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만루(金滿樓)
1850,60년대에 미국 중서부지역에는 금광이 발견되고 이로 인하여 20여년에 걸친 골드러시가 일어난다. 이 영향으로, 많은 중국노동자들이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갔다. 비록 그들은 광산 혹은 철도에서 열심이 일을 하고 미국의 발전에 거대한 공헌을 세웠지만, 그들의 출현으로 백인은 취업에 위협을 받게 된다. 미국본토에서는 일부 신문에서 중국노동자를 지속적으로 추악하게 묘사하고 공격한다. 이로 인하여 '배화(排華)' 분위기가 형성된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인 마크 트웨인은 당시에 친히 이 골드러시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는 백인의 '배화'정서에 대하여는 의견이 달랐다. 자전적 소설인 <Roughing it>에서 마크 트웨인은 그가 접촉한 중국인들에 대하여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감성적인 묘사를 한다. 그가 보기에, 중국노동자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온순하고 술을 마실줄 모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한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중국인은 보기 드물었다. 나태한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한 중국인이 만일 손을 움직일 힘만 있다면 그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백인은 자주 일거리가 없다고 원망한다.그러나 중국인은 이런 원망의 말을 하는 적이 없다. 그들은 항상 방법을 강구하여 일거리를 찾는다."
이름을 날린 후, 마크 트웨인은 코네티컷주의 하트포트에 정착한다. 1872년, 청나라조정에서 파견한 미국유학아동이 코네티컷주에 도착한다. 아동들에게 하루빨리 현지언어를 습득하게 하기 위하여, 코테티컷주 교육당국은 이들 중국아동들을 미국인가정에 분산시키기로 결정한다. 당시에 최소한 100개의 미국가정에서 신청을 했다. 여기에서, 미국유학아동은 그들의 학습여정을 시작한다. 마크 트웨인의 두 딸은 나중에 이들 아동들의 친구가 된다. 중국인에 대한 호감과 중국일에 대한 관심으로 마크 트웨인 본인도 미국유학사무국의 단골손님이 되고, 책임자인 용굉(容閎)의 가까운 친구가 된다.
1881년이후, 미국정부는 청나라조정의 유학아동을 육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에 입학시켜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일본아동은 받아주었다), 미국서해안의 '배화'정서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중국과 미국의 관계에는 그림자가 드리운다. 아동미국유학계획은 이렇게 하여 요절될 운명에 처한다. 청나라조정이 유학사무국을 철수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질 때, 용굉은 근심에 차서 Joseph Hopkins Twichell목사에게 도움을 청한다. 트위첼목사는 미국의 각 대학총장들에게 이홍장에게 서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외에 친구인 마크 트웨인을 만나서 뉴욕으로 가 그랜트 대통령을 접견하여 그의 도움을 청하기로 약속한다.
당시의 정경에 대하여, 마크 트웨인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트위첼은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했고, 그란트를 만났을 때 힘있게 얘기하면서 반박할 수 없는 내용을 담도록 준비다. 모든 노력은 결국 그란트에게 중국의 총독대인 이홍장에게 보내는 청원서에 서명하게 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트위첼이 정식으로 그란트에게 설명하기도 전에, 그란트가 먼저 입장을 나타낸다. '나는 총독대인에게 서신을 쓰겠다. 단독으로 한 통을 쓰겠다. 그에게 더욱 유력한 증거를 제시하겠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내 말이라면 그도 중시할 것이다. 내가 바로 쓰겠다." 순식간에 트위첼의 모든 노력은 제로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치 그가 누구에게 1달러를 빌리러 갔는데,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상대방이 그에게 1000달러를 준 셈이다."
다만 아쉽게도, 용굉등의 노력은 결국 이 의미가 큰 유학계획을 유지시키지 못했다. 대다수의 유학아동은 학업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귀국해야 했다. 20년후, 마크 트웨인은 여전히 중국에 관심을 가진다. 190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에서 유명한 <The Sun>지에 미국선교사 William Scott Ament(중국명 梅子明)에 대한 인터뷰기사가 실린다. 인터뷰에서, 아멘트는 중국에 대한 약탈은 정당하다고 하면서 그는 다른 선교사의 말을 계속 인용했다. "미국인의 온화한 손은 독일인의 철권을 당해내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온화한 손으로 중국인을 대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이용할 것이다."
1900년 한여름,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정명한 후 공개적으로 사병들에게 3일간 약탈하도록 허용한다. 당시에 일부 선교사들도 약탈행렬에 가담한다. 보도에 따르면, 몇몇 유명한 선교사는 후안무치하게 이렇게 말했다: "버린 물건을 줍는 것은 강탈이 아니다. 소유자의 수중에서 재물을 빼앗아야 강탈이다."; 더욱 심한 경우도 있었다. 어떤 선교사는 북경 및 그 부근지역에서 약탈활동에 참가한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공격을 받은 지역으로 가서 '납공원정'을 진행한 것이다.
이런 후안무치한 언론을 보고, 마크 트웨인은 <암흑 속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라는 글을 발표하여 엄중하게 비판한다. 그 글에서 마크 트웨인은 신랄한 필치로 이들 선교사를 조롱한다. "아멘트 목사는 이미 모든 피해자를 위하여 300냥씩 은자를 뜯어내고, 모든 훼손된 교도재산에 대한 충분한 배상을 강박하였다. 그리고나서 배상금의 13배에 달하는 벌금도 징수했다.; "아멘트 선생은 빈곤한 중국농민에게서 13배의 벌금을 착취해냈는데, 이로 인하여 그들, 그들의 처자식 그리고 무고한 아이들은 천천히 굶어죽었다. 이렇게 얻은 댓가를 복음을 전파하는데 쓴다. 그의 이처럼 돈을 긁어모으는 재주는 바로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모욕하는 태도이다. 놀랍고 두려운 일이다. 정망 이 시대는 그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가 없다."
사실상 매번 중국인민이 겁난을 당할 때, 국제적으로 정의의 목소리가 있었다. 비록 이들 목소리가 유력한 행동으로 바뀌지는 못했지만, 마크 트웨인과 같은 국제적인 우호인사들은 중국인민들이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중국의 정치 > 중국의 대외관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워싱턴기념탑의 중국비석 (0) | 2014.04.29 |
---|---|
호춘향(胡春香): 월남의 재녀 (0) | 2014.04.04 |
남사군도의 손익계산 (0) | 2013.08.05 |
서방이 중국을 견제하는 3가지 논조 (0) | 2011.06.06 |
중러 국경지역의 혼혈촌 (0) | 2011.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