엘리트들이 속속 등장했다. 난세에 얼마나 많은 지식인, 얼마나 많은 영웅이 나타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풍도는 오대사를 목격한 유일한 기인이다. 어떤 사람은 그를 '십조원로'라 칭하고, 관료사회의 오뚜기라고 칭한다. 어떤 사람은 그의 등뼈가 잘굽으며, 중국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매국노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가 '무위(無爲)'의 도,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잘 깨달은 사람이며, 관료사회에서 노자의 도를 깨친 사람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정치적 업적은 전혀 없고, 아무런 성취도 거둔 것이 없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인격수양이 대단했고, 대지대성(大至大聖)의 완벽한 사람이라고 했다. 더더구나 어떤 사람은 그가 민심을 잘 헤아렸으며, 인인군자라 할만하다고 했다....

 

풍도에게는 여섯가지 기이한 점이 있다(六奇).

 

첫번째 기이한 점은 오대십제를 겪었다는 점이다. 풍도는 오대십제(五代十帝)를 모셨다. 중국역사상 유일한 '십조원로'이다. 경극을 많이 들은 사람들은 경력이 많은 사람을 언급할 때, '삼조원로(三朝元老)'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껏이다. 풍도는 그것보다 세 배나 많은데다가 하나를 더했다. 그는 걸연황제(桀燕皇帝) 유수광(劉秀光), 후당장종(後唐莊宗) 이존욱(李存勖), 후당명종(後唐明宗) 이사원(李嗣源), 후당민제(後唐閔帝) 이종원(李從原), 후당말제(後唐末帝) 이종가(李從珂), 후진고조(後晋高祖) 석경당(石敬塘), 후진출제(後晋出帝) 석중귀(石重貴), 요태종(遼太宗) 야율덕광(耶律德光), 후한고조(後漢高祖) 유지원(劉知遠), 후주태조(後周太祖) 곽위(郭威)의 십조를 거친다. 기본적으로 모든 왕조에서 그는 중용되었고 명실상부한 '관료사회의 오뚜기'이다.

 

두번째 기이한 점은 항상 '명주(明主)'로 바꾸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매국노'로 칭해지지 않았다. 풍도의 성격은 지금 보면 마치 담장위의 풀과 같다. 바람이 부는대로 숙인다. 누가 강하면, 누가 세력이 있으면, 그는 그에게로 갔다. 염치는 별로 없었고, 기개도 없었다. 특히 거란에 투항할 때 그는 한 마디 말을 한 바 있다: "남조는 아들이고, 북조는 아버지이다. 두 왕조의 신하가 되는 것이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야율덕광은 그를 태부(太傅)로 삼는다. 그리하여, 약간의 염치가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자빠진다. 기괴한 점은 그후의 후한고조 유지원, 후주태조 곽위가 모두 이 일을 가지고 그를 멸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두 왕조에서 연이어 태사(太師)에 오른다.

 

세번째 기이한 점은 절개가 없는 풍도가 책벌레라는 점이다. 풍도는 비록 이처럼 절개가 없었지만, 그가 무지렁이였던 것은 전혀 아니다. 풍도는 당시 유명한 책벌레이다. 그는 성현의 책을 많이 읽었고, 거의 책에 목말라하는 정도였다. 그는 출신이 한미했고, 조상은 어떤 때는 농사를 짓고, 어떤 때는 글을 가리켰다. 그 영향을 받았다. 풍도는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아주 좋아했고, 먹고 입는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큰 눈이 내려 문앞이 막혀 나갈 수가 없어도, 책만 읽었다. 그래서 지식이 많았고, 그 명성을 얻어 대강남북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된다. 어느 왕조이건, 모두 그를 관리로 초빙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그가 남조에서 관리를 지낼 때, 북조의 거란은 풍도의 대명을 듣고, 그를 습격하여 납치해가려고까지 한다. 단지 변방의 방비가 엄밀하여,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다.

 

네번째 기이한 점은 비록 절개가 없었지만, 그는 탐관오리는 아니었다. 풍도가 아부를 잘하니, 분명히 백성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탐관오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반대였다. 풍도는 자신에 엄격했고, 민간의 고통을 잘 헤아렸다. 그는 호인이었다. 그의 고향에서 기근이 들었을 때, 풍도는 자신의 집안의 재물을 아끼지 않고 전부 내놓아 고향사람들을 구해준다. 그리고 자신은 초가집에서 생활한다. 그가 고향에서 부친상을 지낼 때, 고향사람들 앞에서 관료로서의 폼을 잡지 않았다. 친히 밭일을 하고, 산에 가서 나무를 베었다. 그리고 노동력이 부족한 집은 최대한 도와주려고 했다. 남북의 전란이 빈번했을 때, 풍도는 북방에서 도망쳐 온다. 약탈된 중원부녀를 보면, 그는 차마 그냥 두지 못해서, 재물을 팔아서 그녀들을 사서는 사람을 시켜 그녀들을 하나하나 원래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보살의 마음을 가졌다. 더욱 고귀한 점은 풍도가 호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후당과 후량이 전투를 벌일 때, 어떤 무장이 약탈해온 미녀를 그에게 보내준다. 풍도는 '금옥장교'한다. 집을 구해서 그녀를 살게 하고, 그녀의 집을 찾은 후에 그녀를 돌려보낸다. 그가 남긴 유언에는 사후에 쓸모없는 땅을 골라서 안장해주면 된다고 썼다. 후당명종 이사원에게 진언할 때, 풍도는 이렇게 말한다: "곡물가격이 비싸지면 농민은 굶고, 곡물가격이 싸지면 농민들이 손해를 봅니다. 이것이 통상적인 이치입니다. 신은 근대거인 섭이중의 시 <상전가시>를 기억합니다: 이월매신사(二月賣新絲), 오월조추곡(五月糶秋穀), 의득안하창(醫得眼下瘡), 완각심두육(剜却心頭肉), 아원군왕심(我願君王心), 화작광명촉(化作光明燭), 불조기라연(不照綺羅筵), 편조도망옥(偏照逃亡屋)," 그가 이렇게 권하여, 후당명종은 일대명군이 된다.

 

다섯째 기이한 점은 관직이 많기로 중국역사상 최고라는 것이다. 풍도는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많이 지냈는데, 다음과 같다: 유주절도순관, 하동절도순관, 장서기, 섭유주참군, 시대리평사, 한림학사, 단명전학사, 집현전대학사, 검교상서사부랑중겸시어사, 검교이부랑중겸어사중승, 검교태위, 동중서문하평장사, 검교태사겸시중, 검교태사겸중서령, 행대중서사인, 호부시랑을 거치고, 병부시랑, 중서시랑, 문하시랑, 형부상서, 이부상서, 우복야, 사공, 재중서, 사도겸시중, 태위겸시중, 태부, 태사등 40여종에 달한다. 풍도가 거친 역대 산계(散階)는 사랑(仕郞), 의랑(議郞), 조산대부, 은청광록대부, 금자광록대부, 특진(特進),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였다. 그의 무직훈작은 주국(柱國)에서 상주국(上柱國)까지 올랐다. 역대 작위는 개국남작, 개국공, 노국공, 진국공, 양국공, 연국공, 제국공을 거친다. 식읍은 삼백호에서 1만1천호까지, 식실봉은 1백호에서 천팔백호까지이다.

 

여섯째 기이한 점은 단 하나의 정치적 업적도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풍도는 비록 글을 많이 읽고 난세에 강산을 평정한 장수도 아니고, 어느 군주를 도와서 나라를 잘 다스린 양신도 아니다. 그는 비록 고위직에 있었지만, 그가 오대난세의 정국변화과정에서 어떤 구체적인 작용을 했는지, 그리고 그와 일부 중대사건과의 관계는 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는 '전문' 관료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는 업적이 있는 정치가는 아니다. 나중에 구양수가 <신오대사>를 편찬할 때, <구오대사>의 풍도에 관하여 분식한 내용을 모조리 삭제한다. <풍도전>은 원래의 근 5천자에서 2천자도 되지 않게 축소된다. 풍도는 자칭 "무재무덕치완노자(無才無德痴頑老子)"이다. 그는 도가 노자의 '무위'에서 '관료로서의 도리'를 깨달았다. '상선약수'에서 물을 흐름을 따라가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남긴 하나의 시는 자신의 마음을 표시한다: "막위위시편창신(莫爲危時便悵神), 전정왕왕유기인(前程往往有期因), 종문해악귀명주(終聞海岳歸明主), 미성건곤함길인(未省乾坤陷吉人), 도덕기시증거세(道德幾時曾去世), 주차하처불통진(舟車何處不通津), 단교방촌무제악(但敎方寸無諸惡), 호랑총중야입신(虎狼叢中也立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