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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장훈복벽: 한편의 정치코메디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김만루(金滿樓) 

 

 

 

장훈복벽은 한바탕 소동이며, 동시에 한편이 코메디이다. 당시의 인물인 천참생(天懺生)은 <복벽의 흑막>이라는 글에서 그 안에 여러가지 코미디같은 추문들을 기록해 두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복벽이 계절에, 가장 고귀한 것은 바로 머리 뒤에 달린 변발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장훈은 자신이 변발을 남겼을 뿐아니라, 그의 부대도 모두 변발을 남겼다. "변자군(辮子軍)"은 명실상무했다. 장훈이 청나라황제를 만날 때, 태보(太保) 세속(世續)이 변발은 시대와 맞지 않으니, 변발을 자르라고 권유한다. 장훈은 그 말을 들은 후 크게 화를 낸다. 그리고 청황제의 앞에서 변발을 변호한다: "내 수하의 병사들은 모두 변발을 하고 있다. 이들 병사들이 변발을 한 것은 군사적으로 관계가 중대하다. 바로 나의 병사들이 모두 변발을 남겼기 때문에, 간사한 무리들이 섞여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지금 이들 난당간도들은 모두 변발을 잘라버리지 않았는가?"

 

복벽 당일 오후, 수하가 길거리 도쳐에 변발을 한 사람들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후, 장훈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무릎을 치고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대소한다: "인심은 역시 옛주인을 잊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오늘 그 말이 입증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디서 이렇게 많은 변발이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민심의 향방이다."

 

이들 복벽원로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변발은 완벽하게 보존되어있었다. 유독 강유위는 변발이 짧았다. 늘여뜨려야 겨우 6,7촌에 불과했다. 부들(蒲草)같았다. 누군가 그에게 복벽파같지 않다고 말하자, 강유위는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무술년이후 해외에 망명했다. 부득이 머리를 자르고 옷을 갈아입었다. 신해혁명후, 비로소 조국에 돌아왔고, 다시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했따. 지금으로부터 5년여밖에 되지 않앗따. 그래서 이 정도 길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신해년 이후에 다른 사람은 모두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왜 당신은 거꾸로 머리카락을 길렀느냐고. 그러자 강유위는 득의만면하여 말한다: "나는 일찌감치 오늘같은 날이 올 것을 알았다!"

 

강유위는 변발이 짧을 뿐아니라, 수염도 변장하여 북경으로 들어올 때, 다른 사람의 이목을 속이기 위하여 잘라버렸다. 복벽이 성공한 후, 강유위는 수규(首揆,수석내각대학사)의 자리를 얻기 희망했다. 장훈이 선통제에게 보고했는데, 근태비(瑾太妃)가 반대했다: 청왕조에 수염이 없는 재상은 없었다는 것이다. 강유위는 그 말을 들은 후, 아주 괴로워하며, 급히 약방으로 가서 수염이 나는 약을 사서, 한시간에 2,3번씩 바르고,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다. 농부가 벼의 싹을 바라보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반달동안 내각총리를 막 지낸 이경희(李經羲)는 복벽소식을 들은 후, 급히 장훈을 찾아간다. 왜 자신에게는 통지하지 않았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자기에게 왜 직위를 배정해주지 않았는지도 따진다. 장훈이 웃으며 말한다: "노구(老九, 이경희)는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오. 자격으로 따지면 당연히 재상이나 상서를 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의 앞날은 변발이 없기 때문에 끝난 것이다. 내 생각에 확실히 (변발을 자르는 것은) 그럴만한 가치가 없었다."

 

이경희는 화를 내며 말한다: "정말 그런가? 그 이성탁(李盛鐸, 1905년 오대신으로 출양헌정고찰한 구성원중 한 명)은 변발이 있는가? 그는 어찌해서 농상부상서가 되었는가?" 장훈이 말한다: "그는 비록 머리를 잘랐지만, 복벽에 공로가 있다. 다시 청황실의 대신이 되고 싶으면, 빨리 돌아가서 머리카락을 길러라. 그때가 되면 내가 당신의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 이경희는 냉소하며 말한다: "내 머리카락이 자라더라도, 재상,상서 자리는 내 차례로 돌아오지 않을 것같다". 말을 마치고 이경희는 북경을 떠난다.

 

이경희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이전에 장훈이 북경으로 올 때, 천잔으로 가서 특별히 그를 끌어들여서 같이 북경으로 간 적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나서 이경희는 장훈이 큰 상자를 휴대하고 있는데 잘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본다. 안에 무슨 중요한 물건이 있는 것같았다. 이경희는 기이하게 여거서, 장훈에게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물어본다. 장훈은 일부러 신비스럽게 굴며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경희는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여 계속 묻는다. 장훈은 그제서야 신비스럽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안에 든 것은 "신발, 모자, 포괘, 영정이다"(즉, 청왕조의 관복). 이경희는 그걸 왜 가지고 가느냐고 묻는다. 장훈이 말히기를 "나는 오랫동안 유주(幼主, 즉, 부의)를 만나뵙지 못했다. 이번에 북경에 가는길에 고궁에 들러서 인사를 하려고 한다. 너도 전조의 대신이니 함께 가서 배알하면 어떻겠느냐?" 이경희는 마음 속으로 그가 지금 민국의 내각총리인데 어찌 전조의 폐위황제를 만나겠는가. 그래서 관복을 휴대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빠지려고 한다. 장훈은 그러나 진지하게 말한다: "그건 상관없다. 내가 몇 벌을 준비했으니, 너한테 한 벌을 빌려주면 된다." 이경희는 그가 농담하는 것으로 여기고, 대충 대답하고 지나간다.

 

북경에 도착해서, 장훈은 정말 즉시 궁중으로 선통제를 만나러 간다. 가기 전에 이경희도 억지로 태웠다. 이경희는 불편해하며, 관복이 없다는 말로 완곡하게 거절한다. 장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머리에 쓴 관모를 벗어서 이경희의 머리에 억지로 씌워준다. 그리고 크게 웃으며 말하낟. "장관이대(張冠李戴). 뭐 안될 것이 있는가?" 결국 가는 길이 이경희는 핑계를 대어 도망친다. 이것이 아마도 장훈이 그에게 관직을 주지 않은 원인중 하나일 것이다.

 

장훈복벽후, 총통 여원홍에게 귀정(歸政)하라는 주절(奏折)을 작성했다. 그런데, 용어에서 여원홍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주저했다. 처음에는 '총통'이라고 칭하고자 했다.  그러나 타당하지 않아 보였다. 나중에 '해대신(該大臣)"으로 생각했는데 어쨌든 민국의 원수인데, '대신'으로 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며 머리를 짜내는데, 마지막에 강유위가 말한다. '해원(該員)"으로 칭하는게 가장 적절하여 좋겠다고. 사람들이 연유를 물으니, 강유위가 말한다. 중국은 원레 폐하 소유인데, 신해혁명으로 폐하가 일을 평정하려는 마음에서 천하대사를 원세개에게 위탁하여 관리했다. 원세개가 죽고나서 여원홍이 승계했다. 이 두 사람은 폐하의 "관리원"이다. 그러므로 "해원"으로 칭하는게 가장 좋다.

 

그후, 장훈은 양정분(梁鼎芬)을 대표로 총통부에 파견하여, 여원홍에게 대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양정분은 국궁례(鞠躬禮)를 해본 적이 없다. 억지로 하다보니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등을 굽혔고, 두 손을 땅까지 늘어뜨리고 머리는 배꼽까지 숙였으며, 엉덩이는 뽀족하게 솟았다. 예를 마친 후 얼굴과 목이 모두 시뻘개지고, 호흡은 가빠했다. 차라리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만 못했다. 복벽이 실패한 후, 양정분은 다시 여원홍을 찾아간다. 이때는 대총통으로 부르며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예를 올린다. 여원홍이 냉소하며 물었다: "각하는 어찌하여 전거이후공(前倨而後恭)하는가?" 양정분은 부끄러워하며 말한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장훈복벽후 스스로 명함을 인쇄하는데, 이 명함도 보통과 달랐다. 길이 약9촌, 너비 약 4촌으로 위에는 '전 양강총독겸남양통상대신, 전 강소도독, 전 장강순열사겸안휘독군, 현 직예총독겸 북양통상대신, 흠명어전의정대신, 진봉충용천왕 장훈"이라는 내용이었다. 관직이 5개나 병열로 열거되어 있어 보는 사람이 모두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러나, 장훈은 득의만면했다. 청왕조에서 자신보다 잘나가는 사람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장훈이 '충용친왕"에 봉해진 후, 그의 부하들은 기뻐날뛰고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오로지 부하 모비서는 돌연 장훈에게 사직을 청한다. 장훈이 놀라서,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 비서는 말한다. 대수(大帥)는 이미 친왕이 되었으니, 선통제에게 이제 노재(奴才)라고 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다시 대수에게 노재라 칭해야 합니다. 저는 비록 한미하나 노재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더더구나 노재의 노재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장훈이 대노한다. "너는 아직 노재라고 칭할 복도 없는 놈이다. 갈려면 가라." 말을 마치고 그를 바로 내쫓는다.

 

장훈의 부인 조씨는 복벽에 반대했다. 아쉽게도 그녀는 여인이었다. 장훈은 그녀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복벽에 성공한 후, 장훈은 득의양양하게 조씨에게 자신이 이미 '충용친왕'에 봉해졌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조씨는 그에게 욕을 하며 말한다: "민국이 너에게 박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너는 오늘 천하의 금기를 어기고, 도천대죄를 지었다. 너는 자신을 생각지도 않고, 후손은 생각지도 않는단 말이냐. 네가 오늘 충용친왕에 봉해짔지만 내일이면 평견왕(平肩王)이 될 것이다." 장훈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아 묻는다: "평견왕이 무슨 뜻이냐?" 조씨가 말한다: "너는 장래 목을 지키지 못할테니, 너의 목을 칼로 베면 너의 목은 두 어깨와 나란히 되지 않겠느냐?" 장훈이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문을 발로 차서 나가버린다.

 

장훈에게 두 조카가 있었다. 한 명은 필정(弼廷)이고, 다른 한 명은 민재(敏齋)였다. 그들은 복벽에 반대했다. 일찌기 장훈에게 이렇게 권유한다: "우리 숙부께서 천하의 중임을 지고 있으니, 절대 천하의 대 금기를 범하지 마십시오. 지금 만일 당신의 곁에서 분주히 다니며 계책을 바치는 자들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입니다. 어찌 거기에 들어가시려 합니까?" 장훈은 그 말을 듣고 책상을 치며 대노한다. "너희 어린아이가 뭘 안단 말인가?" 기실 장훈 자신은 뭘 알았겠는가? 아마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단기서가 마창에서 군대를 모아서 맹세를 한 후, 동로토역군이 뒤이어 풍대로 들어온다. 변자군과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따. 이번 전투에서, 한가지 기록할 만한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원항고학교의 토역항공대가 처음으로 출전한 것이다. 변자군이 진지와 황궁에 폭탄을 투하한다. 그것은 중국 최초의 공군작전이라 할 수 있고, 자금성을 폭격했다.

 

기록에 따르면, 자금성에는 모두 3발의 폭탄이 떨어진다. 비록 모두 1척길이의 작은 폭탄이었지만, 궁중이 어린 황제 부의, 태비와 대신, 태감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폭탄이 떨어진 후 이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속속 침상 아래로 숨어들었다. 마치 잠을 자는 그 곳이 가장 안전한 것처럼. 이것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3발의 폭탄이다. 1발은 융종문 밖에 떨어져서 가마꾼을 한 명 다치게 만든다; 또 다른 한 발은 어화원의 못가에 떨어져, 연못의 한쪽을 부순다; 그리고 또 한 발은 서장가 융복문이 처마에 떨어진다. 비록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모여서 도박을 하던 몇몇 태감은 놀라서 반죽음이 된다.

 

육군부 상서 뇌진춘(雷震春)은 가장 먼저 복벽에 참가했다. 장훈이 그를 육군부 상서의 자리를 맡긴 것은 그의 이름을 잘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춘뢰곤곤(春雷滾滾), 진이욕농(震耳欲聾)". 이 소참 출신의 진위장군은 일찌기 강북제독, 제7진통제를 지낸 바 있고, 원세개시대에 복벽동지이다. 이번에 육군부 상서로 봉해지면서 뇌진춘은 참신한 새 조복(朝服)을 입었다. 차량을 타고 궁중으로 가서 감사인사를 하였다. 궁문에 도착한 후, 차가 아직 멈추지 않았는데, 뇌진춘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다가 4,5척 멀리 떨어져서, 이마가 무딪쳐 피가 났다. 호병은 급히 앞으로 가서 부축했다. "대인, 아픕니까." 뇌진춘이 대답한다: "마음이 기쁘니 아픈 걸 못느끼겠다."

 

감사인사를 한 후에 뇌진춘은 자금성에서 말을 탈 수 있도록 상을 받는다. 생각지도 못학 부임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토역군이 북경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뇌진춘은 일꾼으로 변장해서, 인력거를 끌고 급히 정양문을 빠져나간다. 동차역에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변장기술이 부족하여 금방 다른 사람이 알아본다. 그리하여 체포된다. 나중에 누군가 신문에 만화를 그렸다. 그리고 대련을 붙인다: "부재자금성기마(不在紫金城騎馬), 각래정양문랍거(却來正陽門拉車)".

 

직예성장(直隸省長) 주가보(朱家寶)는 적극적으로 복벽에 호응한 지방관리중 하나이다. 그는 원래 광서연간의 진사이다. 서예에 뛰어났다. 신해혁명때, 이 안휘순무는 형세에 어쩔 수 없이 '반정(反正)'한다. 누가 알았으랴, 혁명당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 결과 스스로 안휘독군에 봉했던 그느 ㄴ할 수 없이 밤을 틈타 성에서 도망가야 했다. 이번에, 그는 자신이 민정부 상서에 봉해졌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주 격동한다. 전체 성에 용기를 매달도록 명령했을 뿐아니라, 자신도 대당에 향안을 놓고 궁궐을 향해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삼배구고의 예를 행했다.

 

주가보는 예를 마친 후, 오랫동안 삼궤구로를 행하지 않아서인지 일어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역시 곁에 있던 병사들이 부축해서 일으켜야 했다. 집에 돌아온 후, 주가보는 알현때 예의에 어긋나지 않기 위하여, 매일 저녁 삼궤구고를 연습하여, 무릎과 다리에 힘이 빠질 때까지 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삼일도 되지 않아서 단기서의 토역군이 독군아문으로 쳐들어온다. 천진도 다시 오색기를 내건다. 이제 끝났다. 주가보는 상서가 되지 못했을 뿐아니라, 직예성장의 자리도 잃게 된다. 그래서 욕을 해대었다: "공화가 나를 망치더니, 복벽도 나를 망치는구나."

 

변자군은 토역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장훈이 할 수 없이 청황실에 직예총독 및 의정대신의 직을 사직할 것을 청한다. 청황실은 장훈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다. 장훈은 군대를 이끌고 서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청황실에 황금만냥을 하사해줄 것을 청한다. 선통제가 말한다: "황금 만냥이면 40여만위안인데, 나는 즉위한지 7일밖에 되지 않았다. 너에게 40만위안을 준다면 5만위안에 하루씩 황제를 하도록 산 꼴이 되지 않는가?" 장훈은 그 말을 듣과 아주 불쾌해 한다. 그래서 말한다: "폐하는 신해때 물러난 후, 6년이래, 노신이 선후로 바친 것만 50만위안이 넘습니다. 제가 오늘 황금만냥을 청하는 것은 과분한 것입니까?" 근태비가 말한다: "지금 복벽의 세가 곧 소멸되니, 민국이 매년 우대해주던 400만 세비도 모두 너의 손에 끊어지게 생겼다. 우리는 이제 누구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 하는가?" 장훈은 그 말을 듣고는 아무 말없이 물러갔다.

 

토역군이 곧 경성으로 진입하려 할 때, 장훈이 임명한 그 관리들은 모조리 경궁지조(驚弓之鳥)였다. 사방으로 도망쳐서 흩어졌다. 오직 법부상서 노내선(勞乃宣)만이 죽어도 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권하자, 노내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청때, 불과 제학사사였다. 지금 성은을 두터히 입어 전국사법기관을 장악하도록 승진했다. 비록 부임한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각성의 민형사소송사건에 관하여, 한건도 처리한 바가 없어 시위소찬(屍位素餐)이었다. 그런데 만일 다시 자리까지 지키지 않고 도망친다면, 더욱 황상을 뵐 면목이 없다. 지금의 생각은 오로지 한 가지이다. 살아도 법부의 관리이고 죽어도 법부의 귀신이다. 나는 현재 대당에 거대한 밧줄을 걸어놓고 있다. 만일 반군이 입성하면, 나는 여기서 목을 매어 자결하여 황상에게 충성을 다하겠다." 다만, 노내선의 생졸연도를 조사해보면, 노내선이 죽은 것은 1921년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당시 자결하려 할 때 다른 사람이 구해준 모양이다.

 

이 노내선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극히 완고한 노한림이다. 민국성립후에 청도에 은거하는데, 죽어도 민국의 관직을 맡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이번에는 장훈의 발탁으로 법부상서라는 대관을 지냈다. 다만 이 자는 전통공명출신이다. 현대법률에 대하여 하나도 몰랐다. 다른 사람이 그가 법률이 뭔지를 모른다고 조소할 것을 우려하여 노내선은 유리창에서 <대청율례>를 한권 사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읽었다. 친구는 그가 그 나이에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고 그를 말리면서 말한다: 그대는 급하니 부처의 발을 붙잡는 꼴이다.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기억하지 못한다. 하물며 신정이후, 구율례는 이미 적용되지 않는다. 당신은 신법률을 더 많이 봐라. 그게 해결방법이다." 노내선은 그 말을 듣고 아주 불쾌하게 생각한다: "대청제국은 당연히 대청율례를 사용해야 한다. 무슨 신법률이냐. 나는 안보겠다!" 이 자의 완고함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갈 것이다.

 

동시에 법부좌시랑에 임명된 강용(江庸)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지지명(自知之明)이 있었다. 그는 임명장을 받은 후, 무슨 일인지 깜짝 놀란다. 나중에 장훈에게 서신을 보내어 놀리듯이 말한다: "나는 복벽의 자본도 없고, 공등과 밀모한 바도 없다. 돌연 이런 직위를 얻으니, 실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이전에 사법차장을 역임한 적이 있어서 그런 것같고, 민국의 신법률에 대하여 약간의 지식과 경험이 있는 연고인 것같다. 다만 나는 제국의 법률에 대하여는 전혀 알지 못한다. 공등이 나에게 이 직위를 굳이 맡으라고 한다면, 나는 제국의 법률대학교에 먼저 들어가서, 배운 다음 졸업증서를 받고나서 다시 일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만일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겠다면 그것도 좋다." 강용은 복벽파가 아니다. 그를 법부좌시랑에 임명하다니, 황당하지 않은가?

 

복벽실패후, 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유로들 대부분은 사전에 도망친다. 단지 몇몇 재수없는 자들만이 토역군에 체포된다. 가장 먼저 도망친 것은 강유위이다. 그는 무술변법 실패후에 이리저리 숨어다닌 바 있어 도망치는데는 이골이 났다. 그리하여 이번에 그는 나이든 농민으로 변장하여 멀리 도망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강유위는 처음에 도망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법원사로 가서 머리를 깍고 출가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고향사람인 양정분에게 발각되어 욕을 얻어먹는다: "너는 아침에도 머리를 깍지 않고, 저녁에도 머리를 깍지 않더니, 하필 이런 새벽에 머리를 깍는단 말인가? 이것은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냐." 강유위가 말한다. "헛소리. 너는 내가 도망치는 것을 보았는가?" 양정분이 크게 웃으며 말한다. "무술정변에 네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까지 살아있을 수 있겠는가? 네가 이번에 온 것은 복벽대신이 되고 싶어서일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이 두려우면 오지를 말라. 성공하면 공신이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목숨을 잃는 것이다. 너같은 성인이 있을 수 있는가? 오늘부터 나는 네가 광동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

 

복벽기간동안, 강유위와 장훈의 이 '문무양성인'은 적지 않은 웃음거리를 만들어 냈다. 토역전이 개시된 후, 풍국장과 단기서는 모두 10만위안을 장훈의 목에 현상금으로 걸었다. 강유위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한다. 무술년 서태후가 10만냥 은자로 그의 수급을 사려 했는데, 보기에 자신과 장훈의 가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단지 지명수배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없었는데, 아마도 그의 제자들이 중간에서 작용을 한 결과일 것이다.

 

장훈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한다. "너는 당시에 겨우 10만냥 은자이지만, 나는 이번에 두 십만위안이다. 기껏해야 나의 절반 몸값이다. 다시 말해서 이번 지명수배명단에 너는 이름도 없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너의 수급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강유위를 놀린 후, 장훈은 다시 득의하여 말한다. "풍가와 단가는 모두 10만위안으로 나의 머리를 사겠다고 하는데, 하나같이 내 몸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구나. 내가 만일 변신할 수 있다면 두 명의 장훈으로 변신하고 싶다."

 

한번은 장훈과 강유위가 다시 한번 허풍을 떨었다. 장훈이 말한다: "노부의 이름은 장훈(張勛)이다. 오늘 과연 불세의 공훈을 세웠다." 강유위가 웃으며 말한다. "내 이름은 유위(有爲)이다. 오늘 나는 큰 일을 했다. 나의 이름은 나 자신 뿐아니라 국가에도 특별한 관계가 있다. <중용>을 보면, "부유사해(富有四海), 귀위천자(貴爲天子)"라는 말이 있는데, 나의 이름이 '유'와 '위' 두 글자로 들어가 있다." 장훈이 그 말을 들은 후 한 참을 생각하더니 무릎을 치며 욕했다: "네가 유,위라는 두 들자로 이름을 지은 것은 설마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이냐?" 강유위는 그 말을 듣고는 급히 말했다. "어찌 감히, 어찌 감히. 그건 내가 정말 감히 할 수 없다."

 

또 한번은 강유위가 자신이 필덕원 부원장밖에 얻지 못했으므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원망하는 말을 내뱉는다. 장훈을 욕하며 이렇게 말한다: "허직을 나에게 줄 거라면, 왜 하필 전보를 쳐서 나에게 입경하라고 했단 말인가?" 장훈이 그 말을 들은 후 노하여 말한다: "너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서 현재 필덕원의 자리를 얻었는데, 지금도 욕심이 채워지지 않았다니 정말로 썩은 유학자와는 같이 도모할 수가 없다." 말을 마치고, 장훈은 원망하며 말했다: "그가 만일 다시 배후에서 나를 비방한다면, 나는 야만적인 수단으로 그를 대하겠다." 강유위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웃으며 말한다: "다른 사람은 그를 두려워해도, 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곁에 있는 사람이 왜 그런지 물었다. 강유위가 말한다. "그의 곁에는 작은 총이 있지만, 나의 곁에는 큰 붓이 있다. 비교해서 누가 더 대단한지 봐라."

 

장훈복벽이 실패하자, 여론은 일방적으로 그것이 도행역시(倒行逆施)라고 평했다. 오직 복벽동지 1명만이 장훈에게 공정한 말을 해주었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원래 홍헌제제의 지지자였던 완충추(阮忠樞)이다. 원래 원세개의 부하였던 그는 그와는 다른 의견들만 있는데도, 장훈의 이번 거동은 비록 엉성하기는 했지만, 시원시원한 사나이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장훈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한다: "나는 반평생을 지내면서 이렇게 의리를 지키는 친구를 얻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

 

장훈의 성격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전통적이고 실질적이고 약간 돈후하며, 아주 조급하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이 한 무인의 몸에 결합되니 그것은 완고함 그 자체이다. 생각해보라 신해혁명때, 청왕조는 이미 남은 날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한데, 얼마나 많은 병력을 거느린 장군들이 하룻밤만에 등을 돌렸는가? 유독 장훈은 여전히 죽어도 패배를 인정치 않고,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 그 결과 강절연합군이 남경을 공격한 것이 전체 신해혁명중 가장 참열한 전투이다. 민군은 혈전 10일만에 비로소 남경을 광복시킬 수 있었다.

 

장훈의 고향관념은 아주 강했다. 그는 고향사람들을 많이 돌보았다. 예를 들어, 고향 강서 봉신 적전촌의 사람들은 적지 않게 도움을 받는다. 장훈은 집집마다 기와집을 지어주었다. 뭐든지 모자라면 보내주었다. 강서인은 외지에서 장사를 할 때 회관을 건립해야 하는데, 장훈을 찾아가기만 하면, 그는 주머니를 열어 돈을 내주었다. 예를 들어, 민국시대 북경의 강서회관은 모두 장훈이 돈을 낸 것이다. 선무문밖의 강서회관은 당시 북경에서 가장 호화로운 서양식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멋있는 양루화원(洋樓花園)이 있을 뿐아니라, 가장 유행하던 희대(戱臺)도 있었다. 또한 발전기로 전등까지 제공했다. 밤에도 극을 볼 수 있었다. 북경에서 공부하는 강서자제는 특히 봉신현의 학생은 장훈에게 부탁만 하면 들어주었따. 적지 않은 장학금을 주었다.

 

장훈이 여러해동안 빠진 취미는 경극이다. 그리고 그는 광팬급이다. 토역전에서 장훈은 단기서가 단지귀(段芝貴), 조곤(曹錕)을 동,서로사령관으로 토벌하러 올 때, 그는 뇌진춘등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놀랄 것없다. 내가 보기에, 이 양로병은 곧 소탕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유를 물었더니 장훈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동로사령관 단지귀의 단(段)은 단(斷)이다. 우리 병사들이 그와 싸울 때, 칼 하나로 그를 둘로 잘라버릴 수 있을 것이다. 서로사령관 조곤은 더더욱 우려할 것이 없다. 그 <삼국연의>에 분명히 얘기하지 않았던가. 조가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장익덕이다. 장판판에서 큰소리 한번에 조가군 백만이 겁을 먹고 물러나지 않았는가? 내가 조곤의 병사들이 노구교에 올 때 단기필마로 나가서 한번 소리치면 그는 나 노장(老張)의 무서움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장훈은 득의하여 손발을 움직인다. 기실 이 말은 모두 경극 <장판파>에 나오는 말이다. 장훈은 항상 자신을 제2의 장비라고 여겼다.

 

1922년, 복벽실패후 이미 5년이 지난뒤 장훈은 집에서 70회 생일잔치를 연다. 일부 경극의 명배우들 예를 들어, 양소루(楊小樓), 매란방(梅蘭芳), 여숙암(余叔巖)등이 80여세된 노선배 손국선(孫菊仙)을 따라 천진의 장가화원에서 장훈의 생일을 축하했다. 이것은 당시 이원(梨園)의 공전절후의 성대한 모임이었다. 장훈의 앞에서, 이들 유명배우들은 당연히 모두 있는 힘을 다했다. 얻은 보수도 풍성했다. 특히 손국선은 장훈이 그의 오래된 팬이다. 이번에 준 보수는 600대양에 이르렀다. 손국선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다: '경극을 아는 사람은 장대수이다. 지음은 장대수이다." 장훈이 죽은 후, 손국선은 곡을 하다 땅바닥에 쓰러지기까지 한다. "황종대려(黃鐘大呂), 공자절향(恐自絶響)!"

 

각중제자금하재(閣中帝子今何在), 난외장강공제류(欄外長江空際流).

 

원세개의 복벽은 실패했고, 장훈의 복벽도 실패했다. 이것은 민국이후, 가짜황제도 하질 못하고, 진짜황제도 하질 못했다. 이는 양계초의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입증한다. 황제위는 담장위의 흙인형과 같다. 돼지우리 속에 집어던져지면 깨끗이 씻겨져서 다시 바치더라도, 이미 그 신성성은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