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워싱턴기념탑의 중국비석

by 중은우시 2014. 4. 29.

출처: <안과유성(雁過有聲): 중미인문교류의 기억>

 

 

 

미국인이 광주(廣州)에 오고나서 십년간, 청나라관리들은 여전히 미국인과 영국인을 구분하지 못했다. 청나라정부는 "외국의 상황에 대하여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알려 하지 않은 상황이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아편전쟁이 발발한 후, 서방국가의 튼튼한 배와 날카로운 대포는 청나라정부로 하여금 부득불 서방세계의 변화를 주목하게 만든다. 임칙서(林則徐), 위원(魏源), 양정남(梁廷枏)과 서계여(徐繼畬)등 개명되고 진보적인 애국자들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고려에서, 미국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특별히 미국상황의 소개를 중시했고, 전혀 감추지 않고 미국의 장점을 추앙하고 호평을 내렸다. 이것은 근대중국에서 처음으로 '세계에 눈뜬' 중국지식인들의 미국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 그중, 서계여는 그들중 가장 미국을 추앙하고, 미국대통령 워싱턴을 존경하던 인물이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가본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내셔널 몰에 위치한 워싱턴기녑탑은 이 도시의 랜드마크 건축물이다. 동남서북의 4개방향의 멀지 않은 곳에 각각 미국국회의사당, 제퍼슨기념관, 링컨기념관 및 백악관이라는 4개의 중요건축물이 있다. 그것은 순백색의 대리석으로 만든 첨탑이며 높이 550피트이고 멀리서 보면 하늘을 향해 찌르는 날카로운 검과 같다. 기념탐의 가운데는 비어 있고 계단이 있어 올라갈 수 있다. 탑의 10층 서쪽 벽에는 아주 특이한 화강암석비가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의 주변에는 승려, 용, 투자 및 정교한 꽃무니가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동방특유의 네모난 한자로 스여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흠명복건순무부원대중승서계여소저<영환지략>왈(欽命福建巡撫部院大中丞徐繼畬所著<瀛寰誌略>曰), 안(按), 화성돈(華盛頓), 이인야(異人也). 기사용어승광(起事勇於勝廣), 할거웅어조류(割據雄於曹劉), 기이제삼척검(旣已提三尺劍), 개강만리(開疆萬里), 내불참위호(乃不僭位號), 부전자손(不傳子孫), 이창위추거지법(以創爲推擧之法). 기어천하위공(幾於天下爲公), 침침호삼대지유의(駸駸乎三代之遺意). 기치국숭양선속(其治國崇讓善俗), 불상무공(不尙武功), 역형여제국이(亦逈與諸國異). 여상견기화상(余嘗見其畵像), 기모웅의절륜(氣貌雄毅絶倫), 오호(嗚呼), 가불위인걸의재(可不謂人傑矣哉)! 미리견합중국이위국(米利堅合衆國以爲國), 폭원만리(幅員萬里), 부설왕후지호(不設王侯之號), 부순세급지규(不循世及之規), 공기부지공론(公器付之公論), 창고금미유지국(創古今未有之局), 일하기야(一何奇也)! 태서고금인물(泰西古今人物), 능불이화성돈위칭수재(能不以華盛頓爲稱首哉)!

 

대청국절강영파부전(大淸國浙江寧波府鎸), 야소교신배입석(耶蘇敎信輩立石), 함풍삼년육월초칠일(咸豊三年六月初七日), 합중국전교사지(合衆國傳敎士識)"

 

그렇다면, 서계여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왜 미국대통령 워싱턴을 칭송했는가. 위싱턴을 진승,오광, 조조, 유비보다 뛰어나다고 묘사하고, '삼척검을 들고 영토를 만리나 개척하고" '기도와 용모가 웅의전륜한' 인걸이며, '서방세계제일위인'이라고 하였을까? 그가 워싱턴을 칭찬하는 이 글이 어떻게 하여 석비에 새겨지고, 석비는 또 어떻게 하여 미국 워싱턴기념탑에 놓여지게 되었을까?

 

서계여(1795-1873)는 산서 오대 사람이며 자는 건남(健男), 호는 송감(松龕)이다. 서향문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힌다. 19세에 거인이 되고, 186년에 진사가 된다. 청나라정부에서 한림원편수, 섬서강남양도감찰어사, 양광염운사, 복건포정사, 복건순무등의 관직을 지냈다. 나중에 총리각국사무아문행주에 이르고, 총관동문관사무를 겸임했다.

 

서게여는 근대중국에서 최초로 눈을 들어 세계를 본 청나라관리중 하나이다. "근대중국에서 눈을 떠 세계를 본 제일인"이라는 임칙서와 "오랑캐의 뛰어난 기술을 배워서 오랑캐를 이긴다"는 위원과 비교하자면, 그는 미국과 서방세계에 대한 인식이 더욱 앞섰다. 임칙서가 처음 광주에 갔을 때, 세계 및 미국에 대한 지식이 아주 적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우스개거리를 낳는다. "미리견국(미국)은 국주(國主)가 없고, 단지 24곳의 우두머리가 있을 뿐이어서, 말을 모조리 전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조회(照會)가 필요없다고 했다. 당연히, 임칙서는 나중에 겸허하게 배워서, <사주지>를 번역하여 비교적 확실하고 계통적으로 미국을 이해하고 소개하는 계기를 만든다. 위원의 저작 <해국도지>의 미국에 대한 부분은 중요자료가 주로 Elijah Coleman Bridgman(裨治文)의 <미리가합성국지략(美理哥合省國誌略)>에서 따왔다.

두 사람과 비교하자면, 서계여는 더 많이 직접 공부했다. 그는 번잡한 공무를 처리하는 나머지 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천신만고끝에 자료들을 수집한다. 그리고 미국전도사 아비리(雅裨理), 영국영사 이태곽(李太郭), 아례국(阿禮國)등에게 가르침을 청한다. 그리고, "옛날 서적을 살피고" "추고하고 고증한다" 5년의 시간을 들여 여러번 원고를 고치고 다듬어서 마침내 1848년 <영환지력>을 펴낸다.

이것은 근대세게지리을 연구하고 나아가 세계역사, 경제, 정치, 군사등 방면을 탐구하는 종합적인 저작이다. 저명한 지리학자 장목(張穆)은 이를 "해국파황지작(海國破荒之作)"이라고 불렀다. 이 저작은 '천조상국'의 천하통일이라는 사상적 질곡을 벗어났고, 구미의 선진적인 정치, 경제, 문화와 다원문화의 세계를 소개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일깨워주고 도와주었다. 미국의 저명한 중국문제전문가인 용부위(龍夫威)는 서계여 및 그의 <영환지략>에 대하여 10여년에 걸친 심도있는 연구를 진행한 다음 <영환지략>은 "서방강국의 본질을 탐색하고, 중국의 세계에서의 비참한 처지를 분석하는 방면에서 모두 객관적인 지리학범주를 뛰어넘었다."고 평가했다.

<영환지략>에서는 미국을 그 어떤 나라보다 중시했다. 심지어 당시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불가일세의 영국보다 중시했다. 이 책은 미국을 아주 상세히 소개한다. 지리위치, 역사 및 풍속인정을 소개하는 외에, 특별히 민주제도, 워싱턴의 신국가창립등을 소개했다. <영환지력>은 중점적으로 미국의 26개주를 소개한다. 각주에 대한 소개를 통하여, 물질문명과 발잘한 공상업에 대하여 상세하게 분석하고, 비교한다. 결론은 미국이 강성해진 원인의 하나는 공상업이 발전한 것이고, 미국의 급속한 발전은 사통팔달의 교통망에 기초한다고 하였다.

<영환지략>은 미국의 정치제도를 극력 숭상한다. 그것을 '고금에 없던 기적'이라고 불렀다. 서게여는 미국관리를 선거로 뽑는 것은 아주 뛰어난 제도라고 보았다. 이런 제도는 정치적 특권도 없고, 세습등급도 없으며, 세습통치도 없게 된다. 선거제도의 기초위에서 건립된 대통령제는 '각 부서가 한 마음이 돠고, 명령이 하나로 되어, 대국들과 교섭을 함에 있어서 무시하는 나라가 없었다."

<영환지략>이 출판되자, 사회에서는 큰 파장이 일어난다. 서계여는 자칭 "보경부재(甫經付梓), 즉등방의(卽騰謗議)"이라고 하였지만, 책에서 서방세계를 소개하고 평론한 것은 봉건권력귀족에 대한 탄핵공격을 불러온다. 심지어 증국번 조차도 "서송감중승(서계여)이 책을 쓴 것은 영국오랑캐를 크게 과장한 측면이 있다."고 한다.

1850년, 서게여는 영국의 두 전도사에게 신광사옥(神光寺屋)을 임대한 건으로 인하여 복주에서 요양하고 있던 임칙서가 탄핵을 당하고 1851년 삭탈관직되어 북경으로 돌아온다. 직위가 강등되어 태복시소경이 된다. 아무런 할 일없는 한직이다. 1852년, 이부에서는 서게여가 순무로 재직하던 동안 죄인을 체포하는 일을 지연했다는 이유로 그를 파직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산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서계여는 복건순무로서, 오늘날의 복건성장에 해당하는 청나라의 고관이다. 그가 이런 사소한 일로 파직된 것은 함풍제의 즉위를 전후하여 청나라조정에 강경파가 득세한 것과 관련이 있다. 도광제 후기에 총애를 잃은 임칙서는 바로 그 카드로 사용된 것이다. 서계여의 <영환지략>은 그가 청나라조정이 강경파들이 보기에 '투항파'의 대표인물이 되도록 만들었다. '오랑캐를 칭송하고, 오랑캐의 우두머리에게 아부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서계여 및 그의 <영환지략>의 영향은 심원하다. <영환지략>은 당시의 일부 사대부와 식자들 사이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학사 기준조, 운귀총독 오문로등이 모두 동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복건, 절강지역의 고관들은 이 책을 칭찬할 뿐아니라, 서계여의 진보사상을 받아들였다. 1960년대이후, 양무파의 일부 관리들은 <영환지략>을 중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깨닫고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초대 주영공사 곽숭도등이 그러하다. 강유위, 양계초는 모두 자신은 <영환지략>에서 최초로 서학을 배웠다고 말한다. 청나라말기 10여년간, <영환지략>은 계속 발간하여, 독서인들이 집에 비치하는 책이 된다. 서태후조차도 신축년에 북경으로 돌아온 후, 이 책을 손에 들고 읽었는데, 외국의 사정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혁명파는 서방의 공화제 및 워싱턴의 사적에서 크게 고무받는다.

서게여가 워싱턴을 칭송한 글은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가져다 준다. 나아가 중국-미국 양국의 우호교류와 우의의 상징이 된다.

미국은 초대대통령 워싱턴의 탄신100주년을 기념하여 전미국 및 전세계에 기념품을 모집하고, 1848년부터 기념탑을 건립한다. 중국의 선교사들은 1851년에야 이 일을 알았다. 선교사 정위량(丁韙良)은 당시 영파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서계여의 친구인 장사계(張斯桂)와의 교류과정에서 서계여가 워싱턴을 알 뿐아니라, 관련 글을 발표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정위량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것은 아주 좋은 기념자료이다.

그리하여, 정위량과 다른 선교사들이 움직여서, 상급의 돌을 구매한 후, <영환지략>의 원문을 찾아서, 워싱턴을 칭송하는 글을 비문에 새긴다. 그리고 대청국 절강 영파부의 명의로, 1853년 건축준비중인 워싱턴기념탑에 보낸다. 석비는 바다를 건너 미국의 수도에 도착한다. 1862년, 미국선교사 백가(伯駕)는 비문을 영문으로 번역한다. 이렇게 하여, 미국인은 이렇게 먼 중국의 정부관리 겸 학자가 그들의 국부 워싱턴을 존경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국과 각국의 중국주재관리들은 여러번 청나라정부에 서계여에 대하여 물어본다.

1862년, 청정부는 북경에 경사동문관을 설립하여, 양무운동에 필요한 번역인재를 양성한다. 파직후 산서 평요 초산서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서게여는 1865년 다시 관직에 나선다. 총리각국사무아문행주, 겸총관동문관사무가 된다. 미국과 각국의 사절단은 모두 그를 예우해주었다. 미국정부는 서계여가 워싱턴 대통령을 찬양한데 감사했고, 존슨 대통령은 스튜어트의 작품의 모작인 워싱턴화상을 공식선물로 서계여에게 보내준다. 1867년 10월 21일, 미국주중국대사 포안신(蒲安臣)은 서계여에게 화상을 전달하는 의식을 북경에서 거행하는데 상당히 융중했다. 포안신은 치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근 20년전에, 당신은 중국바깥의 각국의 역사지리에 관한 저작을 출판했다. 이 저작에서 당신은 많은 노력을 들여서....당신은 고찰을 거쳐 그를 위인의 으뜸이라고 하였다.....이런 말은 이미 워싱턴에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한 국민들에게 번역되고 인용되었다. 그들의 감사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대통령께서 특별히 국무장관에게 뛰어난 예술가를 모셔서 이 화상을 제작하게 하였다....오늘, 나는 미국의 전체 인민의 명의로, 모든 아름다운 축원을 담아, 이 화상을 드린다. 이후 당신과 당신의 동포들이 이 가치있는 기념품을 볼 때, 영원한 우의를 기억하고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바란다."

<뉴욕타임즈>의 1868년 3월 29일 제4판에는 "미국의 중국에서의 영향'이라는 제목으로 이 일을 보도했다. 제10판에는 포안신의 치사와 서계여의 답사를 전문 실었다. 서계여의 답사의 내용은 개략 다음과 같다: "나에게 귀국의 창시인 워싱턴화상을 주면서, 당신이 나를 높이 평가하니, 이는 실로 명실상부하지 않다고 여긴다. 내가 이 아름다운 선물을 한번 또 한번 보니가 워싱턴이 나의 앞에 나타난 것같다. 나의 기쁨과 감격의 마음은 일시에 말로 하기 힘들다. 귀국의 기초를 닦는 측면에서, 워싱턴은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미 전인류의 모범이자 스승이다. 그의 현덕은 이미 고대성현과 그이후의 각 위인들의 하나의 유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영원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다.


 

이 사건은 중국미국 양국간의 우의와 교류를 심화시켰다. 동시대의 미국인은 서계여 및 그의 <영환지략>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높다. 위삼위의 <중국총론>이라는 책에서는 여러번 서계여를 언급한다. 이 책은 동시대 미국인 및 나중의 미국사학자들의 관심과 추가적인 연구를 불러왔다 저명한 중국사학자 비정청은 중국사를 연구할 때, 서계여의 생애를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경력"이라고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