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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연간의 염세(鹽稅)사건

by 중은우시 2013. 5. 18.

글: 장영구(張永久) 

 

역사상 염업전매(鹽業專賣, 소금전매)는 국가가 독점경영했다. 이 조치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춘추시기의 관중(管仲)이며, 진나라 및 서한 초기에 전국에서 염업관매(鹽業官賣)제도를 시행했다. 소금을 생산하는 군현에 염관(鹽官)을 설치하고, 정부에서 제공한 "뇌분(牢盆, 소금을 만드는데 쓰는 전용 솥)"을 제공하고 염민(鹽民)이 생산을 책임진다. 완성된 소금은 정부가 가격을 정해서 수매하고, 전매를 실시한다. 송나라때가 되어서는 점차 "염인제(鹽引制)"를 시행한다. 즉, 상인이 돈을 내고 염인을 구매한다. 그리고 염인을 가지고 지정된 염장(鹽場)으로 가서 소금을 받는다. 그리고 소금을 지정된 지역으로 운송해가서 판매를 한다. 명청이래, 이런 '염인제'가 계속 활용된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약간은 중국계획경제시기의 양표(糧票)와 같은 것이다. 다만, '염인제'는 양표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상인들이 합법적으로 소금을 팔려면, 반드시 먼저 정부로부터 '염인'을 받아야 한다. 염인은 전후 두 권으로 나뉘며, 가운데 인장을 찍어서 두 부로 나눈다. 후권(後卷)을 염상에게 주는데, 이를 '인지(引紙)'라고 부르는데, 바로 '염인'이다. 염상은 이것을 가지고 지정된 염장에서 소금을 받고, 다시 지정된 장소로 올겨다 판매를 한다.

 

권력독점은 부패를 부른다. 독점경영에는 콩고물이 묻는다. 이것은 염상업계내에서 공개된 비밀이다. 염업전매는 자연히 염운사(鹽運使)와 같은 류의 관리들이 장악한다. 이들 관리도 사람이니, 제도적 감독과 제도적 견제균형이 결핍된 상황하에서 그들은 인간본성중 탐욕스러운 일면이 악성팽창하게 되고, 영업업계의 부정부패는 이렇게 생겨나게 된다.

 

청나라때에 이르러, 염업전매에서 부패현상이 더욱 심해진다. 염정관은 전국에서 최고의 비결(肥缺, 이익이 많이 생기는 관직)이 된다. 특히 강소, 안휘, 강서, 호남, 호북, 호남의 6개성을 관할하는 양회염정관(兩淮鹽政官)은 비결중의 비결이다. 건륭33년(1768년)의 양회염세안(兩淮鹽稅案)은 바로 이런 배경하에서 발생한 것이다.

 

사건의 원인은 2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건륭13년(1748년), 당시 양회염정을 맡고 있던 관리는 길경(吉慶)이라는 자이다. 하루는 길경이 강남대염상 강춘(江春)으로부터 초대장을 받는다. 소주의 몇몇 대염상들이 모임을 가지는데 염정께서도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달라는 것이다. 매번 이런 초청장을 받으면 길경음 속으로 기뻐했다. 거기에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이런 상업활동에 참가하면 '돈'을 받을 수 있다. 일의 진행도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가기의 노래를 듣는 외에, 강춘은 탁자 아래로 몰래 봉투를 들이민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살펴보니 5만냥은표가 들어있었다.

 

강춘의 뇌물제공은 당연히 목적이 있는 것이다. 염살들은 조정에 매년 염인발급수량을 늘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만 쿼터를 늘여달라는 것이다. 염정관 길경이 그들을 대신하여 황제에게 주청해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길경에 있어서, 쉬운 일이다. 조정에 쿼터를 늘려달라고 신청하는 것은 원래 그의 직책이다. 하물며 오만냥의 은표까지 받았으니 그는 이 주절(奏折)을 아주 잘 써주어야 했다.

 

길경의 주절은 호부로 보내어졌고, 건륭황제는 금방 비복(批復)을 내린다: 당년의 염인을 증가시키지 않는 전제하에서, 다음 연도의 쿼터를 앞당겨 사용하는데 동의한다. 동시에 염상에게 염인을 미리 사용하는데 대하여 정부에 추가로 '예제염인식은(預提鹽引息銀)"을 납부하도록 한다. 황제의 비복은 비록 원하는대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틈이 생긴 것이다. 대염상 강춘등은 모두 만족해마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길경에게 오만냥 은표를 보내준다. 이것은 감사를 표시하면서 또 하나의 막후거래를 위한 것이다. 길경이 담보를 서주면 염상들이 먼저 일부 염인식은을 납부하고, 나머지는 외상으로 처리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내지 않을 생각이다. 염정관 길경은 그들로부터 돈을 받았으므로 도와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관료사회의 잠규칙이 힘을 발휘한다. 염상은 돈을 내고, 염관이 앞에 나서 조치를 취해주니 각자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얻었고, 양자 모두 이익을 취한다.

 

길경이 선례를 만들자, 이 관료사회의 잠규칙은 염업업계내에서 계속 전해져 내려가게 된다. 후임 양회염정인 보복(普福), 고항(高恒)등도 매년 적지 않은 돈이 든 봉투를 받았고, 수뢰액수도 모두 10만냥을 넘어선다.

 

건륭33년이 되어, 후임 염정관으로 우세발(尤世拔)이라는 사람이 온다. 그의 부임초기에 강남의 염상들이 관레에 따라 돈봉투를 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거절당한다. 이는 우세발이 돈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실제로 강남에서 밀린 염인대금이 이미 천문학적 숫자로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더 이상 조정을 속이다가는 머리가 잘리고, 구족을 멸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해관계를 반복하여 따져본 후에 우세발은 결정을 내린다. 이 은표가 든 봉투는 시한폭탄과 같으므로 받을 수 없다. 받지 않을 뿐아니라, 조정의 간가구(看家狗, 집지키는 개)로서 황제에게 문제점을 모조리 보고한다. 조정은 우세발의 보고를 받고, 당시 강소순무로 있던 만청대신 창보(彰寶)에게 이 사건의 조사를 맡긴다. 4개월여의 조사끝에 강소,안휘,호남,호북,강서,하남의 6개성을 관할하는 양회염정의 20년에 걸친 재무수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서 부정부패한 금액이 1천만냥에 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관련된 관리만 수십명에 달하게 된다.

 

장면을 바꾸어 우리는 먼저 이 강남의 대염상을 알아보자.

 

그는 강춘이라고 하고, 자는 영장(潁長)이며, 원적은 안휘 흡현 강촌 사람이다. 염상세가출신이다. 강춘이 개설한 염호(鹽號)는 "강광달(江廣達)"이라고 한다. 건륭시기 강남에서 이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강춘은 대염상이며 유아지사(儒雅之士)의 풍모가 있었다. 멋진 수염을 기르고, 상전에 능통했을 뿐아니라. 문장에도 능했다. 시사를 읊고, 상해관장(商海官場)에서 접대하는데 아주 익숙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문인아사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의 집에는 희반(戱班)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덕음반(德音班)"으로 원래 아부(雅部, 즉 昆山腔)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춘대반(春臺班)"으로 화부(花部, 즉 京腔, 秦腔)에 속한다. 그때 강남 각지의 저명한 강호예인들은 강춘의 희반에 이름을 걸었고, 연출하는 극의 종류가 근 천 가지에 달했다. 비용만도 은량 수만원에 달했다. 그는 대단한 스폰서였다.

 

건륭황제가 강남에 순유를 갔을 때, 수서호(瘦西湖)에서 배를 타고 놀았는데, 도중에 오정교(五亭橋)옆을 지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돌연 고향생각이 나서 곁에 있던 양주의 지방관리에게 말한다: "이곳은 북경성의 경도춘음(瓊島春蔭)과 비슷하구나. 그러나 아쉽게도 백탑(白塔)이 하나 부족하구나." 강춘은 이 소식을 듣자 즉시 경성의 화가로 하여금 백탑의 초도(草圖)를 그리게 한다. 그리고 수십명의 장인을 동원하여 밤낮으로 일하여, 3일만에 건륭황제가 다시 호수에 와서 놀 때 담록색의 커튼을 여니, 오정교의 곁에 백탑이 우뚝 솟아있는 것을 보게 된다. 자신이 잘못보았나 하여 눈을 비볐는데, 곁에 있던 양주의 지방관이 아부하며 말했다: "이것은 염장이 황상이 수서호를 유람할 때 아쉬움을 느꼈다고 하여, 밤을 새워 사람을 시켜 만든 것입니다." 이 아부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건륭황제는 아주 기뻐한다. 그래서 배를 몰아 직접 가서 보고자 한다. 양주의 지방관리는 급히 나서서 해명했다. "저 백탑은 소금포대로 임시로 만든 것입니다. 그저 멀리서 보면 되고 가까이서 볼 수는 없습니다." 건륭제는 그 말을 듣고 화를 내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가가대소한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 염상의 이름이 무엇인가?" 이때부터 강춘이라는 이름은 건륭제의 뇌리에 새겨지게 된다.

 

나중에 건륭황제가 80세 생일을 축하할 때, 조야의 "4대휘반(四大徽班)"이 북경으로 가서 공연한다. 그중에는 강춘의 '춘대반'도 있었다. 나머지 3개반은 대경반(大慶班), 사희반(四喜班), 화춘반(和春班)이다. 그들은 양주에서 출발하여, 경성에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공연을 했고, 이것은 경극이 청나라의 국극이 되도록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런 관계를 이용하여, 건륭제는 8번이나 강춘을 접견한다. 3번은 그를 '천수연' 국연에 참석하도록 했으니, 그로서는 이보다 큰 영광이 있을 수 없었다.

 

대염상 강춘은 비록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정치적으로는 뒤를 봐줄 배경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단 건륭제라는 이 견실한 정치적 배경을 얻게 되었다. 상인이 정치와 관련되면 돈이 든다. 그래야 이익을 더 많이 회수할 수 있다. 강춘은 이 이치를 잘 알았다. 가경 <양회염법지>에 따르면, 건륭38년(1773년) 부터 건륭49년(1784년)까지 20여년의 기간동안, 강춘이 "급공보효(急功報效)"한 은량이 1120만냥가량이 된다. 그러므로, 건륭의 앞에서 그는 감히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노재에게 금산은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황상께서 말씀만 내리시면 정정당당하게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빌린다는 말도 필요없습니다." 만일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의 돈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외에 기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점도 나타난다. 다행히 건륭제가 빌리려는 것은 그의 은자였다. 강춘이 은자를 빌려준 후 어떤 생각이었는데, 심지어 약간 소란을 피워도 개명한 건륭황제는 허락할 것이다. 상인이 정치인에게 돈을 쓰게 되면 기실 이는 장기적인 이익을 위한 투자이다. 예를 들어 은자로 길을 깐 강춘은 나중에 강남포정사(江南布政使, 재정을 관장하는 부성장에 해당함)에까지 오른다.

 

양회염인사건이 발발한 후, 건륭제는 크게 진노한다. 형부에 분부하여 엄히 조사하고 한 명도 빠트리지 말라고 한다. 이때 강춘은 사내대장부의 기개를 드러낸다. 조정에서 심문할 때, 그는 양회염인안은 그 한 사람의 책임이고, 다른 사람은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심문관이 어떻게 심문하더라도 그는 결국 이 말만 할 뿐이었다. 건륭제는 그 상황을 듣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가 위기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어른의 풍모를 보이니 특별히 사면한다고 한다.

 

다른 염정관리와 염상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전 양회염정인 보복, 고항, 염운사인 노견증(盧見曾)의 3명은 모조리 참감후(斬監候, 사형집행유예)에 처해지고, 나중에 사건이 점차 확대되면서 건륭제의 분노도 점점 커진다. 그리하여 이들을 끌어내어 공개처형을 하게 된다. 대염상 황원덕, 서상지, 황전춘, 강계원등도 모조리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이 때 한 사람이 소식을 전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의 이름은 기균(紀昀)으로 자는 효람(曉嵐)이며, 직예 하간 사람이다. 건륭19년(1754년)진사에 합격한 후 관직에 나선다. 한림원 시독학사로 있었는데, 건륭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매일 조정에 출입하다보니 소식이 빨랐다. 그는 건륭제가 강남염상을 조사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 일의 중대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거기에 두번 양회염운사를 지낸 노견증은 그의 사돈이었다(기효람의 장녀가 노견증의 장손 노맹문과 결혼하였다).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이 소식을 전한다. 그 결과 비밀누설죄로 처벌을 받는다. <청비림집>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기균은 육월 십삼일 노모(盧謨)등을 만나서 양회염정에 일이 생겼다고 알려준다. 노모는 십사일 고향집에 서신을 보낸다. 기균이 정보를 누설한 사람이다." 이 글에 나오는 노모는 바로 기효람의 사위이다. 기효람이 정보를 알려준 행위가 정적에 의하여 밀고된 후 건륭제는 크게 화를 낸다. 그리고 유지를 내린다: "기균은 친척의 정을 위해 임의로 소식을 전하였으니 죄가 중하다 우루무치로 가서 속죄하라."

 

기효람이 정보를 누설한 방식은 아주 재미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건륭제가 처음 기효람이 기밀을 누설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다지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효람은 매일 황제의 곁에 있기 대문에 서신을 써서 궁밖으로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황궁출입은 검사가 엄밀하여, 날개가 달린 새라고 하더라도 쉽게 날아서 나가기 어려웠다. 글을 쓴 종이를 몸에 숨겨서 가지고 나가는 것은 머리가 잘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기밀누설사건이 확정된 후, 건륭제는 호기심에 물어보았다. 기효람이 어떻게 정보를 누설해쓰냐고. 기효람은 여전히 고개를 흔들며 글자 한 자도 쓴 적이 없다고 말한다.

 

양자침등이 쓴 <기효람전전>에는 이렇게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기효람은 생각을 이리저리 해보고는 마침내 절묘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그는 식염 한주먹, 찻입 한주먹을 쥐어서 서신봉투에 넣고 풀로 봉했으며 글자는 한 자도 쓰지 않았다. 심부름꾼이 밤을 새워 노견증의 집으로 가져다 준다. 노견증은 서신을 받은 후 열어보니 안에 글자는 한 자도 쓰여 있지 않고, 종이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하도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편지봉투안에 든 물건을 탁자위로 쏟아보았다. 식염과 찻잎 뿐이었다. 한참을 생각해본 후에야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염차(鹽茶, Yancha) 즉 엄사(嚴査, Yancha) 즉 엄중히 조사한단 말이다.

 

그래서, 노견증은 급히 장부에 손을 본다. 횡령한 공금은 제자리로 돌려놓고, 내력이 불분명한 자산은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경성의 재산을 조사하는 관리가 도착한다. 비록 장부에서는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노견증은 처벌을 받고, 교형(絞刑)에 처해진다. 그러나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그는 옥중에서 병사하고 만다.

 

노견증에 대하여는 몇 마디 해야할 것이 있다. 노견증(1690-1768). 자는 포손(抱孫), 산동 덕주 사람이다. 진사에 합격해서, 관직에 나간 후 사천에서 지현을 지낸 바 있고, 양회염운사를 지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관직이었다. 그가 양회염운사로 있을 때, 백성들 사이에서 평판이 괜찮았다. "잡다한 부담을 없애고, 쌓여있던 문제를 처리하고, 근검하고 근면하게 다스렸다" 그는 사회질서를 바로 잡아서 좋은 평을 듣고 있었다. <양회염법지>의 기록에 따르면, 노견증은 양회염운사의 직을 맡은 후, 염상이 관청과 결탁하여 염민의 이익을 침해하고, 염업소유권문제에서도 쌍방이 오랫동안 소송을 진행하며 결론이 나지 않았으며, 염민의 생산에 대한 적극성이 심각하게 문제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노견증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하층으로 가서 두달여동안 조사연구한다. 그리고는 "조속상정, 양귀조납(竈屬商亭, 糧歸竈納)"의 판결을 내리고, 염민들에게 문계(文契, 영업허가증)를 발급하여 염민의 합법경영권익을 유지보호한다. 많은 염민들은 노견증을 기념하기 위하여 스스로 돈을 내어 '노공사(盧公祠)'를 세웠다.

 

양회염세안이 폭로될 때 노견증은 이미 실제로 은퇴한 상태이다. 덕주의 고향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기효람사건이 터지면서 은퇴한 노견증도 연루된다. 그래서 처량한 말년을 맞이한다. 노견증의 죽음은 어느 정도 억울한 점이 있다. 건륭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이고, 곁에 두고 있던 기효람이 기밀누설한 상대방이며, 예전에 양회염운사를 지냈으므로 노견증은 쉽게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기효람이 노견증을 도와준다는 것이 오히려 망친 것이다.

 

3년후 대학사 유통훈이 군기대신이 된다. 유통훈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청렴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많은 반대의견을 물리치고, 노견증이 양회염운사로 있는동안 모든 장부를 까발리고, 노견증은 청렴한 관리였다고 밝혀내어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

 

기효람은 건륭제의 엄한 처벌을 받은 후, 즉시 우루무치로 떠난다. 그러나 기효람은 저명한 문인이고 일찌기 황제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으므로 우루무치의 지방관리들은 그에게 공손했다. 그리하여 기효람은 비서관이 되어 주절,격문을 초안하고, 공문에 서명하고 약간의 정무까지도 처리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기효람은 벌을 받았다기보다는 여유있는 생활을 즐긴 것이다. 이 기간동안 그는 시 일백여수를 짓는다. 그리고 <우루무치잡시>라는 시집을 발간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마지막으로 말해야할 사람은 기효람을 밀고한 사람이다. 그는 건륭제의 곁에 있는 또 다른 총신인 화신(和珅)이다.

 

화신의 관직에서의 부침은 모두 세금사건과 관련이 있다. <화신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화신은 30살이 되던 해 조정으로부터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형부시랑 객녕아와 함께 운남으로 가서, 운귀총독 이시요(李侍堯)의 부정부패사건을 조사한다. 화신이 운남에 도착한 후, 먼저 이시요의 관가(管家)를 심문하여 증거를 얻고, 늙은 능구렁이 이시요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고 죄를 인정하게 만든다. 여기에 겨우 2달도 안되는 시간을 들였다. 경성으로 돌아온 후, 화신은 다시 건륭제에게 보고한다. 운남의 행정관리가 혼란스럽고, 많은 주현에는 국고가 비어 있으니 철저히 정리정돈해야하겠다고 말한다. 동시에, 운남의 염무(鹽務), 전법, 세수 변방사무에 관한 여러가지 계획과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건륭제는 그를 칭찬하고 바로 호부상서로 발탁한다.

 

건륭제가 세상에 살아있을 때, 총신 화신은 무한한 영광을 누렸다. 화신이 운남에서 북경으로 돌아온지 한달 후에 건륭은 화신의 6살된 아들에게 "풍신은덕(豊紳殷德)"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어린 딸 화효공주(和孝公主)를 풍신은덕과 정혼시킨다. 이 혼인으로 화신은 일약 황실인척이 된다. 정치적으로 명성을 얻었을 뿐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이익을 많이 얻는다. 수석군기대신 아계(阿桂)는 화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건륭은 그 사실을 알고는 자주 아계를 외지로 보내 군대를 지휘하게 하거나 공사를 감사하게 하거나, 사건을 처리하게 했다. 북경의 군기처는 실질적으로 화신이 책임졌다. 이를 보면 건륭제가 화신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 건륭제가 89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자 화신에게 바로 불운이 닥친다.

 

가경4년(1799년) 정월 초나흘, 가경제는 화신의 군기대신 직위를 박탈한다. 그리고 그에게 주야로 대내에서 건륭제의 유해를 지키라고 명한다.  실제로 이는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시킨 것이다. 이어서 어사들이 속속 상소를 올려 화신의 각종 비리를 탄핵한다. 1주일만에 가경제는 화신의 20대죄상을 선포하고 각성의 총독순무에게 의견을 제기하라고 한다. 직예총독 호계당은 앞장서서 의견을 표시한다. 화신을 능지처참해야 한다고. 이어서 각 성의 총둑 순무는 앞다투어 의견을 낸다. 만일 늦었다가는 나중에 자신의 앞날에 불리할까 우려한 것이다. 이때 가경제는 잔혹한 능지처참을 버리고, 화신에게 자진하도록 은혜를 베푼다.

 

이 정치적인 스타는 마침내 종말을 맞이했다.

 

가경제는 왜 화신에게 칼을 빼들었는가? 많은 사람들은 화신이 너무 부를 많이 쌓아서라고 한다. 민요중에 "화신이 쓰러지니, 가경이 배부르게 먹었다." 는 것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화신의 가산은 백은 8억냥인데, 청왕조 10년의 재정수입합계라는 것이다. 그의 부정부패는 밉지만 가경제가 화신을 죽인 진실한 원인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신 장성기(張誠基)가 화신을 탄핵하는 상소문에 가경제는 이런 비(批)를 남긴다: 짐이 만일 화신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천하인들이 화신이 있는 줄은 알지만, 짐이 있는 줄은 모를 것이다." 가경제가 한 말은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가경제가 화신을 죽인 진실한 이유일 것이다.

 

정치투쟁에서, 겉으로 드러난 원인은 왕왕 믿기 어렵다. 그안에 숨겨진 도광검영은 표면적인 원인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격렬하다. 건륭연간의 염세사건은 여러가지 문제에 관련되어 있고, 청나라 건륭시기의 정계의 여러 분야를 한번 살펴볼 수 있었다.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