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회민(高會民)
무씨(武氏), 통상적으로 무측천(武則天) 혹은 무후(武后)라고 칭하며, 당중종, 당예종때 황태후로 임조칭제(臨朝稱帝)하는 기간동안 이름을 "무조(武曌)"라 고친다.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군권(君權)을 장악하여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여황제이다.
무측천은 병주(幷州) 문수현(文水縣) 사람이다. 당고조 무덕7년(624년)에 수도 장안에서 태어났으며 무사확(武士彠)과 양씨(楊氏) 사이의 차녀이다. 무측천의 본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녀의 부친 무사확은 목재장사를 하여 가정환경이 부유했다. 이연(李淵)이 태원에서 거병하여 수나라에 반란을 일으킬 때, 무씨집안은 돈과 양식, 의복등 물건을 도와준 적이 있다. 그는 당나라의 개국공신이며 관직이 공부상서, 형주도독에 이르고, 응국공(應國公)에 봉해졌다.
정관11년(637년) 십일월, 당태종은 젊은 무측천이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5품 재인(才人)에 봉한다. <당회요.권삼.황후>의 기록에 따르면, "태종은 무사확의 딸이 재주와 미모를 갖추었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입궁시키고, 재인으로 삼는다." 그리고 "무미(武媚)"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신당서.권칠십육.열전제일>에는 이렇게 적었다: "황제를 만나고, 무미라는 호를 내렸다" 후세에 이것이 와전되어 "무미낭(武媚娘)"으로 부른다. 무측천이 입궁하기 전에 과부로 있던 모친 양씨는 그녀가 들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구당서.권오십일>에 따르면, 무씨가 작별인사를 할 때, 모친 양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제를 뵙는 것이 어찌 복이 아니냐. 왜 이렇게 아녀자처럼 슬퍼하는가?"
그러나 무측천은 당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12년간 재인으로 있었다. 지위는 시종 오르지 않고, 태종의 병이 위중할 때, 무측천과 태자 이치(李治)간에 애정이 생긴다. <당회요.권삼.황후>에 이렇게 기록한다: "당시 상(上)은 동궁에 있었다. 들어가서 모셨으므로 좋아했다." 이 말에 나오는 '상'은 바로 태자 이치를 가리킨다.
정관23년(649년), 당태종이 사망하고, 무재인은 당나라 후궁의 관례에 따라, 자녀가 없는 일부 비빈들과 함께 장안의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 영휘원년(650년) 오월, 당고종은 당태종의 1주기때 감업사로 가서 향을 올릴 때, 다시 무측천과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 알아보고 헤어진 후에 그리운 정을 나눈다. <당회요.권삼>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태종이 붕어하다. 비빈의 예에 따라 출가하여 감업사의 비구니가 되었다. 황상이 기일에 향을 올리러 가서 만난다. 무씨는 눈믈을 흘리고, 황상도 처연해 한다."
이때, 자식도 없고 총애도 잃은 왕황후가 이를 보고는 주도적으로 당고종에게 무측천을 궁중으로 불러들이자고 청한다. 그녀는 무측천을 통하여 그녀의 정적인 소숙비(蕭淑妃)를 치려 한 것이다. 당고종도 일찌감치 그런 생각이 있었으므로, 즉석에서 응락한다. <구당서.권오십일>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처음에, 무황후는 정관말에 태종비빈들과 함께 감업사에 거처했다. 황후 및 좌우에서 여러번 말을 하자, 당고종은 그녀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이고, 소의(昭儀)에 봉한다."
무측천은 궁중으로 돌아온 후 확실하고 신속하게 소숙비를 물리치고, 이치의 총애를 얻는다. 다음 해(652년) 오월, 이춤 소의(昭儀)에 오른다. 당시 왕황후, 소숙비는 자주 무소의와 총애를 다투었고 서로 상대방에 나쁜 말을 하지만, 이치는 모두 듣지 않았다.
무측천은 심계가 뛰어났고, 수단이 독랄했다. 654년(영휘5년), 무측천은 장녀 안정사공주(安定思公主)를 낳는다. 안정사공주가 출생한 후 1달 남짓 되었을 때, 왕황후가 보러 왔다. 공주를 예뻐하며 놀았다. 왕황후가 나간 후, 무측천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딸을 목졸라 죽인다. 그리고는 이불을 덮어놓는다. 이치가 왔을 때, 무측천은 기쁜 얼굴로 이불을 벗겨 아이를 본다. 그리고 아이가 이미 죽은 것을 발견하자, 무측천은 통곡을 한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황후가 금방 이곳을 다녀갔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치는 대노하여 말한다: "황후가 내 딸을 죽였구나!" 무측천은 눈물을 흘리면서 왕황후가 그동안 한 못된 짓을 일일이 고해 바쳤다. 왕황후는 해명할 수가 없었다. 이치는 이때부터 "왕황후를 폐위시키고 무측천을 황후로 앉히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신당서> 권칠십육. 열전제일>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소의(무측천)가 딸을 낳고, 황후가 와서 놀다가, 갔다. 소의는 죽은 아이를 금침 아래에 숨기고, 황제를 모시고 온다. 겉으로는 웃으며 말을 하고, 금침의 딸을 보니 죽었다. 다시 놀라서 좌우에 묻는다. 모두 말하기를, "황후가 금방 왔었습니다." 소의는 비통하게 운다. 황제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노하여 소리친다: "황후가 내 딸을 죽였구나 이전에 비빈들과 서로 질투하더니 오늘날 이렇게까지 하는구나." 그래서 소의는 황후에 대하여 나쁜 말을 했고, 황후는 변명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더욱 무측천을 믿고 사랑하니, 황후를 폐할 생각이 들었다." 이 내용은 <자치통감.당기십오>에도 기록이 있다. 이 딸은 무측천이 죽인 첫번째 이당황족이라고 할 수 있다.
영휘6년(655년) 십월 이치가 조서를 내려 무측천을 황후에 앉힌다. <신당서.권칠십육.열전제일>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황제의 뜻이 결정되어, 조서를 내려 왕황후를 폐한다. 이적, 우지녕에게 조서를 내려 새수(璽綬)를 받들고 소의에게 가서 황후로 받들게 한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 및 사이(四夷)의 추장들에게 명하여 황후를 숙의문에서 조하(朝賀)하게 하고, 내외명부들이 들어가 배알하게 한다. 황후를 조하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폐왕입무(廢王立武, 왕황후를 폐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올리다)"사건은 관농귀족에게 큰 타격이었다. 위진남북조이래로 황권이 강하지 못했던 상황이 바뀐 것이고, 중국역사에 이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상원원년(674년) 팔월, 이치가 천황(天皇)이라 칭하고, 무측천이 천후(天后)라 칭하며 이성임조(二聖臨朝)한다. 상원2년(675년) 태자 이홍(李弘)이 병사하고, 이치와 무후와의 사이에 난 둘째아들 이현(李賢)을 태자로 삼는다.
조로2년(680년) 이현은 모역제로 서인으로 폐해지고, 파주(巴州)로 유배를 간다. 그리하여 다시 셋째아들 이현(李顯)을 태자에 앉힌다.
영순2년(583년) 십이월, 이치가 붕어하고, 임종때 유조를 남긴다: 태자 이현은 관앞에서 즉위하고, 군국대사가운데 결정할 수 없는 것은 천후가 결정하라. 4일이후, 이현이 즉위하니, 당중종이고, 무후는 '황태후'가 된다. <구당서>에는 이렇게 쓴다: "대제(大帝, 당고종)가 붕어하고, 황태자 현이 즉위한다. 천후를 황태후로 모신다."
광택원년(684년) 이월, 당중종 이현은 위황후(韋皇后)의 부친 위현정(韋玄貞)을 시중(侍中)에 앉히려 한다. 재상 배염(裴炎)은 동의하지 않고 반대하는 간언을 한다. 이현은 화가 나서 말한다: "짐이 설사 천하를 모두 위현정에게 준다고 하더라도 뭐가 어떻가는 것이냐. 하물며 일개 시중자리를 주겠다는데." <자치통감.당기십구>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내가 천하를 위현정에게 주더라도 뭐가 안될 게 있느냐. 그런데 시중이 아깝겠는가" 무측천은 이를 핑계로 삼아 이현을 폐출시키고 여릉왕으로 삼고, 그를 방주(房州)로 보내버린다. 그리고 넷째아들 예왕(豫王) 이단(李旦)을 황제에 앉히니 그가 당예종이다. 무후는 임조칭제하고 조정을 독단한다. <구당서>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월 무오일, 황제를 폐위시켜 여릉왕으로 삼고, 별도의 장소에 유폐시키다. 그리고 이름을 철(哲)로 고치게 하다. 기미일, 예왕 륜(輪)을 황제에 앉히고, 별전에 거주하도록 명하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문명으로 고친다. 황태후는 여전히 임조칭제한다."
수공2년(686년), 무후는 고밀(告密)을 장려한다. 누구든지 모두 고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무후는 전후로 삭원례, 주흥, 내준신, 후사지(侯思止)등 한 무리의 혹리(酷吏)를 기용한다. 조정내외에 아주 공포스러운 정치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대신들은 조회에 나가기 전에 모두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하루종일 두려움에 떤다. 이해에 안남왕 이영(李潁)등 종실 12명을 죽이고, 다시 전태자 이현(무후의 둘째아들)의 두 아들을 채찍으로 때려죽인다.
이씨성의 여러 왕들은 자연히 그냥 앉아서 죽으려 하지 않았다. 수공4년(688년) 팔월, 박주자사 낭야왕 이충(李沖)은 박주(지금의 산동성 요성 동북)에서 거병하고, 예주자사 월왕 이정(李貞)은 예주(지금의 하남성 여남)에서 호응한다. 무후는 각각 구신적, 위숭유를 보내어 평정한다. 낭야왕 이충은 거병한지 7일만에 패배하여 죽고, 구월, 월왕 이정도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살한다. 무후는 이씨성의 여러 왕들을 모조리 제거하려 한다. 그리하여 주흥등에게 그들을 심문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한왕 이원가, 노왕 이영기, 황국공 이찬, 동완군공 이융, 상락공주등이 자살한다. 심복들도 모조리 주살당한다. 당나라의 종실은 거의 모조리 피살될 정도였다. 어리거나 약하여 다행히 살아남은 자들은 영남으로 유배된다. 그리고 그들의 친당 수백집안을 주살한다.
이들 사실은 <구당서>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팔월 임인일, 박주자사 낭야왕 충이 박주에서 거병한다. 좌금오 대장군 구신적을 행군총관으로 삼아 토벌한다. 경술일, 충의 부친 예주자사, 월왕 정이 다시 예주에서 거병하여 이충과 서로 호응한다. 구월,내사 잠장천, 봉각시랑 장광보, 좌감문대장군 국숭유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가서 토벌하게 한다. 병인년 이정과 이충등을 참하고 수급을 수도로 보내며 성을 "훼(虺)"로 바꾸게 한다. 박주에 특별사면을 한다. 한왕 원가, 노왕 영기, 원가의 아들 황국공 찬, 영기의 아들 좌산의상시 범양왕 애, 곽왕 원궤 및 아들 강도왕 서, 고괵왕 원봉의 아들 동완공 이융은 이정고 통모하고, 원가, 영기는 자살하며, 원궤는 검주로 유배가고, 찬등은 주살당하며, 성을 '훼'로 바꾸게 한다. 이때부터 종실의 여러 왕들은 주살당하여 거의 없어진다. 그자손중 어린 자들은 모조리 영외(嶺外)로 유배되었고, 그들의 친당 수백여가문을 주살한다."
천수원년(690년) 구월 초구일. 67세의 무측천은 6면의 민중과 관리들의 추대하에 황제의 보좌에 오른다. 그리고 당왕조를 주(周)왕조로 바꾼다. 연호는 천수로 바꾸고,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한다. 다만, 이단을 황태자로 삼는데, 성을 무씨로 바꾸게 한다. 역사상 무측천의 주왕조는 '무주(武周)'라 칭한다.
장수2년(693년) 정월 이일, 황태자 이단의 두 비인 유씨, 두씨가 궁에 들어가 무측천을 배알한 후 처결당하고, 비밀리에 궁안에 묻어버린다. 아무도 그녀들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구당서>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월 봄 일월, 친향명당(親享明堂). 계해일, 황태자의 비 유씨, 두씨를 죽이다." 두 비의 돌연한 실종에 대하여 이단은 감히 물어보지도 못하고 모후의 앞에서 태연자약하게 행동한다.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699년, 이현은 무측천에 의하여 경성으로 불러들여진다. 그리고 다시 태자에 앉혀진다. 장안원년(701년) 구월, 그의 아들 이중윤과 영태공주 부부는 나이가 어려서 기운이 성해, 조모가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총애하는데 대하여 불만을 표시한다. 이 일은 장역지가 살을 덧붙여 무측천에게 보고하고, 그들이 조정을 비방한다고 말하여 이중윤, 영태공주와 남편 무연기 3명은 처결당한다. 다만 3명이 죽은 것에 대하여는 사서에 기재가 서로 다르다. <구당서.측천황후본기>에는 그들이 자결했다고 한다. "영자사(令自死)", <구당서.의덕태자전>에는 그들이 맞아죽었다고 한다. "영장살(令杖殺)"; <구당서.장역지전>에는 밧줄로 졸라죽였다고 한다. 소위 "영액살지(令縊殺之)"
신룡원년(705년) 정월, 무측천의 병이 위중해지고,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재상 장간지(張柬之), 최현위(崔玄暐)등은 금군통령 이다조(李多祚)와 연락하여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모반을 위해 병변을 일으켰다고 말하며, 금군 오백여인을 이끌고 궁중으로 뛰어들어가 장씨형제를 죽이고, 무측천의 침궁을 포위하여, 무측천의 퇴위를 요구한다. 역사에서 신룡혁명(神龍革命)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무측천은 어쩔 수 없이 황제위를 태자 이현에게 물려준다. 이현이 등극하니 당중종이 된다. 당중종은 그녀에게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라는 존호를 올린다. '무주'왕조는 끝이 나고 당왕조가 회복되었다.
신룡원년 음력 십일월 이십육일(705년 12월 16일), 무측천은 낙양 상양궁에서 병사하니, 향년 82세였다. 유언으로 황제의 호를 빼고, '측천대성황후'로 칭하라 한다. 신룡2년(706년) 오월, 당고종과 건릉에 합장되고, 무자비(無字碑)를 남긴다.
무측천은 이당의 강산사직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정권을 안정시키는 기간동안 대거 살륙을 감행하고 이당의 종실을 죽인다. 심지어 자신의 친골육까지 죽이며, 수단이 잔인했다. 구체적인 숫자는 이미 고증할 수가 없다. 다만 큰 역사관으로 보면, 당왕조의 역사상, 그녀는 정관지치를 이어 아래로 개원성세를 열었다. 그녀의 역사적 지위와 작용은 당태종에는 약간 못미치지만 당현종보다는 낫다. 그녀는 중국전제황권사회에서 걸출한 정치가이고,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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