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요망동방주간
시간은 서유강(徐維剛)에 있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되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침대위에서 잠으로 보낸다. 누군가 그를 만나러 오면 조카들이 그를 침대에서 을이켜 세우고, 그에게 그럴듯한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더러워진 군모를 씌워준다. 이때가 되면 서유강은 허리를 쭉 펴고, 어린아이같이 기뻐하는 미소를 드러낸다. 짙은 남색의 눈동자는 아주 다른 빛을 내게 된다.
“절대로 그에게 중국인인지 러시아인인지 묻지 마세요.” 큰 조카 서복생이 말한다. “누가 물으면 그는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흑룡강성 흑하시 손극현의 변경일대에 있는 몇 개 마을에서 87세된 서유강은 단 한 명 남은 순수한 러시아혈통의 사람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80여년을 살다보니, 러시아어는 그에게 낯설고 먼 것이 되었다.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는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가끔 입을 연다. 그의 말에는 동북사투리가 짙게 느껴진다.
“나를 아직 기억하는가? 나는 안드레이야” 서유강은 입술을 움직여 웃음을 보인다. 담배에 누렇게 변한 이빨이 드러난다. 2010년 7월의 ‘호적증명’에 서유강의 소련이름은 ‘트비센코 이반 안드레아비치”로 되어 있고, 호유형에는 ‘무국적’이라고 적혀 있다. 이것이 서유강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문건이다.
“러시아도 그를 인정하지 않고, 중국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어떤 촌민의 말이다. “그래도 그 바보 같은 사람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
조카들은 뒤에서 몰래 그를 ‘바보어르신’이라고 부른다.
서유강은 1924년에 태어났다. 이전 몇 년동안은 소련의 역사상 가장 심한 동란을 겪었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으로 볼세비키당이 정권을 획득했고, 1924년 소련의 창건자 레닌이 사망한 후,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고, 금방 대숙청이 시작된다.
공개된 학술자료상 러시아이민의 첫번째 붐이 1920-30년대에 나타난다. 십월혁명의 승리와 신경제정책의 실시로 지식인들이 대거 서방과 중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나의 할머니집안은 레닌에게 쫓겨났다.” 서유강의 둘째 조카인 서복해는 어렸을 때 이렇게 들었다고 한다. 할머니인 게친리나는 한 귀족가정에서 태어났고, 집안사람은 모두 군인이었다. 전쟁중에 게친리나의 남편이 전사한다. 대숙청이 시작된 후 귀족출신인 게친리나는 1살가량된 서유극을 치마 속에 넣고 조심스럽게 얼음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 인근 중국으로 도망친다.
그때 대거 산동에서 동북삼성으로 밀려온 사람들과 만난다. 금방 게친리나는 서씨성의 산동인과 만나서 강변의 작은 마을에 가정을 꾸린다. “그 산동인이 바로 나의 할아버지입니다” 서복생의 말이다. 비록 이미 러시아이민의 3세이지만, 서복생은 여전히 러시아인의 용모를 닮았다. 남회색의 눈동자, 구렛나룻, 콧구멍은 동전 하나도 들어갈만큼 크다.
일찍이 제정러시아시절에 손극현 병단촌의 왕금재의 부친은 건너편 강변에서 장사를 했다. 몇 년 후 그는 한 소련여인과 결혼했고, 중러변경에서 9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살았다. “개략 1930년대쯤, 소련측의 공기가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여러 측면에서 통제가 많아졌다.” 왕금재의 말이다. 그때는 스탈린시대이다. 그리고 1934년 소련대숙청운동의 전기였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이번 대숙청운동에서 무고한 인물을 체포하는 행위는 모두 심야에 진행되어, 모두 가슴을 졸이며, 밤중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릴까 겁을 냈다. 높은 건물에 살고 있던 사람은 체포된 후의 고문과 모욕을 피하기 위하여 비밀경찰이 문을 두드리면 건물아래로 투신하여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왕금재의 부친은 처자식을 데리고 중국으로 도망친 것이다.
산동 평도사람인 묘평장(苗平章)은 소련에서 장사를 할 때, 현지에서 볼가라는 아가씨와 결혼을 한다. 몇 년 후 네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모평장의 아들 모중림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집은 당시 강가의 마을에 살았는데, 중국인들은 모두 강가에 사는 것을 좋아했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 바로 도망쳐올 수 있었다. 소련이 성립된 후, 토지혁명이니 집단농장이니 모든 재산은 공유화되었다. 모두 손해를 보게 되니, 가족을 이끌고 다시 되돌아왔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묘중림 일가는 손극현 변경촌에 정착한다.
“당시 상황은 기본적으로 동북으로 건너온 산동사람들이 소련여인을 처로 맞이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저명한 한학자이자 역사학박사인 메리호프가 내놓은 숫자에 따르면, 중국에서 러시아이민자는 가장 많았을 때 40만에 달했다. 1920년대에 10만명이 소련으로 되돌아가고, 또 다른 10만명은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다. 지금 서유강이 소재한 손극현 변강촌에는 165호의 촌민들 중에서 혼혈인이 75호, 264명에 이른다.
묘중림이 기억하는 변강촌은 웃음소리와 노래소리가 울려퍼지는 곳이었다.
“이전에 마을에는 21명의 소련할머니가 있었다. 중국말은 제대로 못했다. 매주 일요일이면 할머니들은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을 췄다.” 묘중림의 말이다. 나중에 마을에 사는 중국인들이 싫어하자, 따로 모여살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여 현재의 손극현성이 생긴 것이다.
아무리 즐겁게 웃고 노래불러도, 집안과 혈통에 관한 기억을 지울 수는 없었다. 변강촌의 촌민에 따르면, 당시 마을의 소련노인들을 고향을 그리워해서, 땅에 쪼그리고 앉아 울곤 했다. 여름에 강에서 소련의 배가 운행을 할 때면, 일부 여자아이들은 강변에서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면서, 모친이 그녀들을 중국으로 데려온 것을 원망하곤 했다.
1933년 3월, 일본의 관동군이 손극을 점령한다. 이때 중국으로 이민와있던 러시아인들에게 좁은 흑룡강의 물은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된다.
일본경찰대는 변강촌에 주재했고, 일본대장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친일파였다. “어떤 사람은 소련으로 도망치려고 했다가 붙잡힌 다음에 맞아죽었다.” 묘중림의 말이다. “가장 나쁜 놈들은 바로 그들 이귀자(二鬼子, 친일매국노)들이다.”
변강촌의 촌민 원광영의 고모가 16살이 되었을 때 소련으로 도망쳐 간다. 그해에 일본군이 동북을 막 점령한 때였다. “당시 집안에서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 했다. 나의 고모를 동씨성의 혼혈늙은이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리하여 결혼 하루전날 고모는 소련으로 갔다. 내 할아버지의 부인도 같이 도망쳤는데, 그 부인은 매일 할아버지에게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같이 도망친 것이다.”
1990년대, 원광영의 고모는 중국으로 친척방문을 하러 왔다. 원광영은 그제서야 알았다. 고모는 소련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었고, 소련에서는 그녀를 일본에서 보낸 간첩으로 알았다고 한다. 2년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모스크바로 보내어졌다. 친척을 찾으러온 고모도 그녀가 떠난 후에, 부친은 딸이 없어진 것을 알고 바로 경찰국에 신고했는데, 일본경찰은 노인을 소련간첩으로 취급하여 생매장해버렸다고 한다.
변경의 몇몇 마을에서 소련할머니들은 아직도 자주 모임을 가진다. 러시아민요를 몇 가지 무르곤 한다. 그러나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꾸지 않는다. 돌아가서 죽느니, 이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나으니까.
“문혁때 우리를 뭐라고 불렀는지 아는가?” 조금 낡은 흙집에서 서복승의 큰 코는 몇번 벌렁거렸다: “소련간첩”
서복승은 기억하고 있다. 문화대혁명때 전체 마을에 사는 30호중에서 4호만이 순수한 중국인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소련간첩’이 되었다. 변강촌은 한 때 ‘간첩촌’이 되어 버렸다. 그해에 서복승은 겨우 13살이었다.
글을 벼로 읽은 적이 없는 서복승은 구체적으로 ‘소련수정주의간첩’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도 집안의 어른들이 ‘간첩’이 되면 그도 ‘간첩의 자식’이 되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서복승은 사발을 들어 술을 몇 모금 마셨다. 그 당시는 전혀 회고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1950년대말, 중국과 소련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정보가 폐쇄된 시대에, 서복승등 촌민들은 양국의 충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생활은 단순했다. 여름과 가을에는 파종하고 수확하며, 겨울에는 그저 술을 마시는 것이 가장 큰 낙이었다.
“개략 60년대 초일 것이다. 그때 우리는 모조리 간첩으로 몰렸다.” 굉강촌의 촌민 서월아는 기억한다. 당시 마을의 모든 혼혈인들은 비판을 받고, 조반파들이 간첩임을 인정하라고 핍박했다.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길거리를 끌고 다녔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선국이 어디인지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저 말을 만드는 수밖에는. 무선국은 불태우는 가마와 같다고 말하였다. 조반파들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연락하는지. 우리는 계속 말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쪽에서 불을 피우면 우리가 본다고. 생각해봐라 강이 중간에 놓여있는데 보이긴 뭐가 보이겠는가?”
굉강촌의 묘중림은 기억한다. 당시 마을에 이영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모친이 러시아인이다. 문혁전에 이영귀는 ‘소련간첩’으로 몰렸다. 비판투쟁을 받을 때, 조반파는 그의 목에 거의 100근이 되는 구동륜을 걸었다. 뒤에 있던 조반파가 발로 한번 차면 구동륜이 돌고, 목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원광영의 둘째형은 항일전쟁후 입경하는 소련홍군을 맞이했다는 이유로 ‘간첩대장’이 되어 버렸다. 조반파는 그의 집에 탱크를 숨기고 있다고 말했다. 집앞과 뒤를 모두 파보았지만, 바퀴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 형이 잡혀갈 때는 하얀 옷을 입고 갔는데, 나올 때는 이미 빨간 옷이 되어 있었다. 하도 맞다보니 도저히 견디지 못해서, 우물로 뛰어들었다. 사람이 죽었지만, 우리는 울지도 못했다.”
나중에 촌민들은 아쉬워한다. “2-3일만 더 버텼다면 명예가 회복되었을 것이다” 명예회복후 마을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추도회를 열었다.
굉강촌의 촌민은 이렇게 털어놓는다. 문혁때 굉강촌과 상도간촌은 원래 하나의 대대였는데, 문혁이 끝난 후 굉강촌의 혼혈인들은 중국인들과 함께 살려고 하지 않았다. 죽어도 따로 살겠다고 했다. “그들 혼혈인들도 대단했다. 소와 말을 모조리 가지고 갔다. 인민공사 사람들은 화가 엄청나게 났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나간 기억은 더욱 또렷하다.
수십년후 당시 13살이던 서복승은 이미 지천명의 나이를 넘겼다.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은 중국인 며느리를 얻었고, 작은 아들은 아직도 결혼하지 못했다. “아비인 내가 살아있는 한, 그는 외국여인이나 혼혈여인을 찾을 생각을 말라. 어림도 없다.” 서복승은 술이 가득찬 잔을 내리쳤고, 다시 한번 회남색의 눈동자를 부릅떴다.
굉광촌의 대부분 혼혈인들과 마찬가지로, 서복승 형제들은 자신의 러시아민족혈통을 단절시키고자 애쓴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하나의 신념이 있다. 중국인과 결혼해야 한다. 돈을 얼마를 쓰든지 중국인과 결혼해야 한다.
1995년, 서복승의 동생 서복하는 운이 좋게도 동북아가씨 팽계여와 결혼한다. 그리고 아들 서연을 낳는다. 이미 제4대 이민이 태어난 것이다. 서연의 용모는 여전히 러시아인을 아주 닮았다. 그러나 서복승은 믿고 있다. 일대 일대 순종의 중국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면, 혈통과 용모도 분명히 바뀔 것이라고.
촌민 서월아도 러시아인의 얼굴을 한 여인이다. “반드시 중국인에게 시집가겠다.” 서월아는 이것은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요 몇십년동안, 항상 차별받는다고 느꼈다. 집안의 부부가 싸우더라도, 상대방은 너 ‘이모자(二毛子)’가 어쩌구저쩌구 한다. 이제 그 말은 듣기 싫다. 나의 자식이 다시 듣게 하고 싶지 않다.”
서복승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다른 사람이 그들을 ‘이모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 말을 하는 자만 있으면 나는 바로 달려가서 묻는다. 네가 뭘 가지고 나를 이모자라고 부르느냐. 나는 중국인이다.”
평소에 얘기하면서도, 서복승은 습관적으로 중국을 ‘우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건너편의 러시아를 ‘그들’이라고 부른다. ‘그들 러시아의 일은 나도 관심이 있다. 일본외상이 오늘 러시아로 갔다. 화제를 바꿔서, 서복승은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온다. “그래도 우리 중국이 좋다. 농업세도 면제해주고. 우리는 술을 조금 적게 마셔서 몇 년을 더 살아서 국가가 어떻게 바뀌는지 보고싶다.”
어쩌다 많이 마시게 되면 서복승은 자신의 귀족혈통을 자랑하곤 한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다. 순수한 러시아족이다. 우리의 생긴 것을 보라. 노란 머리, 파란 눈. 마을에 어떤 혼혈은 검은 머리, 검은 눈이다. 이들은 러시아의 집시족이나 마찬가지다 차별대우받는.”
노란머리, 파란 눈 말고 서복승의 가족들은 조금도 러시아인같지가 않다.
“뭐라고. 내가 러시아민요를 불러주겠다.” 서복승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카츄사를 부르는데, 곡조는 러시아민요이지만 가사는 동북사투리이다.
유럽인의 용모와 비슷하여, 서복승은 몇 년간 연기자로도 활동했다. 지금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여러 곳을 다녀보았다는 것이다. “나는 천진에 22일을 있었고, 영파에 16일, 주산에 14일, 동양에 7일을 머물렀다. 나중에 횡점으로 갔다. 가는 길에 서복승은 자주 신강사람취급을 당했다. 양고치를 파는 신강인은 그의 손을 붙잡고 양고치를 쥐어주었다.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장사치는 1근이 2원하는 사과를 그가 외국인인줄 알고 1근에 15원을 불렀다. 서복승이 말을 하자 그 장사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외국인이 동북사투리를 하지.”
지금 전체 굉강촌에 러시아어를 할 줄아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마을의 음악가 원광영은 이호(二胡) 곡인 <새마(賽馬)>를 연주한다. 손풍금을 안고서. 그러나 러시아노래는 끝까지 할 줄아는 것이 없다.
굉강촌의 촌서기인 원신파는 비록 흑룡강성에서 성급 ‘러시아민족촌’으로 명명되었지만, 마을에는 러시아민속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저 1991년, 일부 러시아혼혈의 촌민에게 교권증(僑眷證)을 발급했고, 시험볼 때 가점을 조금 받는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예전에 러시아로 간 중국인들도 습관을 모두 바꾸었다.” 병단촌의 왕금재의 말이다. 어려서부터 모친으로부터 러시아어를 배워서, 1992년, 왕금재는 러시아로 가서 통역을 했고, 16년간이나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중러혼혈인을 한명 만났다. 그의 할아버지가 청나라말기에 건너갔다. 그는 자신의 성이 장씨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조상이 산동에 살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말은 한 마디도 못했다. 그리고 소씨성의 사람도 있어는데, 중국혈통 때문에 1937년에 경찰국에 잡혀갔고, 2시간이나 서 있도록 했다. 당시 이 소씨성의 사람은 자신이 중국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을 감히 노출시킬 수가 없었다고 한다.”
왕금재에게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1995년, 그가 러시아에서 통역을 할 때, 한 자동차수리공장에서 간부모양을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공문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왕금재가 중국인인 것을 알고 나자, 과거 양국의 다툼을 모두 후르시초프의 탓으로 돌렸다. 왕금재는 감사의 뜻을 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왕금재는 요구르트와 샤워도우빵(sour dough bread)을 잘 먹는다. 그러나 처는 만들 줄을 모른다. “러시아의 생활습관으로 말하자면 이것 정도가 남았다.”
하늘이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서씨집안의 형제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신다. 아침에는 큰 잔 한 잔, 점심에는 큰 잔 두 잔, 저녁에 다시 큰 잔 두 잔. 매일 이렇게 지낸다. 마을에 장삼이라는 젊은이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죽었다. 장삼의 얘기를 하면서, 서복하도 탄식을 한다. 그래도 살아가려면 술을 마셔야 한다.
변강촌의 묘중림은 모친을 따라 소련노래를 배웠고, 소련춤을 배웠다. 조선전쟁때, 그는 부대의 문공단에 들어가서, 조선에서 3년간 살았다. 지금은 80여세이지만 묘중림은 아직도 춤의 스텝을 기억한다. 두 발은 아직도 가볍게 움직인다. “나의 모친이 살아있을 때, 레바화를 할 줄 알았다. 지금은 이미 끊겼고, 아무도 할 줄 모른다.”
마을의 중국인과 강건너의 관계는 거의 끊겨버렸다. 원광군은 기억한다. 친척방문이후 고모일가는 다시 온 적이 있다. 그도 가족을 데리고 세번 러시아를 방문했다. 그러나 사람이 죽자 관계가 소원해지고, 지금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누가 감히 연락하겠는가? 모두 후유증을 걱정한다. 다시 무슨 운동이 있을까 겁난다.” 나이 팔순을 넘긴 묘중림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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