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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이연영(李蓮英)의 죽음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일명(佚名) - 중신망

 

북경TV가 얼마전에 대담프로그램을 방송한 바 있다. 초청받은 게스트는 예전에 이연영의 묘를 발굴할 때 참여한 바 있는 교사라고 하였다. 그 교사에 따르면, 이연영의 묘에는 머리만 있고 몸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연영이 비명에 죽었다고 본다고 했다. 10월 24일, 북경TV <당안>에도 이연영의 죽음을 다루는 전문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객관적인 사실을 중시하고 역사를 존중하여온 <당안>이 이연연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가지 판본을 묘사하여, 관중들에게 이연영의 죽음에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처럼, 최소한 정상적인 사망은 아닌 것같다고 느끼게 하였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묘에 어찌 머리만 있고 몸은 없을 수 있는가? 그의 가족은 그가 이질로 죽었다고 하는데, 죽은 때가 바로 음력 이월이어서 추운 날인데, 이질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묘지에는 그의 죽음에 대하여 "운(殞)"이라고 하였는데 마치 무슨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것같다....

 

필자는 옛날에 일부 인사를 인터뷰 한 바있고, 약간의 자료를 자기고 있다. 기실 청나라말기의 대태감 이연영의 죽음에 무슨 '수수께끼'는 없다.

 

1991년 설날이 지난 후, 장원(姜文)이 주연한 영화 <이연영>이 방영되고 있었다. 필자는 당시 북경 서성구위 선전간사로 일하고 있던 루라이순(魯來順)과 함께 이연영의 두 명의 양손자를 취재한 바 있다. 이상호(李祥浩)와 이상중(李祥仲). 두 노인은 당시 나이가 칠순이 넘었다. 이연영이 죽은 후에 출생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부친대의 사람들에게 들은 것이다. 두 노인에 따르면, 그들의 조부인 이연영은 선종(善終)했고, "연후리(煙後痢)"로 죽었다는 것이다.

 

이 사인을 후손들이 거짓말할 필욘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비정상사망인데, 다른 사인으로 진상을 감추려는 것이라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주 많은데, 굳이 "연후리"라고 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당안>프로그램에서 제기한 의문은 정월에 이질에 걸릴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성립되기 힘들다. 이질은 엄격히 말해서 병이 원인이 세균감염일 수도 있고. 병원충성감염일 수도 있다. 감염만 되면, 어떤 계절이든 발병하는 것이다. 소위 "연후리"라는 것은 아편을 많이 피워서 조성된 축적성 중독으로 면역력이 떨어져서 발병하는 것이고, 치료하는 약이 없다.

 

이연영의 사인에 대하여는 두 가지 방증도 있다. 하나는 <청조야사대관>의 한 글로 이연영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가 병으로 죽었고, 장례식은 마치 공신과 같았다. 죄는 안덕해보다 큰데, 결과는 크게 달랐다." 이 말의 뜻은 아주 명백하다 이연영은 병사한 것이고 죄행이 안덕해보다 크지만 선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후에 장례식도 아주 융중하여 공신과 같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증은 <궁녀담왕록>이다. 책에서 궁녀는 이렇게 말한다. 선통3년 청명절 전에, 그(이연영)의 상첩자(喪帖子)를 받는다. 그해 정월 연음천(連陰天)에 이질로 죽었다는 것이다. 정월 이십구일 병을 얻어, 야간에 배를 쥐어짜듯이 아팠고, 다음날, 농혈이 발견되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하다가 이월 초사일에 죽었다.

 

만일, 이연영이 비명에 죽었다면, 당시에 분명 중요한 뉴스였을 것이고, 이씨집안이 아무리 감추고자 해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당안>프로그램에서 열거한 "증인"중 "학자"라는 안의민(顔儀民)이 있다. 그는 '이연영이 비명에 죽었다'는 증인의 하나이다. 다만 필자는 안의민의 말은 믿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옛날에 필자가 여러번 안의민을 취재한 바 있어 그를 잘 안다. 그는 만주족이며, 성은 예허나라씨이다. 청나라말기 경자년에 산서순무를 지닌 육현(毓賢)이 안의민의 백부이다. 이시기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면 모두 알 것이다. 이 육현 대인은 의화단을 지지하여 서양인을 죽였다.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 그를 '죄수(罪首)'로 지목한다. 서태후는 서양인의 압박에 그를 처결한다. 안의민의 부친인 육태(毓泰)는 일찌기 구문제독 강조종(江朝宗)의 부하로 재직한 바 있다. 그 본인도 강조종이 아들 강보창(江寶倉)과 관계가 좋았다. 그는 강보창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연영이 죽기 전에, 강조종의 초청으로 십찰해(什刹海)이 가에 있는 회현당(會賢堂)으로 가서 연회에 참석한다. 연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도중에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했다고 했다.

 

만일, 이연영의 묘에 유수무신(有首無身, 머리만 있고 몸통이 없다)이라면, 안의민의 이 말은 더욱 믿기 어렵다. 왜 그런가? 이연영이 원수에게 살해당했다면, 당연히 유신무두(有身無頭)여야 마땅하다. 어찌 머리를 남겨두고 몸통만 가져간단 말인가? 이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만보를 양보하더라도 이연영이 죽었을 때 확실히 머리만 있고 몸통이 없었다면, 그의 가족은 그의 머리만 묻을 리가 없다. 반드시 그에게 몸통을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금으로 만들든, 은으로 만들든, 아니면 동으로 만들든, 아무리 못해도 도기로 구워서라도 만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중국봉건윤리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사후에 내생에 태어날 수가 없다. 후세인들은 '불효'라는 죄명을 쓰게 될 것이다.

 

안의민을 취재할 때, 안의민은 나이가 8순에 가까웠다. 즉 그는 민국초기에 태어났단 말이다. 그와 강보창은 관계가 좋은데, 이는 두 사람의 나이가 비슷하다는 말이다. 차이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강보창이 그보다 10살이 많다고 해도, 이연영이 죽었을 때 기껏해야 어린아이이다. 이런 일은 어른들에게 들어서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의민의 이 말은 믿기에 부족하다.

 

안의민은 <유령표묘록>이라는 책을 쓴 바 있고, 한권을 나에게 선물했다. 그 안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하루는 광서제가 경산에 산책을 하는데, 돌연 북장가에서 북과 음악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물어보니, 이연영이 셋째 첩을 들이는 것이라고 했고, 어린 태감이 나가서 물어보니, 조정의 문무대신이 모두 이연영에게 축하선물을 보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연영의 두 양손자를 만난 후 안의민 선생을 찾아갔다: 이연영이 첩을 들였다는 것은 어디서 들었는가? 안의민이 대답했다: 민국시대의 어느 신문에 실렸었다!

 

그리고, 안의민은 이 책에서 서태후와 이연영을 마구 욕했다. 그렇지만 이연영이 연회에 참석했다가 원수에게 피살된 내용은 없다.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안의민은 왜 그의 대작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 설마 나중에 이연영의 묘에서 유수무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돌연 생각이 났다는 말인가?

 

조광지가 구술한 <이연영묘발굴의 경과>를 보면, 묘를 판 후, 학교혁명위원회 주임은 "즉시 시문물국에 전화를 걸어 그들에게 사람을 파견해달라고 한다. 얼마 지나서, 문물국에서 두 사람이 온다. 우리는 정리공작을 시작했다.' 이렇게 말하면 이연영의 묘를 정리한 사람중 시문물국의 두 사람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묘의 상황에 대하여 누가 가장 큰 발언권을 지니고 있을까? 당연히 문물국의 사람이다. 그러나 <당안>프로그램에 문물국 전문가의 견해는 나오지 않았다.

 

당시, 필자는 이연영의 묘에 들억나 문물국 전문가 소천균(蘇天鈞)을 취재한 바 있다. 소천균은 이렇게 말했다. 그그 바로 당시 이연영이 묘에 들어간 두 사람중 한 명이다. 다른 한 명은 이씨인데, 사진을 책임졌다.

 

소천균은 당시에 먼저 묘혈의 석문을 열었고, 그 다음에 묘혈의 순장품을 정리한다. 그는 말했다. 이연영의 관곽(棺槨)은 관상(棺床) 위에 놓여 있지 않았다. 이미 깨져서 관상 아래의 진흙더미위에 있었다. 관곽이 부서진 원인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묘혈에 물이 들어와서 관곽이 이동하고 물이 빠진 후에 관곽이 노후하여 깨져서 흩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도굴자가 보물을 얻으면서 관목을 훼손한 것이다. 소천균은 말한다. 묘혈의 윗부분에 구멍이 있었으므로 도굴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소천균은 묘가 도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첫째는 묘안에서 대형 부장품이 발견되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이연영의 머리가 관의 바깥에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연영의 시체는 이미 썩었고, 몸통과 하반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몸통과 하반신의 골격이 불완전했다고 한다. 아마도 도굴자들이 시신을 옮기다가 조성된 것일 것이다.

 

소천균이 제공한 상황에 따르면, 소위 "무수유신" 혹은 "신수이처(身首異處)"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당안>프로그램에서 제기한 의문의 하나는 이연영이 묘지에 이연영의 사망에 대하여 "운(殞)"자를 썼다는 것이다. 왜 "몰(歿)"자를 쓰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기실, "운"과 "몰"은 같은 뜻이다. 모두 죽었다는 의미이다. <사기.굴원가생열전>에는 "백락기몰혜(伯樂旣歿兮), 기장언정혜(驥將焉程兮)?" <삼국지.촉지.선주비전>에는 "역년미효(歷年未效), 상공운몰(常恐殞沒)", <사기.한흥이래제후연표>에는 "운신망국(殞身亡國)"이라는 말이 있다. 즉, 동일한 사망을 일컫는 것이다. '운'을 쓰든, '몰'을 쓰든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연영은 역사인물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역사인물이다. 그래서 계속 추화의 대상이었다. 오락화가 범람하는 오늘, 그의 전기를 가지고 시간때우는 것은 뭐라고 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절대로 소설을 역사로 취급해서도 안되고, 학술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서도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