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관첩(關捷)
역사를 색정으로 덧칠하여 글을 쓰고 영화드라마를 찍어서 고액의 이윤을 노리는 것은 이미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이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런 것이 출판도 되고 영화드라마로 찍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 나온 책의 글을 하나 읽어보았는데, 내용에 무측천이 음탕무비하여 후궁준남 삼천명을 거느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전에 나온 <태후와 나>와 마찬가지의 목적과 수법이다. 그러나, 그 안의 내용은 중대하게 과학에 위배되고, 도덕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당고종이 죽은 그 해 무측천은 이미 59세였다. 정식으로 등극하여 황제를 칭할 때 이미 66세였다. 그러나 그녀는 생활이 여유있고, 양생을 잘해서, 얼굴이 여전히 예쁘고, 피부는 풍만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소녀와 같았고, 그녀의 성욕도 젊은 부녀들에 전혀 못지 않았다."
이건 과학의 언어가 아니다. 나이 칠순에 가까운 노파가 어찌 삼천 준남을 거느린단 말인가. 게다가 그 삼천도 백명중 하나씩 고른 성적 능력이 뛰어난 자들로.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구든지 나이가 들면 늙는다. 여황제도 마찬가지이다. 양생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다. 자연규율은 무측천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설사 고인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책에서 무척천과 딸에 대한 묘사는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이다.
보라. 무측천의 면수(面首)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조달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태평공주가 바친 경우이다. 태평공주는 무측천의 딸로서, 아침저녁으로 같이 있었으니 모친을 가장 잘 아는 것이 딸이다. 그리고 그녀는 무측천으로부터 풍류음탕한 혈맥이 흐르고 있었고, 무측천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았다. 모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녀는 스스로 선봉장이 되어 무측천에게 약방문을 구해주었다.
이렇게 되면, 기본적으로 <금병매>이다. 역사인물에게 있지도 않은 일을 덧붙이는 것은 고인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무슨 도덕군자인 척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관된 사상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똥은 아무리 좋아보여도 먹을 수 없다." 춘궁화를 그리는 수법으로 역사를 팔아서 돈을 벌다니, 그 품위는 할일없는 홀아비가 굶주린 나머지 온갖 상상을 해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할 뿐이다.
무측천은 66세에 등극했고, 82세까지 황제로 일을 했다. 그동안 그녀는 국가에 4가지 분야의 공헌을 한다. 첫째, 개혁을 계속 추진하여 관농(섬서,감숙일대)의 사족들이 정치를 독단하던 국면을 타파했다. 서족지주를 정권에 참가시킨다. 둘째, 무측천은 파격적으로 인재를 기용했다. 예를 들어 그녀는 일찌기 구품이상 관리 및 백성들에게 모두 추천을 하도록 명했다. 무측천은 확실히 일련의 인재를 등용한다. 예를 들어 그녀의 명상 적인걸과 장간지, 나중에 개원지치의 명상 요숭과 송경등은 모두 그녀가 중용하거나 선발한 사람들이다. 셋째, 농업생산을 중시했다. 무측천은 계속하여 명을 내려 농경과 잠업을 발전시키고, 지방관리들이 농업생산의 발전을 장려하도록 했다. 전답을 개간하여 집집마다 먹을 거리가 남은 지방의 장관은 승진시켜주었다. 정치를 가혹하게 하여 호구가 흩러지는 지방장관은 징벌을 받았다. 이 기간동안 사회경제는 크게 발전하고, 호구는 크게 증가한다. 당태종때 호구는 380만호였는데, 무측천이 통치한 말기에는 이미 615만호로 늘어나 있었다. (4) 전시, 무거를 설립하여, '정계개원, 치굉정관(政啓開元, 治宏貞觀)"의 국면을 맞이한다.
만일 그녀가 하루종일 삼천준남과 놀아났더라면 그녀는 82세까지 살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제대로 일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며, 탁월한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남편 이치는 호색으로 몸이 약해져서 일찌감치 죽었다. 무측천이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성적이고 의지가 굳은 대정치가로서 자신을 관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구당서>에는 무측천이 널리 면수를 모았다고 사생활을 욕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그 정보원은 아주 의심스럽다. 황궁내의 생활은 밖에서 알 수 없는 것인데, 다른 사람들이 어찌 알았을까? <구당서>의 작가인 유구(劉昫)는 오대 사람이다. 더더구나 1차사료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의존한 것은 길거리에서 나도는 말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뿌리깊은 정통사상가이다. 남존여비의 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내용을 보물로 여겨서 내용을 과장하고 부풀려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
조상의 속옷을 파는 것이 좋은 장삿꾼일 수는 없다. 하물며 그 속옷이 가짜임에야. 아마도 그 자신이 손으로 만든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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