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오대십국)

주우규(朱友珪):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군기(軍妓)소생인 황제

by 중은우시 2010. 3. 11.

글: 유병광(劉秉光)

 

주우규(朱友珪)의 출생에 관하여 각종 사서들의 기재내용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신오대사>>에서는 "우규라는 사람은 태조가 처음에 선무에 주둔하면서, 송(宋),박()을 공략할 때, 역여부인(逆旅婦人)과의 사이에 야합으로 탄생했다"고 되어 있고; <<구오대사>>에는 "우규는 어릴때 이름이 요희(遙喜)인데, 모친은 성을 모르고, 원래 박주의 영기(營妓)이다"; <<자치통감>>에는 "영왕(王) 우규, 그의 모친은 박주의 영창(營娼)이다". "영기"이건, "영창"이건 "역려부인"이건 모두 고대의 군기(軍妓, 근대의 위안부에 해당함)의 별칭이다. 주우규는 정사에 생모가 기녀라고 기록된 중국역사상 유일한 황제가 된다.

 

아들이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다. 그의 부친인 주온(朱溫)이 황음호색하여 사생활에서 절제도 없고, 행군도중에도 바쁜 와중에 틈을 내어 군기와 풍류를 즐겼는데 어쩌란 말인가. 만일 근원을 추적한다면, "삼일동안 밥을 먹지 않을 수는 있지만, 하루라도 여인이 없이는 안된다"던 한무제가 그를 위하여 고생하는 병졸들을 위하여 "처음으로 영기를 설치하고, 군사들중에서 처가없는 자들을 상대하게 하였다"는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주온은 후에 가장 깡패같은 황제라고 불리운다. 그는 원래 부인이 상당히 엄하게 단속하였던 남자이다. 자연히 호색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주우규라는 인물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주우규(887-913)는 주온의 셋째아들이다. 오대의 후량의 두번째 황제이기도 하다. 주우규가 출생하기 며칠전에, 주온은 당나라황제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광계2년(886년) 봄, "당왕실이 쇠약하여, 여러 도주의 병사들이 왕실을 위하여 일하지 않았다...주위 수천리에 사람의 흔적이 끊기고, 오로지 송, 박, 활, 영만이 누대를 쌓고 문을 걸어닫았다." 주온은 명을 받아 연속으로 출병하여 전투를 벌였다. 박주로 갔을 때, 군기를 불러서 시침을 하게 했다. 누가 알았으랴. 1개월후 주온이 그녀를 버리고 떠나려고 하자, 군기가 주온에게 임신했다고 말을 한다. 주온은 부인을 무서워했었다. 역사서에도 그가 본부인인 장씨를 평소에 꺼려했다고 되어 있다. 그는 그 군기를 집으로 데려가지 못하고, 박주에 남겨두고, 따로 집을 구해서 살게 해주었다." 그는 몰래 살림을 차려준 것이다.

 

10개월이 지나서, 분만을 한다. "군기는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알려왔다" 주온은 아들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들 모자를 찾아가보지는 못하고 이름을 지어서 보내준다. "요희(遙喜)"라고. 나중에 주온의 실력이 강대해지자, 집안에서도 발언권이 강해졌다. 그제서야 장씨를 설득하여 이들 모자를 변주로 불러온다. 그리고 이름을 주요희에서 주우규로 바꾼다. 홀어머니 가정에서 자랐고, 게다가 홀어머니는 군기출신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주우규는 스스로 비천하게 느꼈고, 우울해 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지만 주우규는 교활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자존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주온과는 물론 다른 형제들과의 관계도 썩 좋지 못했다. 특히 주온의 양자(養子)인 주우문(朱友文)과는 후계자리를 놓고 다투느라고 물과 불처럼 사이가 나빴다.

 

주온이 황제에 오른 후, 주우규는 영왕에 봉해지지만, 시종 태자의 자리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 원인은 첫째, 주우규가 군기소생이므로 출신이 미천했고, 말솜씨가 좋지 못했다. 주온은 내심으로 그를 무시했다. 둘째, 주온은 만년에 들어 더욱 호색하였고, 심지어 며느리들에게 입궁하여 시침하도록 시키기까지 했다. 주우문의 처인 왕씨와 주우규의 처인 장씨도 자주 불려가서 주온을 모셨다. 왕씨는 예쁘게 생겨서 주온이 아주 총애했다. 그리하여 주온은 양자인 주우문을 태자로 삼을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주우규는 불만이 많았다. 주우규가 보기에, 큰 형인 주우유(朱友裕)가 죽은 후에, 자신이 주온의 적계로는 장자(長子)였다. 태자의 지위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그러나 주우문이라는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외인이 차지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관계이다. 결국은 이로 인하여 부자간에까지 반목하게 된다.

 

비록 황제위를 잇는 것이 어려워졌지만, 주우규는 그래도 기가 죽지 않았다. 하물며 그는 뼛속부터 독랄성과 야만성을 보유한 인물이다. 건화2년(912) 오월, 주온은 몸이 상하여 병석에 눕는다. 오래지 않아 주온은 며느리 왕씨에게 "우문(友文)을 불러오라. 그와 결정할 일이 있다."고 얘기한다. 결국 그 의미는 황제위를 주우문에게 넘겨주겠다는 뜻이다. 당시에 주우규의 처인 장씨도 그 자리에 있었다. 장씨는 즉시 주우규에게 이를 이야기한다. 주우규는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좌우의 심복을 불러서 권력을 탈취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교활한 주온은 다시 병석에서 명을 내린다. 주우규를 내주자사로 좌천한 것이다. 그 목적은 바로 주우문의 승계를 순조롭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의 관례에 따르면, 좌천된 사람은 가는 도중에 사사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우규는 상황히 긴급하다고 여겨 또 다른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다. 즉 부친을 시해하고 황제위를 찬탈하는 것이다.

 

육월 무인일, 즉 좌천을 명하는 문서를 받은 다음날 깊은 밤에 주우규는 오백명을 이끌고 황궁에 난입한다. 주온의 침상앞으로 가서, 주온을 죽여버린다. 주우규가 주온을 살해하는 공포스러운 광경에 대하여 <<신오대사>>는 피비린내나게 묘사하고 있다: 밤 삼경에, 관문을 지키는 자들을 죽이고 만춘문으로 들어간다. 침소에 이르자, 병간호하던 자들이 모두 도망쳤다. 태조는 놀라서 일어나 소리쳤다: 내가 이 도적놈을 의심한지 오래이다. 일찌감치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역적이 감히 부친까지 죽이려느냐.' 주우규의 심복인 풍정악이 검으로 태조를 공격했다. 태조는 기둥을 돌면서 도망쳤다. 검으로 기둥을 세번이나 가격했다. 태조는 피로하여, 침상에 엎드린다. 풍정악은 검으로 그를 찌른다. 배에 구멍이 나고, 위와 장이 모두 흘러나왔다. 주우규는 이불과 요로 둘러싸서 침상에 두고, 4일간 비밀리에 장례를 치른다." 그 수단이 이처럼 잔혹했다. 이는 결국 주우규는 주온을 그저 자신의 생모를 모욕한 호색한 정도로 여겼다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주온은 죽을 때까지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십육년전에 그가 박주의 군기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자신에게 살신지화를 불러올 줄이야. 주온을 죽인 후, 주우규는 즉시 조서를 내려 정적 주우문을 죽인다. 그리고 원하던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용은 용을 낳고, 봉황은 봉황을 낳으며, 쥐가 낳은 새끼는 구멍을 뚫는다. 주우규가 즉위한 후, 하루종일 주색에 빠지고 조정을 돌보지 않는다. 만년의 주온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주우규는 노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넷째동생인 주우정(朱友貞)을 개봉윤, 동도유수로 발탁하고, 자신은 후궁에서 황음한 생활을 보낸다. 주우규의 각종 악행으로 후량의 공신들은 그에 대하여 불만이 컸다. 주우정도 암중으로 실력을 기른다. 봉력원년(913) 이월, 주우정은 경성에서 변란을 일으킨다. 주우규는 놀라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는 도망치려고 시도를 한다.

 

성문은 이미 주우정이 장악하고 있어, 주우규와 처 장씨는 "북쪽 담장의 누각 아래로 가서 성을 넘어 도망가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가 없고, 살고 싶어도 가능성이 없었다. 죽고자 해도 죽을 용기가 없었다. 주우규가 예전에 부친을 죽이던 때의 기세는 모두 사라졌다. 어쩔 수 없이. 주우규는 풍정악에게 처와 자신을 칼로 죽여달라고 명한다. 향년 37세이다. 주우정은 즉위한 후 주우규를 서인으로 폐했다. 비록 황제의 자리에 팔개월이나 있었지만, 역사상 황제의 명호를 남기지 못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주우규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주우규는 역사를 고쳐쓰고자 했지만, 자신의 패망과 더불어 역사를 고쳐쓰고 생모의 신분을 고쳐쓸 기회를 잃었다. 아마도 이것이 그에게는 인생최대의 비극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