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때 탐관오리와 석장(石匠) 유군필(兪君弼)의 사망

중은우시 2013. 11. 9. 23:18

글:소랑(小浪)3

 

건륭이 재위할 때, 거액의 부정부패를 저지른 탐관오리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건륭제는 비록 관대하고 인자하였고, 말년에 대탐관 화신(和珅)을 총애하여 비극의 씨앗을 남기긴 했지만. 건륭제는 관료사회의 정리정돈에서는 절대로 봐주는 법이 없었다. 어떤 측며네서는 조부 강희제나 부친 옹정제보다도 엄격했다. 일부 죄악이 분명하게 드러난 관리에 대하여 건륭제는 엄격하게 처리했다. 처리된 탐관오리들 중에는 총독, 포정사, 순무, 안찰사와 같은 봉강대리(封疆大吏)들도 적지 않았다.

 

건륭5년, 괴이한 사건이 경성을 뒤흔들고, 항간에서는 의론이 분분했다. 원래 북경성의 유군필이라는 한 착석장(鑿石匠)이 죽었는데, 그는 원래 공부(工部)에서 착석(돌에 구멍을 뚫어 깨는 것)을 업므로 삼았던 사람이다. 일찌감치 아들이 죽었고, 말년의 생활도 처량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100% 가난한 석장이었따.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죽은 후의 장례는 고관대작보다도 융중했다. 내각학사 허왕유(許王猶)와 같은 고관이 장례를 주재했고, 대학사 서본(徐本), 조국린(趙國麟)은 친히 조문을 갔고, 심지어 장정옥(張廷玉)까지도 사람을 보내어 조문했을 정도였다. 한 가난한 석장이 무슨 업적을 크게 세운 것도 아니고, 무슨 걸출한 재주를 지닌 것도 아닌데, 죽은 후에 이렇게 큰 영광을 누리다니, 정말 기이하고,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때문이었을까? 얼마후, 진상이 드러난다. 원래 유군필은 겉으로보기에는 아주 가난했지만, 암중으로 큰 재산을 모아두었었다. 그는 일찌기 아들을 잃었지만, 의녀(義女)의 남편으로 유군필의 사위인 허병의(許秉義)는 그의 재산을 독식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사위의 명의로 죽은 석장 유군필의 장례를 주재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내각대학사 허왕유와 친척간이었으므로, 그에게 부탁하여 고관대작들이 조문을 오도록 부탁하게 했고, 이렇게 기세를 드러냄으로써 유씨가족을 압박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관대작들이 줄지어 조문을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석장의 장례를 고관대작들이 융중하게 치러준 것과 탐관오리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처음에, 건륭제는 그저 조정대신이 비천한 출신의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절을 했다는 것을 이유로, 엄격하게 질책하였을 뿐이었다. 다만 다음해 삼월이 되자, 건륭제는 하나의 밀주(密奏)를 받게 되는데, 이 주절(奏折)은 '직진무은(直陳無隱, 직언을 하고 감추는 것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중영단(仲永檀)이 올린 것이다. 이 일은 표면적으로 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 중대한 부정부패사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병부상서 겸 구문제독 악선(鄂善)이 받은 뇌물만 만냥환금에 이르고, 시랑 오가기(吳家騏)도 유씨집안으로부터 은전 이천오백냥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제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가 드러났다. 뇌물범죄의 동기도 분명해졌다. 원래 가난한 석공으로 알려진 유군필은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한 사위는 재산을 독점하기 위하여, 비용을 쓰는 것을 아끼지 않았고, 고관대작에게 뇌물을 주고 이용했으며, 심지어 조정의 고관들에게 조문을 오도록 하고 장례식을 주재하도록 부탁했다. 그렇게 하여 권세가 크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유씨집안사람들을 압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는 결국 목적을 달성하여 재산을 독점할 수 있었다.

 

건륭제도 처음에는 중영단이 주절에서 쓴 내용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친왕, 화친왕, 악이태, 장정옥, 서본, 상서 납친(衲親), 내보(來保)등의 사람들에게 물어본 후에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바로 악선과 허병의를 처결하도록 하고, 허왕유, 오가기, 진호(陳浩)를 삭탈관직한다. 이제 고관대작이 가난한 석장의 장례식을 주재한 이해되지 않는 부정부패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자고이래로, 탐관오리는 어디에나 있다. 태평성대에는. 권리들의 부패도 더욱 심해진다. 소위 배가 부르고 등따시면 음탕한 생각이 나는 법이다(飽暖思淫慾).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청나라관리들 중에는 진정한 재주와 학식을 지닌 사람들 뿐만아니라, 기부금등을 통하여 매관매직한 자들도 있다. 기부금을 내고 관직을 얻는 방안을 건륭제가 거부하기는 했지만, 대고금천전투의 군수물자조달등을 위하여, 병력을 출동시키기 전에 건륭제는 기부금을 받고 관직을 준 사례도 있다. 그러나, 기부금을 내고 공생, 감생등의 관직을 얻은 자들은 관료사회의 부정부패를 조성했고, 태평성대의 골치거리가 된다. 건륭제이후, 청왕조는 점차 쇠락하는데, 날로 범람하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는 청왕조의 일대 폐정(弊政)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