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촉(洪燭)
원명원(圓明園)을 보고나서 필자는 중화민족의 수난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텅비고 넓은 공원은 필자의 눈에 그저 노천 장례식장같다. 가슴아픈 공원이다! 원명원의 장춘원(長春園)내에 대수법(大水法)과 마찬가지로, 방외관(方外觀)도 그저 약간의 잔재만 남았다. 몇 개의 높이가 서로 다른 기둥이 곧 무너질 것처럼 황폐한 기반위에 몇 개 서 있다. 만일 누구도 얘기해주지 않는다면, 이들 돌맹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추측하기 힘들 것이다. 다행히 돌기둥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무늬가 있어, 은연중에 남아있는 왕기(王氣)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건륭제 말기의 서양루 이십경동판화(二十景銅版畵)를 살펴보면, 비로소 방외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3칸의 남향이 2층짜리 작은 누각이다. 좌우에는 각각 환형의 돌계단이 있고, 누각의 위에 잇는 창과 난간의 베란다는 서양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 만일 이 누각이 원명원 내에 있지 않았다면 필자는 아마도 이곳이 모 유럽귀족의 호화주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원의 구조는 아주 정치하다. 줄을 맞춘 푸른 나무는 서로 다른 사용공간을 구분해주고 있다. 서남교(西南橋) 바깥에는 서양식 팔각정이 하나 서 있다. 방외관은 1759년(대수법과 동시)에 세워진다. 중국황제는 그때부터 서양주택에 거주하는 것을 좋아한 듯하다.
방외관은 건륭이 금옥장교한 곳이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는 향비를 보고서, 기쁜 나머지 이 누각을 그녀의 예배당으로 삼게 한다. 전설에 따르면 실내에는 두 개의 신성한 석비를 모셨다고 한다. 비문의 뜻은 다음가 같았다고 한다: "오스만은 알라를 사랑하고, 알라는 오스만을 사랑한다." "알리는 알라를 사랑하고 알라는 알리를 사랑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이 두 개의 비석이 남아 있지 않다.
향비는 신강(新疆)에서 왔다. 원래 남다른 향기를 지닌 위구르족 여성은 이국의 장원에서 자신의 신을 모셨다. 그녀의 영혼은 분명 그녀의 용모처럼 아름다웠을 것이고, 아름다운 꽃처럼 향기를 내뿜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당시 전체 방외관은 낭만적인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었고, 술이 가득차고 향수가 있는 천당과 같았을 것이다. 다만 실제로 향비는 이미 새장속의 새처럼 자유를 잃었다. 만일 방외관이 하늘아래 가장 아름다운 감옥이라면, 향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죄수일 것이다. 그녀는 냉염(冷艶)하고 우울한 여포로였다.
필자는 방외관의 잔재를 보여주는 사진을 본 바 있다. 1879년에 찍은 것이다. 작은 누각은 비록 화마가 지나갔지만, 주체건축물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나무숲을 통하여, 분명히 정치한 건물옥상, 꽃을 조각한 창문과 베란다를 볼 수 있었다...이 사진은 충분히 설명해준다. 방외관은 1860년의 대화재에서 살아남았다. 요행히도 그 겁난을 피했지만, 그래도 시간을 이기지는 못했다. 지금 그 유적지에는 겨우 몇 개의 남은 기둥만이 옛날의 번화함을 방증해주고 있다. 그에 있어서 이것은 뜨거운 불보다 더욱 두려운 적이다.
타이완의 여성작가 경요(瓊瑤)의 TV드라마 <환주거거(還珠格格)>에 향비라는 인물이 있다. 이 애정극의 고수는 고전미인의 이상직인 모습으로 그렸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향비는 병사하고, 홍목의 꽃이 조각된 침상에서 눈을 감는다. 몸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났으며, 수천수만의 나비가 날아온다. 벌이 떼를 지어 규방안으로 들어간다. 반쯤 내려진 주렴 안에서 춤을 춘다. 마치 처연하고 아름다운 고별의식을 진행하듯이. 나비떼들의 속에서 미녀의 유용(遺容)은 마치 살아있는 것같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영혼은 가벼운 음악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을 것인가?
이 화면은 필자로 하여금 외국의 명곡 <나비부인>과 중국의 희곡 <화접(化蝶)>을 연상하게 했다. 향지가 한 이 호접몽(蝴蝶夢)은 장자보다 전혀 손색이 없다. 사람들은 거의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천향국색의 황비는 나비의 화신이다. 일찌기 무수한 여성이 이미지를 만들어낸 경요는 향비를 아주 선정적으로 그렸고, 낭만주의적인 수법을 사용했다. 아마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백거이를 모방했는지도 모르겠다. 전설속의 여성을 위하여 장한가를 길게 쓰고자 한 것이다. 교묘하게도,이 극이 해협양안에서 인기를 끌 때, 향비를 연기한 여배우 류단(劉丹)은 광동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수백년간 전해오던 향비의 이야기는 다시 한번 애달픈 현외지음(弦外之音)을 이었다.
향비라는 여인은 확실히 존재했다.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궁정화가 낭세녕(郎世寧)이 그린 향비상(香妃像)을 본 적이 있다. 서양유채화로 향비의 모습을 그렸고, 당시의 모습을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이 외국인은 중국미인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아쉽게도 그는 지나치게 금상첨화를 추구했고, 그것때문에 진실한 향비를 복원해내지 못했다. 그의 붓에 그려진 향비는 옹용화귀(雍容華貴)하여 서방의 성모마리아상과 아주 유사했다. 낭세녕은 어쨌든 복이 있었다: 향비가 그를 위하여 모델이 되어 주었다. 예수회 선교사 카스티리니도 향비의 초상을 그린 바 있다. 구도는 더욱 기이했다: 향비는 머리에 투구를 쓰고, 몸에는 이탈리아식이 암회색금속의 갑옷을 입고 있다. 분명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테네여신과 비슷하다. 이 그림은 필자가 직접 본적이 없다. 그저 임어당의 글에서 언급된 것을 보았을 뿐이다.그는 이 향비상은 고궁박물원에 계속하여 보관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선교사들은 속속 향비를 그렸는데, 그것은 아마도 중국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향비는 건륭이 사랑하는 후비였다. 건륭은 일생동안 황후, 황귀비, 귀비, 비, 비, 귀인, 상재 함꼐 41명을 봉했다. 그 숫자는 강희제의 55명에 바로 다음가는 많은 것이다. 향비는 그 중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편이 아니지만, 가장 총애를 받은 편이다. 최소한 가장 유명하다. 건륭이 50세이후에 들인 12명의 비빈은 개략 13살가량일 때 들어왔고, 가장 나이가 많은 경우도 19살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향비가 입궁할 때의 나이는 26살이었다. 이는 특례라고 아니할 수 없다. 황제는 일반적으로 어린 나이의 소녀를 좋아한다. 향비에게는 분명 비범한 젊은 부인의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건륭제가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이 위구르족 용비(容妃, 속칭 향비)는 입궁하기 전에 이미 신강 카슈카르부근의 한 위구르족 수령의 왕후였다. 아쉽게도 그녀의 남편은 청나라군대에 피살당한다. 전체 부락도 패배하여 흩어져 버린다. 그녀 본인은 가장 귀한 전리품으로 건륭제에게 바쳐진다. 이국에서 왔으므로 용비는 자주 "객비(客妃)"라고 쓰여졌다. 이것은 암중으로 제국의 손님이라는 것을 비유하는 것이다.
건륭황제가 과부를 좋아하여 세속의 편견에 구애받지 않고 그녀를 귀비로 삼는다. 이를 보면 이 서역미인은 어느 정도 매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런 기묘한 마력은 바로 그녀의 온 몸에서 일종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기이한 향기가 났다는 것이다. 이 소문은 태감을 통하여 민간에까지 전해진다. 경성의 백성들은 그녀에게 별명을 지어준다: "향비". 얼마나 멋있는 이름인가. 향비는 역대비빈중 가장 신비감이 있는 여인이다.무슬림부녀의 습관에 따라 항상 안개같은 면사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분명히 볼 수는 없다. 다만 그녀의 호흡은 느낄 수 있. 그녀의 호흡에서는 짙은 향기가 넘쳐났다.
향비는 포로로 궁중에 들어온다. 야외의 백령조가 새장에 갇힌 꼴이다. 그녀는 계속 우울해 했다. 영화부귀도 그녀의 주의력을 끌 수 없었다. 그녀는 천리바깥의 고향을 그리워했다. 건륭제는 제왕의 위엄으로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고자 하였으나, 이 열녀로부터 과감하게 거절당한다. 그녀는 남편을 죽인 원한을 잊을 수 없었고, 원수와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좁아서 문자옥을 여러번 일으킨 건륭이 이 약한 여자에게는 바다같이 넓은 마음을 보여준다. 이를 보면 아름다움은 사람을 정복할 수 있다. 황제를 포함해서. 건륭은 특별히 그녀를 위하여 "망향루(望鄕樓)"를 지어준다. 이 호화로운 높은 탑에 살면서 먼 곳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녀가 혼자 몸이고, 사람도 낯설고 장소도 익숙치 않은데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누각의 건너편에 청진사(淸眞寺)를 짓고, 무슬림이 사는 마을도 만든다. 이렇게 하여, 향비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창밖에서 나는 고향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높은 곳에 올라가면, 고향사람들이 사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달랬다. 그리고 향비가 북경에서 혼자서 떨어져 있다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해주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북경 신화문(新華門) 부근의 황성에 인접한 곳은 과거에 회민영(回民營)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향비를 위하여 만든 것이다. 아쉽게도 이 무슬림군영의 유적지는 이미 옛날과 전혀 달라져 버렸다.
건륭은 이 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모든 것을 했다. 그러나 "성을 함락시키는 것을 쉬우나, 마음을 얻기는 어렵다" 향비는 시종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녀는 역시 기회를 잡아 자살해버린다. 고국과 애정을 위한 절개를 지킨 것이다. 대국의 제왕으로서, 이 정복하지 못한 여자의 유체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북경성은 이 고향을 위한 충절을 지킨 여인에게, 그저 마지막 객잔이었을 뿐이다. 그녀의 향기로운 영혼는 나비에 이끌려 서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낭세녕등이 그린 향비상은 남아있지만 향비의 웃음은 우리의 상상 속에 남아 있다. 그 어느 화가도 진실한 향비를 복원해 낼 수는 없다. 향비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의 헬렌과 마찬가지이다. 호메로스는 필묵으로 이 경국경성의 여성의 미모를 그려낼 수가 없어서, 그저 장졸(藏拙)의 수법으로 잔혹한 전쟁 내지 한 도시의 훼멸을 가지고 헬렌의 매력을 돋보이게 그려냈다. 상처가 가득한 트로이전사들이 헬렌을 보자, 부집ㄹ식간에 전쟁의 의미를 이해하고 탄식했다: "그리스인들이 우리와 이렇게 오랫동안 싸운 것이 이상할 것도 없구나."
필자의 생각에 건륭제가 향비를 처음 만났을 때, 이 여자의 굳건함을 아마 낮게 평가했던 것같다. 그는 이 여인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크스티리니가 그린 향비는 이탈리아식 갑옷을 입고 있다. 설마 이것이 헬렌과 비슷한 숙명이라는 것을 은근히 비유하는 것이 아닐까? 모두 전쟁과 관련이 있고, 모두 선혈을 댓가로 획득한 전리품이다. 혹은 모두 미신(美神)과 전신(戰神)의 결합체이다. 아름다움은 그 시대에 아주 잔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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