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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는 차를 끓일 때 어떤 물을 썼는가?

by 중은우시 2015. 5. 4.

글: 진령신(陳令申)

 

 

 

 

역대제왕중에서, 건륭제는 차를 마시는 것을 아주 좋아한 편이다. 그는 차를 끓이는 물도 아주 중시했다. 그는 강소성 진강의 "중냉천(中冷泉)"이 가장 좋아서, "천하제일천"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일찌기 '중냉천'을 칭송하는 시편을 2개나 지은 적이 있다.

 

'중냉천'은 장강(長江)에 있다. 샘눈(泉眼)이 강바닥에 있으므로, 샘물이 강물속에서 솟아나온다. 각각 남냉천(南冷泉), 중냉천(中冷泉)과 북냉천(北冷泉)으로 나뉘는데, '중냉천'이 그중 수질이 가장 좋다. 기록에 따르면, '중냉천'의 물은 "비취처럼 파랗고, 술처럼 진하다(綠如翡翠, 濃似瓊漿)" 마시면 감열순후(甘冽醇厚, 달고 차며 진하다)하여 특히 차를 끓이는데 적합하다. 후당의 명사인 유백추(劉伯芻)는 일찌기 천하의 유명한 샘물을 모두 고찰한 다음 수질과 차를 끓인 후의 맛을 가지고 그들을 7등으로 나누는데, 그중 '중냉천'을 1위로 올려서 '천하제일천'이라 부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중냉천이 물로 차를 끓이면 맑은 향이 나고 달며 차갑다고 한다. 그리고 아주 신기하게도 찻잔에 물이 가득차도 넘치지 않는(盈杯不溢) 현상이 나타난다. 샘물을 물잔에 가득 부우면, 물이 찻잔보다 높아져소 물이 넘치지 않는다고 한다. 수면위에 동전을 얹어놓아도 동전이 가라앉지도 않는다.

 

'중냉천'의 샘눈은 강바닥에 있으므로, 샘물은 강물가운데로 솟아서 소용돌이를 이룬다. 빠르게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 샘물을 긷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소용돌이를 찾는 준비작업을 해야 하고, 그 후에 샘물에서 물이 가장 많이 나오는 정오의 시간을 골라서, 두껑을 덮은 동병(銅甁)을 소용돌이 속으로 집어던진다. 동병이 강물의 표층을 지나서 샘물이 나오는 곳으로 들어가면, 빠르게 병두껑을 열어, 진정한 '중냉천'물을 길어야 한다.

 

'중냉천'은 얻기가 아주 어려우며로 진귀하다. 건륭제가 남순할 때 진강을 지나면서, 중냉천의 샘물을 맛본다. 그가 북경으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그 맛을 잊지 못하여, 붓을 들어 청화시문관(靑花詩文罐)에 '중냉천'을 칭송하는 두 편의 시를 남긴다.

 

두 편의 시문은 광주중의약대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화시문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관은 청나라 광서연간에 제작되어, 청나라궁정에서 어용수를 보관하던 용도로 쓰였다. 시문관은 입이 작고, 목이 짧으며, 배가 불룩하고, 체형이 아주 크며, 입구에 두껑을 두었으며, 두껑의 표면에는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문양을 그렿다. 전체 조형은 원윤정치(圓潤精致)하고 고박고아(古朴高雅)하다.

 

청화시문병이 어깨부분에는 전서로 '천하제일천'이라는 다섯 글자가 쓰여 있다. 글자의 아래에는 한바퀴 돌려서 "수(壽)"문양이 있다. 그 문양이 아래 에는 소해(小楷)서로 청나라 건륭황제의 두 시문을 기록했다. 한편은 <어제시중냉천작(御製詩中冷泉作)>이고, 다른 한편은 <임오중춘월시중냉천작(壬午仲春月試中冷泉作)>이다. 시문의 내용은 건륭황제가 '중냉천'을 극히 찬미하는 것이다. 대체적인 의미는 오늘 내가 중냉천의 물을 맛보았는데, 천하제일천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다. 샘물은 달고 순후하며, 마시면 마치 신선의 음료를 마신 것처럼 마음이 시원해진다. 사람들로 하여금 신선이 된 느낌을 갖게 해준다. 내가 이번 생에 운이 좋게도 이곳으로 남순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음식을 맛보러가지고 않고, 다른 사람과 고담준론을 하지 않더라도, 그저 '중냉천' 물을 한 입 마신다면 만족한다.

 

건륭제는 중냉천물을 좋아하였지만, 멀리 남방에 있어 운송하기 불편했다. 그래서 북경 부근에서 '중냉천'에 필적할만한 샘물을 찾기로 한다.

 

샘물의 우열에 대하여, 건륭제는 자신만의 독특한 감별방법이 있었다. 그는 샘물은 청량(淸凉), 감첨(甘甛), 결정(潔淨)해야할 뿐아니라, 수질이 가벼우면 가벼울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건륭제는 특별히 내무부에 명을 내려 천하각지의 샘물이 무게를 재도록 한다. 측량을 해본 결과는 이러했다: 제남(濟南)진주천(珍珠泉)은 1말에 2리; 진강의 중냉천은 1냥3리; 항주의 호포천(虎跑泉)은 1냥4리였다. 오로지 북경의 옥천산샘물이 가장 가벼워서 무게가 1말에 1냥이었다.

 

측량결과가 나온 후, 건륭제는 아주 기뻐하며 옥천산물을 '천하제일천'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친필로 '천하제일천'비를 써준다. 비문에는 이렇게 썼다: "물맛은 단 것이 귀하고, 물의 질은 가벼운 것이 귀하다. 옥천은 1말의 무게가 1냥이나, 다른 유명한 샘물도 이보다 가벼운 것이 없다." 그후, 건륭제는 옥천산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았고, 북경을 떠나 외지로 순행할 때에도, 옥천산물을 가져가도록 해서 마셨다.

 

옥천산은 북경의 서부교외에 위치해 있고, 원래 역사가 유구한 황가원림이다. 산에는 나무가 무성하여 하늘을 가릴 정도이고, 산에는 샘물이 많다. 샘물이 옥처럼 맑아서 '옥천산'이라 불렀다. 명나라시인 왕영(王英)은 일찌기 시를 써서 이렇게 형용한 바 있다: "산하천류사옥홍(山下泉流似玉虹), 청냉불여중천동(淸冷不與衆泉同)"(산아래로 샘물이 흐르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무지개와 같다. 맑고 차갑기가 다른 샘들과 같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옥천산물은 일찌기, 명, 청 양대의 황궁 음용수였다. 청나라 건륭황제가 극력 찬미하면서 옥천산물을 점점 '천하제일천'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고, 점점 진강의 '중냉천'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건륭제의 측량비교로 옥천산물은 '잡질'이 가장 적다고 인정된다. 장기간 마시게 되면 병을 몰아내고 장수하는 효능이 있어 양생보건의 작용을 한다. 청나라때의 서태후는 양생을 아주 중시하고, 물을 중시한다. 그녀도 건륭제를 쫓아 옥천산물만 마셨다. 옥천산물은 양안보건(養顔保健)의 성수(聖水)라고 여겼던 것이다.

 

연구를 그쳐 중국의 고대인들은 발견한다. 옥천산물만 양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천물도 보건치병의 작용을 한다고. 고대의학서적에 따르면, 온천수로 목욕하면 근굴련축(筋骨攣縮), 수각불수(手脚不遂), 눈썹두발탈락등의 증세에 효능이 있다고 하였다.

 

온천물 이외에, 고대인들이 '백비탕(百沸湯)'이라고 부르는 물도 있다. 이것도 상풍(傷風)상식(傷食)등의 증세를 치료하는데 금나라때의 의학자인 장종정(張從正)의 연구에 따르면, 병세가 처음 나타났을 때, 약을 먹지 말고 1사발의 '백비탕'을 마신 다음 배를 문질러주고, 배를 문지른 다음 다시 마시며 더 이상 마시지 못할 때까지 한다. 그 후에 다시 이를 토하게 하여, 땀이 나오게 하면 된다. 고증에 따르면, '백비탕'은 기실 여러번 끓인 맹물을 말한다.

 

고대인들이 양생보건하는 물에는 기괴한 '감란수(甘瀾水)'도 있다. 소위 '감란수'는 강물 2말을 가지고, 표주박으로 계속 떠서 위로 높이 들고 하기를 반복한다. 수면의 포말이 수천개에 이를 때까지 이렇게 한다. 고대인들이 보기에 강물을 계속 들어올렸다 내리는 과정에서 물에 모종의 온화한 특성이 생겨나게 되어 인체에 보건작용을 한다고 보았다. 그후에 다시 감초, 반하(半夏)등의 약을 넣어 천천히 끓인다. 그러면 음허양성(陰虛陽盛), 불면증등의 증세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일부 고전명저들 가운데, 재미있는 물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서유기>에는 손오공이 주자국 국왕의 병을 치료하면서 '무한지수(無恨之水)'라는 물을 사용한다. 국왕이 잘 모를까봐 손오공이 설명을 덧붙인다: "이것은 천상에서 떨어진 것이며, 땅에 닷기 전에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무한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홍루몽> 제7회에는 설보채가 기침을 하게 되는데, '냉향환'을 조제하는데 거기에 쓰는 물이 노수(露水), 상수(霜水)와 설수(雪水)이다. 그중의 설수는 모통의 설수가 아니라, '소설(小雪)'때 하늘에서 내린 설수를 말한다.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설수로 얼굴을 씻으면, 홍안병(紅眼病)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열을 내리고 해독을 하며, 계절성 전염병, 더위먹은 격우 및 음주과다등의 증세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샘물을 긷는 시간에 대하여도 중국고대인들은 많이 따졌다. 그들은 샘물을 천하자연의 정화를 담고 있어서, 태양이 뜨기 전에 길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야 가장 좋은 수질을 맛보고 양생보건의 작용을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중국청나라때, 매일 새벽에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황색용기를 들 어용운수수레(運水車)가 궁문을 출발하여 옥천산으로 가서 물을 길었다. 길은 물은 청화시문관같은 물보관용병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