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은하(水銀河)
황제의 정실부인이 된 여자를 황후(皇后)라고 칭한다. 이것은 기본상식이다. 그러나, 중국의 5천년 역사에는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났다. 수많은 황후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 여자는 남편이 황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황후의 봉관(鳳冠)을 썼다. 이 여인은 바로 당나라말기의 군벌 이무정의 부인인 이씨이다.
이씨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사서에서 그녀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녀가 어떻게 황후가 되었는지를 설명하려면 그녀의 남편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실제로 이 여인이 황후가 된 것은 이무정의 의음(意淫, 정신적 마스터베이션)의 산물이다. 이무정은 운이 억세게 좋은 인물이다. 그의 원래 성은 송(宋)이고 이름은 문통(文通)이다. 지금의 하북성 여현에서 태어났다. 먹고 살기 위하여, 영광스럽게도 군대에 들어간다.그는 힘든 군인생활을 거쳐, 장교까지 오른 후에 은퇴한다. 그런데 기회가 왔다. 낙방서생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장안으로 공격해 들어가서 당시 황제인 당희종(唐僖宗)이 도망을 간다. 그는 황명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황제를 호위한다. 이렇게 호위의 기회를 잡은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후에 그의 관운은 탄탄대로였다.
그는 먼저 황소의 부하인 상양(尙讓)을 격파한다. 그후에 바로 난에 가담한 주매(朱玫)까지 격파한다. 당시의 황제인 당희종은 친히 그의 활약을 목격하고, 신하들로부터 추천을 받기도 전에, 그를 절도사에 임명한다. 동시에 그의 정치적인 신분을 높여주기 위하여 황제의 성인 이(李)씨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무정으로 바꾸게 한다. 이때부터 그는 황실과 한집안사람이 된다. 당시 반란진압에 참가했던 지방호족은 많았다. 그러나 그와 같이 관직이 수직상승한 경우는 드물다. 어쨌든 그는 황제의 곁에 있었다. 황제와의 거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소가 장안성에서 쫓겨난 후, 당희종은 환궁한다. 호송한 사람은 다름아닌 그였다. 부대가 봉상(鳳翔)을 지나갈 때, 현지 절도사인 이창부(李昌符)는 지방호족으로 황제일행의 길을 가로막고 통행료를 요구했다. 당희종은 이무정을 보내어 전투를 벌이게 한다. 그는 이창부를 무찔렀을 뿐아니라, 그의 수급까지 베어가지고 온다. 이렇게 하여 땅바닥에 떨어진 당희종의 체면을 조금이나마 살려준다. 기쁜 나머지 당희종은 봉상과 농우를 모두 그에게 하사하고, 그를 농서군왕에 봉한다.
자신의 첫번째 기반이 생기자, 이무장은 즉시 확장을 시도한다. 신속히 두번째, 세번째 기반을 차지한다. 그는 봉주(鳳州, 지금의 섬서성 봉현 서북), 양주(洋州, 지금의 섬서성 서향), 경원(涇原, 지금의 감숙선 경천 북쪽)의 세 곳을 차지한다. 그리고, 목표를 황위로 잡는다. 당연히 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하나의 원인은 장안과 거리가 제일 가까웠다는 것이다. 이때의 황제는 벌써 당희종에서 그의 동생인 당소종(唐昭宗)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형인 당희종처럼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이상이 원대했다. 당나라의 기세를 되살리고 싶어했다. 그러다보니, 이무정과 충돌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이무정은 병력이 강했고, 몇번 장안을 공격해 들어간다. 당소종을 압박하여 두양능, 이계와 외소도등 3명의 재상을 죽이도록 한다. 그리고 기왕(岐王)에 오른다. 나중에 그는 아예 환관 한전회에게 명하여 황제를 자신의 소굴인 봉상으로 납치해오기도 했다. 천자를 옆에 끼고 천하를 호령한 것이다. 천하의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다. 모두 황제가 좋은 패라는 것을 알았고, 서로 황제를 데려가고자 한다. 이때의 이무정은 이미 운이 다한 것같다. 할 수 없이 황제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후에 그는 기를 펴지 못한다. 자신의 땅도 절반으로 줄어든다.
주온(朱溫)이 당나라를 멸망시킨 후, 곳곳에 황제가 나타난다. 이때의 이무정은 골치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수대초풍(樹大招風, 큰 나무가 바람을 맞는다)을 피하기 위하여, 여전히 스스로를 '기왕'으로 칭한다. 다만, 명칭은 명칭이고, 황제놀이를 위하여, 그의 의전은 모두 황제와 같았다. 의복도 황제와 같았다. 심지어 부인까지도 황후라고 개칭한다. 결국 그의 땅은 22개주에서 7개주로 쪼그라든다. 그런데, 황제는 되지 못했지만, 이로 인하여 대당의 '충신'은 된다. 대외적으로는 항상 자신이 멸망한 당나라의 기왕이라고 자처했다. 주온이 후량에 멸망한 후에, 그는 후당의 이존욱(李存勖)에게 귀순한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하니 향년 69세이다. 황후인 부인도 그와 함께 오늘날의 보계(寶鷄)시 진왕릉(秦王陵)에 합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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