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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남창의거(南昌義擧)의 지도자는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고칙서(顧則徐) 

 

남창의거의 지도자는 누구인가? 이것은 원래 아주 간단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고(文告)가 있기 때문에 분명히 간단하다. 그러나 역사서술의 변화로 이 문제 자체가 이미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그래서 복잡한 문제로 변한다. 복잡하고 또 복잡해졌다. 간단하게 말하려고 하면, 오히려 복잡하고 복잡한 정보를 가진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심지어 황당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그래서 분명하게 말을 하려면 그저 역사서술변화의 경로를 따라가서, 순서대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사람들이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1. 법정준종(法定遵從)의 지도자그룹

 

소위 '법'이라는 것은 하나는 반포한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계약이다. 인류의 법은 이 두 가지이다. 반포한 명령은 권력, 복종에 속하고, 계약은 협상, 자원에 속한다. 계약이든 반포한 명령이든 모두 법이 정한 것이다. 법정에는 국가법의 법정도 있고, 비국가법의 법정도 있다. 양자에 들어맞으면 그것이 합법이다; 양자가 충돌하면 그것이 불법이다. 후자가 전자에 위배되면 위법이다. 위법을 법으로 삼는 것을 중국고대에는 반란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진승오광이 여러 죄수들과 약법하여 "대초흥, 진승왕"으로 한 것은 위법의 법으로 반란이다. 반란은 무력을 취하면 폭동이라고도 부른다. 의거라고도 부른다. 1927년 8월 1일 남창의 반란은 당시에 남창폭동이라고 불렀고, 남창의거라도 불렀다. 오늘날에는 남창기의(南昌起義)라고 부른다.

 

1927년 8월 1일 남창의거후 반포한 법은 지도기구와 지도자그룹에 대하여 내용이 이러했다:

 

(1) 최고지도기구는 혁명위원회로 정치, 군사를 통일적으로 영도한다. 혁명위원회는 하룡(賀龍), 경형이(經亨頤), 하향응(何香凝), 주휘일(朱暉日), 황기상(黃琪翔), 장서시(張曙時), 서특립(徐特立), 송경령(宋慶齡), 우우임(于右任), 곽말약(郭沫若), 진우인(陳友仁), 장발규(張發奎), 등연달(鄧演達), 담평산(譚平山), 운대영(惲代英), 임조함(林祖涵), 오옥장(吳玉章), 팽택민(彭澤民), 장국도(張國濤), 이입삼(李立三), 주은래(周恩來), 섭정(葉挺), 팽배(彭湃), 강호(江浩), 소조징(蘇兆徵). 혁명위원회지도기구에는 주석단이 있는데, 주석단의 구성원은 등연달, 송경령, 장발규, 담평산, 운대영, 하룡, 곽말약이다. 주석단의 주석은 담평산이다. 즉 담평산이 남창의거의 최고 정치,군사지도자였다.

 

(2) 혁명위원회의 각 산하업무분담기구의 지도자: 농공위원회, 주석 장국도; 선전위원회, 주석 운대영; 재정위원회, 주석 임조함; 당무위원회, 주석 장서시; 정치보위처, 처장 이입삼; 비서장 오옥장; 참모단, 총정치부, 주임 곽말약.

 

(3) 구체적으로 군대를 지휘하는 업무를 하는 참모단과 총정치부의 군사는 참모단이 구체적으로 지휘했다. 참모단위원은 유백승(劉伯承), 주은래, 하룡, 섭정, 채정개(蔡廷, 채정개가 병력을 이끌고 떠난 후에는 등연달로 바뀜).유백승이 참모단 참모장이었다. 정치부 최고지도자는 곽말약이었다. 주휘일에게는 직무가 주어지지 않았다.

 

(4) 작전부대 서열 및 장령: 모든 군대는 국민혁명군 제2방면군의 서열번호이다. 총지휘 장발규, 대리총지휘 하룡; 전적총지휘 황기상, 대리전적총지휘 섭정; 산하의 제20군, 군장 하룡; 제21군, 군장 섭장; 제9군 군장 위저(韋杵).

 

2. 법정실제의 지도자그룹

 

소위 법정실제의 지도자그룹은 즉 재직중인 법정준종의 지도자그룹이다. 예를 들어, 송경령은 남창의거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녀를 법정준종의 지도자중 한 명으로 열거했으므로, 그녀가 남창으로 왔다면, 자연히 법정실제의 지도자중 한 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재직하고 있지 않은 인원을 제거하면 바로 법정실제의 지도자명단이 된다.

 

혁명위원회 위원중에서 재직하지 않은 사람은: 경형이, 하향응, 주휘일, 황기상, 송경령, 우우임, 장발규, 등연달이다. 혁명위원회 업무분담기구의 지도자는 모두 재직했다. 군대는 장발규, 황기상, 위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재직했다(3인의 직무는 하룡, 섭정, 주덕(朱德)이 정식으로 맡았다). 재직하지 않은 주휘일의 군장직은 원래 섭정이 대체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남창의거의 법정의 실제지도자는 분명해졌다:

 

(1) 최고지도기구 혁명위원회 주석단의 주석 담평산. 주석단의 구성원 담평산, 운대영, 하룡, 곽말약. 혁명위원회 위원 하룡, 장서시, 서특립, 곽말약, 진우인, 담평산, 운대영, 임조함, 오옥장, 팽택민, 장국도, 이입삼, 주은래, 섭정, 팽매, 강호, 소소징.

 

(2) 총정치부 주임 곽말약 이외에 군사지도자는 하룡, 섭정, 유백승, 주은래, 주덕이다.채정개는 중도에 빠졌으므로 계산에 넣지 않는다.

 

3. 중공중앙과 남창의거 지도자

 

남창의거의 법정실제지도자의 명단이 분명해 진후, 남창의거 지도자가 도대체 누구인지는 더 이상 문제로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명단에서, 하룡, 곽말약은 원래 중공당원이 아니다. 남하후기에 중공에 가입했다. 시종 중공당원의 지도자가 아닌 사람은 장서시, 진우인 두 사람이다. 그러므로, 남창의거의 실제권력은 기본적으로 중공인원의 손에 장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모순이 발생한다; 한편으로, 남창의거 지도기구의 설치는 비중공조직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기본적으로 중공당원이므로, 그 지위와 언행은 자신의 당내신분의 영향과 제약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중공당원의 당내신분이 공개된 법정신문에 주는 영향정도를 지나치게 이해할 수 없다. 더더구나 당내신분이 공개법정신분을 대체할 수 없다. 그때는 중공의 당내중앙집권정도가 엄중하지 않아서,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한다는 원칙도 아직 확립되지 못했다. 과도상태라고 할 수 있다.

 

1927년 4월 27일 개최된 중공 "5대"에서 선출된 정치국위원은 진독수, 채화삼, 이입삼, 이유한, 구추백, 담평산, 장국도이고, 후보위원은 소조징, 장태뢰, 진연년, 주은래이다. 진독수, 장국도, 채화삼, 구추백으 정치국 상임위원이고 나중에 이유한이 추가되었다. 중공중앙기관이 무한에 설립되어 있었으므로, 중공중앙의 실제 최고지도자들은 이들 인원중 무한에 있던 사람들이다. 7월 15일, 왕정위의 분공(分共), 중공중앙 최고지도자인 진독수는 사직하고 은거했다. 정치국 상임위원인 장국도가 중공중앙 임시상위를 만들어 주재했다. 구체적으로는 장국도, 주은래, 이유한, 장태뢰, 이입삼이고 실제권력은 주로 장국도, 주은래 두 사람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이는 주은래가 최초로 중공2인자에 오른 것이다. 다만, 임시상위는 완전한 합법성을 지니지 못했다. 겨우 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만든 임시기구이다. "5대"정치국의 합법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비록 채화삼, 구추백이 임시상위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여전히 상응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실제로 이후 구추백은 금방 중공중앙의 사실상 최고지도자가 된다. 그리고 '87"회의에서 합법성을 확인받는다). 정치국위원으로서 담평산과 후보위원인 소조징, 진연년도 마찬가지로 이러했다.

 

7월 20일, 담평산, 이입삼 및 중공중앙 위원 운대영, 등중하(鄧中夏)와 섭정이 구강(九江)에서 폭동을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바로 구추백과 장국도, 주은래에게 통지한다. 장국도의 주재하에, 주은래가 서기를 맡고 있던 중공중앙전적위원회를 성립시키고, 주은래는 이어 섭영진(聶榮臻)을 서기로 하는 전적위원회 군사위원회를 조직한다. 섭영진은 먼저 남창으로 출발하여 업무를 진행한다. 얼마후, 주은래, 장국도도 선후로 남창에 간다(이입삼도 다시 남창에 간다). 무한의 중공중앙은 구추백, 이유한이 책임진다. 그래서, 남창의거 대오중에 중공중앙 임시상위구성원인 장국도, 주은래, 이입삼이 있는 것이다; 중공 '5대" 정치국위원중에 가평산, 후보위원중에 소조징이 있다; 중공 '5대" 중앙위원 운대영, 등중하, 팽배, 하룡이 있다.

 

중공의 각도에서 보자면, 섭영진이 구강, 남창에 도착하기 진에 지도자는 담평산, 운대영, 등중하(이입삼은 이 때 이미 무한으로 갔다)이다. 섭영진이 도착한 후, 섭영진이 중공중앙을 대표하는 지도자이다. 다만 섭영진의 당내지위는 너무 낮았다. 지도자의 책임을 담당하기에는 부족했다. 그의 말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지 못했다. 실제로는 담평산, 운대영, 등중하가 지도했다. 주은래, 이입삼, 장국도가 도착한 후, 중공의 각도에서 최고지도자는 장국도, 주은래, 이입삼, 담평산이고, 주은래가 중공중앙전적위원회서기로 구체적인 의거활동을 책임졌다. 장국도는 의거를 저지하는 책임을 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강렬한 반대에 부닥친다. 비록 의거에 동의하는 표시를 하기는 했지만, 당의 최고지도자로서의 위신을 잃어버린다. 이는 장국도 정치생애에서 내리막길을 걷는 것중 하나가 된다. 주은래는 남창의거에서 사실상의 당의 최고지도자가 된다.

 

4. 의거 최고지도자로서의 담평산

 

중공의 남창의거 최고지도자가 남창의거의 실제지도자는 아니다. 남창의거의 기술에서 가장 황당한 점이 바로 이 혁명은 중공이 영도했기 때문에 중공지도자가 의거지도자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중공지도자가 의거지도자라면, 남창의거의 법정준종의 지도자그룹은 왜 이렇게 달라지게 되었을까? 주은래는 왜 당시에 남창의거의 최고지도자라고 선포되지 않았을까? 알아야 할 것은, 당시에 당이 모든 것을 좌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법정명의의 당의 지도자가 법정명의의 당의 지도자를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던 시대였다.

 

남창의거는 비록 중공이 기획하고 주도하였지만, 당시 중공은 독립한 신분으로 나타나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국민당과 국민정부의 앞에서 의거의 합법성을 취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혁명위원회에서 선포한 것은 중곰명의가 아니라, 중국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국민당의 최고지도기구)의 명의로 선포했다. 섭정은 말했다: 8월 1일, "담평산은 중앙집행위원회 명의로 중앙집행위원회 및 각성당부 좌파분자연석회의를 소집하고, 특별위원회의 처리를 승인하고, 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당무 및 정무를 집행하고," 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소위 남창의거의 혁명위원회는 새로 성립된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일 뿐이다. 이 위원회는 여전히 중국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의 지도를 받는 것을 합법성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사실상 그 영도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은 바로 국민당의 각도에서 별도의 중앙을 만든 것이며, 별도의 중앙을 조종한 것이 중국공산당인원일 뿐이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재직하지 않은 송경령, 하향응, 우우임, 등연달등 국민당의 저명한 인물들을 혁명위원회에 넣은 것이다. 그래야 함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고, 무슨 이상한 일을 벌인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창의거에 참가한 재직한 지도자들의 사고가 극도로 혼란스럽지 않았겠는가.

 

비록 국민당과 국민정부를 합법성의 기초로 하였지만, 별도의 중앙을 설립했고, 실제로 남창의거는 중국공산당이 기획하고 주도한 것이다. 최고지도자를 국민당인이 맡는다면 중공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이때 중공의 요원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다 아는 국민당원이었다. 이 모순도 같이 해결되었다. 그들은 국민당신분으로 별도의 국민당과 국민정부중앙을 설립하면 되었다. 다만, 이렇게 하면 이들 중공요원이 중공내의 지위로 남창의거 지도자가 될 수 없었고, 반드시 국민당과 국민정부의 지위와 사회영향력을 가지고 선임해야 했다. 비록 장국도, 주은래, 이입삼의 중공당내지위는 이미 핵심지도자급이었지만, 가장 자격을 갖춘 사람은 담평산이었다. 그들은 모두 담평산과 경쟁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담평산은 1924년 1월 국민당 "1대" 즉 국민당 최고지도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이었다(중공당원으로는 이대쇠(李大釗, 이대조, 리다자오), 우수덕(于樹德)이 있다) . 영한(寧漢)분열이전에, 1927년 3월의 국민당 "2기3중"전회에서 담평산은 게속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을 맡았다(중공당원으로는 오옥장이 있다). 비록 남창의거 전날인 1927년 7월 담평산은 성명을 발표하여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의 직무를 사임했지만, 이것은 그의 국민당 및 국민정부내의 중공인웡에서의 최고지위와 호소력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지도자로서 별도의 중앙을 건립한 합법적인 이유였다. 비록 임조함, 오옥장도 근접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중공당내에서 그들의 지위는 담평산에 비견할 수 없었다(담평산은 1920년부터 중공광동지구의 지도자였고, "3대", "4대"에 모두 중공중앙최고지도층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이었으며, "5대"때도 정치국 위원이었다). 그들이 남창의거에 참가한 인원의 지지는 바로 담평산이 별도의 국민당과 국민정부중앙을 건립할 수 있는 일종의 합법적인 이유가 되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남창의거는 새로운 국민혁명이고 국민당과 국민정부의 또 다른 중앙을 세우는 혁명이었으며, 중공지도자층인물중, 누구도 담평산보다 합법적인 자격을 갖추지 못했었다. 그러므로, 비록 담평산이 이미 중공중앙 상임위원이 아니었지만, 중공중앙의 원로격인 지도자급인물중 하나이고 정치국 위원으로서 그는 남창의거에서 명의상 그리고 실제상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아무도 그와 경쟁할 수 없었다. 사실상 7월 20일 의거를 결정한 것은 바로 담평산이 소집하고 결정한 것이다. 비록 주은래, 장국도 및 이입삼이 도착한 후에도 기꺼이 담평산을 최고지도자로 받들지 않았겠지만, 다만 8월 1일 의거후에 지도자를 선포할 때, 주은래, 장국도, 이입상등은 담평산의 최고지도자로서의 지위에 대하여 도전할 수 없었다. 장국도는 말년에까지도 여전히 인정하고 있었다: "남창폭동 발생후, 담평산은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하룡은 그가 이끌어 준 것이다. 중공의 전적위원회는 거의 그가 영도했다. 전적위원회를 통하여 섭정등 중요한 군인을 지휘했다. 일체는 모두 바라는 대로 되었고, 그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냈다."

 

담평산이 남창의거의 최고지도자였을 뿐아니라, 주은래, 장국도, 이입삼은 그 아래급의 지도자도 되지 못했다. 최고영도기구인 혁명위원회 주석단 구성원은 운대영, 하룡, 곽말약이 담당했다. 혁명위원회 위원의 재임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지도자 자격을 갖춘 사람은 송경령, 우우임, 장발규, 등연달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임하지 않았으므로 주석단 구성원이 될 수 없었고, 그저 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릴 뿐이었다. 혁명위원회 위원으로 재임한 사람중에, 오옥장의 경력이 많았으나 나이가 너무 많았다. 임조함은 마찬가지 문제가 있고 일처리방식에서 사람들이 따르게 하기 힘들었다. 여기에 일정한 영향력은 있지만 어쨌든 흠결된 장서시, 진우인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사람들은 비록 중공당내 영향력은 비교적 크고 지위가 있었지만, 당시에 언론이 전국적 영향력을 지닌 운대영, 곽말약과 비교할 수 없었다. 전국의 무수한 사람들이 숭배하는 대상인 곽말약의 당시 사회영향력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 중공의 이들을 놓고 말하자면, 당시 운대영의 영향력은 가장 경력이 많은 장국도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고, 더더구나 이입삼, 주은래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하룡은 당시에 국내정치계에서 좋은 명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그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토비'중 하나였다). 다만 그는 남창의거 장령중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고, 유명했다. 군인으로 주석단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남창의거 최고자도자는 담평산이다. 그 다음은 운대영, 곽말약, 하룡이다. 주은래, 장국도, 이입삼은 끼지 못했다.

 

5. 군사지도자

 

혁명위원회는 정치, 군사의 최고권력을 지녔다. 구체적으로 군사권을 장악한 부문은 참모단이다. 소위 참모단은 혁명위원회가 군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참모기구이지, 중공군사참모기구가 아니었다. 만일 이 점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혼란만 올 뿐이다.

 

유백승은 참모단 참모장이다. 마치 군사최고지도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하룡, 섭정은 의거부대의 두 명의 주요한 지휘자이다. 당연히 참모단 구성원이다. 이렇게 하여, 유백승은 그들 두 명의 참모장인 것과 같다. 하룡, 섭정은 원래 자신의 참모인원이 있다. 유백승이 참모단 참모장으로서 주로 하룡, 섭정이 지휘하는 의거군의 전체행동을 참모하는 것이다. 주은래는 군사지휘권이 없었다. 다만 그는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의 신분으로 참모단에 가입한다. 더욱 중요한 원인은 주은래가 중공중앙의 군사방면을 책임지는 지도자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가 참모단에 가입한 것은 바로 중공중앙이 남창의거에서 군사실제지휘권을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렇게 하여 유백승은 더욱 주요하게는 담평산, 주은래의 참모장이었다. 구체적인 군사업무분담을 보면, 남창의거군사지휘관의 서열은 주은래, 하룡, 섭정, 유백승이다. 만일 정치부를 고려한다면 여기에 곽말약을 추가할 수 있다.

 

주덕은 비교적 특수한 인물이다. 그는 남창의거 장령들 중 경력이 가장 많다. 하룡, 유백승, 섭정은 모두 그보다 약하다. 다만 주덕은 단지 수중에 병력을 갖지 못한 빈손의 군장(먼저 제9군 부군장)이다. 사람들의 존중은 받았지만, 무슨 권력은 없었다. 주덕의 발언권은 남하과정에서 그가 드러낸 경험, 능력과 영향력을 사람들이 인정했기 때문에 점차 획득한 것이다(의거군이 남하할 때 부르짖은 구호중 하나는 '주배덕(朱培德)을 타도하고 주덕을 옹호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공역사상 처음으로 개인권위를 수립한 구호였다). 그러나 군장명의의 각도에서 보면 그는 유백승의 바로 뒤에 놓이는 군사지도자라고 보아도 괜찮다. 의거에 참가하고 시종 주덕을 존경하고, 나중에 주덕의 적계 대장이 되는 공초(龔楚)는 전혀 주덕을 폄하할 마음이 없다. 그러나 1954년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오늘, 중공의 모든 당사자료중, 고의로 왜곡된 기재가 있다: 8.1.남창의거는 주덕이 지휘했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이를 빌어 그의 명성을 높이고 그의 중공군대내의 정통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것일 뿐이다."

 

6. 의거후 관련 중요인원의 지도자에 관한 말

 

(1) 장태뢰: "남창에서 회의할 때, (담)평산동자가 하자고 주장했다.....(중앙)은 남창의 결정에 찬동했고, (주)은래동지를 보내어 주재하게 했고.....(장)국도는 성지를 거짓으로 전했다. 공산국제가 하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극력 하는데 반대했다. 이때 오히려 평산은 폭동을 주장했다...이런 결과로 이번 운동은 평산이 영도하게 된다." 이 주장은 당내인사가 가장 명확하게 담평산이 남창의거의 명목상 실제상의 최고지도자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비록 말한 사람인 장태뢰는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2) 이입삼: "평산동지를 위원장으로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진우인등이 국민정부 상위위원으로 가입한다." 이 주장은 확실히 담평산에 불만이 있다. 그러나 부득이 담평산을 당시 남창의거의 최고지도자라는 것을 인정한다.

 

(3) 장국도: "국도는 당시 항상 본인이 동지들에게 신용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평산동지가 중앙을 경시하려는 뜻을 갖게 되었다. 스스로 중앙의 위신을 깍여서, 마음 속으로 깊이 괴로워했다." 확실히 장국도는 담평산을 남창의거기간동안 최고지도자 및 주요정적으로 보았다. 그의 말년 회고록에서는 더욱 명확히 하였다.

 

(4) 섭정: "주은래 및 운대영 동지는 당의 명령을 받아 한구에서 남창으로 왔다. 담평산, 섭정, 섭영진등이 우리의 군대 및 당의 지휘를 책임졌다. 담평산 한린부(韓麟符)등이 국민당의 좌파중앙집행위원회 및 각성당부를 책임지고 대표하여, 국민당정치및당무기관을 조직할 준비흘 했다." (8월 1일 의거승리후) 담평산이 중앙집행위원회의 명의로 중앙집행위원회 및 각성당부좌파분자연석회의를 개최하여, 특별위원회 설치를 승인하고, 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당무와 정무를 집행한다. 담평산이 주석이고 하룡, 섭정이 군사위원회 위원이었다. 주을내도 역시 군사집행위원이었고, 유백승이 참모장이었다." 군인인 섭정은 담평산을 최고지도자로 보았고, 군사지휘권을 중시하는 습관을 보였다. 군사지도자중 하룡과 자신을 주은래의 앞에 놓았고, 유백승을 가장 뒤에 놓았으며, 주덕은 언급하지 않았다. 완전히 군인각도에서의 기본사실에 부합한다. 한린부는 중공당원이고 중공내부의 지위가 높지 않았다. 당시 남창의거지도자명단에 들어있지 않았다. 다만 그는 국민당 "2대"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이고, 국민당의 각도에서 보자면 지위가 비교적 높았다.

 

7. 지도에서 영도로 - 중공중앙의 성격에 대하여 말하다

 

(1) 중공중앙: "섭정,하룡의 남정을 주재한 우리당의 지휘기관, 전적위원호가 결정한 정강가운데...." 중공중앙은 당의 이익각도에서, "우리당의 지휘기관"을 강조했다. 그렇기는 해도 남창의거를 '영도'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2) 얼마후의 <정치기율결의안>에서 명확히 "지도"라고 한다: "전적위원회의 지도는 정치군사상 크나큰 착오를 멍한다." 중공 "6대"는 추가적으로 "남창폭동지도기관"이라고 명확히 한다.

 

(3) 1933년 6월 30일 중앙군사위원회는 중공이 남창의거의 영도자임을 명확히 한다. "1927년 8월 1일 무산계급정당 공산당이 영도한 남창폭동이 발생한다." 여기서 '영도"의 성격규정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남창의거를 전후하여, 중공중앙도 중공의 의거에서의 작용은 '지도'작용이라고 인정했다. 점거한 것은 '지도' 지위었다. 1933년이 되어서야 자신이 '영도'했다고 바뀐다.

 

8. 가급적 회피하는 지도자에 관한 사항

 

1927년 11월, 남창의거의 최고지도자 담평산은 중공중앙에 의하여 당적이 박탈된다. 그러므로, 중공중앙이 나중에 '지도'에서 '영도'로 중공이 남창의거에서의 지위를 강조하지만, 구체적인 지도자에 대한 것은 갈수록 난감한 일이 되어 버린다. 오랫동안 회피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런 난감함은 당연히 정치적인 것이다. 최고지도자 담평산은 당적을 박탈당한다; 그 다음 지도자인 운대영도 당내의 지위가 높지 않았고, 1931년 피살된다. 곽말약, 하룡을 최고지도자로 인정하는 것은 중공의 영도지위를 체현할 수가 없다; 그 다음 급의 지도자중에서 장국도, 이입삼은 나중에 소위 착오노선의 대표가 된다, 임조함의 당내지위는 중공을 대표할만하지 못하다. 그저 주은래만이 자격이 있다. 다만 정치적인 각도에서 그를 남창의거의 지도자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는 시종 중공당내에서 미묘한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부득이 구체적으로 말하려면 그저 군사적인 각도에서 얘기할 수앆에 없다. "하섭부대" 혹은 "섭하부대"라고 하는 것이다. 1944년까지, 주덕은 여전히 군사적인 각도ㅔ서 이 설에 따라서 말했다: "1927년 8월 1일 남창의거때, 군사적으로 큰 승리를 거둔다. 섭정 동지의 6개단과 하룡 동지의 7개단 은 우리 의거군의 주요역량이었다." 1945년 4월 20일 모택동이 초안한 중공역사를 전면적으로 정리한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모택동과 중공중앙은 이 중대하고 민감한 문제를 완전히 회피해 버린다.

 

9. 호교목(胡喬木)의 남창의거 지도자에 관한 기술

 

1951년 6월 22일 호교목은 <인민일보>에 <중국공산당의 삼십년>을 발표한다. 그중에 이런 기술이 있다: "8월 1일, 주은래, 주덕, 섭정, 하룡등 동지가 강서의 남창에서 당의 영향하에 있는 북벌군 삼만여명을 이끌고 무장의거를 거행했다." 이것은 호교목 개인의 말이 아니다. 이 글은 모택동이 쓰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모택동, 유소기가 수정, 심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모택동시대의 중공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지도자에 대한 기술에 쓰인 말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지도"나 "영도"라는 말을 피한다. 정치적인 서술을 피하고 실제 취한 군사를 언급했다. 군사언급을 하면서 '지휘'라는 말도 피하고 '이끌고(率領)'이라는 말을 썼다. 당과 군대간의 관계도 그저 '영향'이라는 한 마디 말만 들어갔다. 다만, 이 기술은 사실상 이후 공식 당사에서 남창의거 지도자에 대한 기술의 기초가 된다. 이때부터, 남창의거의 지도자는 주은래 및 군대장령으로 한정된다(정치부 지도자인 곽말약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런 기술방식에 따라, 섭정이 하룡의 앞에 놓인다. 이렇게 하여 역사적 기본사실에 부합하면서 군대의 중공속성을 강조했다(하룡이 나중에 중공 무장주요지도자중 한 사람이 되지만, 1927년 8월 1일에는 어쨌든 중공당원이 아니었다). 이런 기초 위에서, 남창의거는 중공의 '영향'을 받았다고 규정했으므로, 주은래를 첫번째 자리에 놓아야 했다. 그렇기는 해도, 홍군이 장정을 완성하고 1951년 호교목의 명의로 부득이 남창의거를 안급할 때까지, 주은래는 중공내에서 실제지위가 모택동, 주덕과 비교할 수 없었다. 중공은 정당으로서 또한 무장역량으로서 내지 정권으로서 이미 "주모(朱毛)"이다. 주덕은 모택동에 바로 다음가는 하나의 '신'이다. 모택동은 남창의거와 무관하다. 나중에 얘기하는 합법성은 그저 주덕이 얻을 수밖에 없다. 주덕의 곤경은 당시 군사각도에서 남창의거에서 가장 주요한 지도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다만 어쨌든 지도자에 속한다고 할 수는 있다. 합법성문제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섭정, 하룡의 앞에 놓아야 했다. 손해를 보게 된 것은 유백승이다. 의거 당시 당내지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저 참모장이었으며 주요지휘관이 아니었으므로, 이름조차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10. "문혁"후 군대측의 남창의거 지도자에 대한 기술

 

중공의 주덕숭배는 1950년대후기에 점차 사라진다. 모택동숭배는 '문혁'후 약간 냉각된다. 다만 주은래숭배는 최고조에 달한다. 동시에 "노일배(老一輩)무산계급혁명가"에 대한 숭배는 일종의 도통을 얘기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하니 남창의거에 대한 기술을 새로 해야할 필요가 생긴다. 도통에 대한 기술에서 정치적인 기술은 아주 큰 곤경에 처한다. 그러므로, 중공당사는 갈수록 군사에 유사하게 된다. "노일배무산계급혁명가"중 군인 혹은 군사경력이 있는 자의 지위가 전례없이 숭배된다. 이것은 관방역사를 얘기하면서 찾아낸 가장 이의가 없고, 논쟁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했다.

 

그렇기는 해도, 군대의 말의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 남창의거의 지도자는 군대측의 기술에서 대표작은 전 중국인민해방군군정대학이 편찬팀, 중국인민해방군군사학원 편찬팀이 1978년 8월에 수정한 <남창기의>라는 글이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의거의 주요지도자는 주은래 동지이다. 주덕, 하룡, 섭정, 유백승등 동지도 의거의 지도자이다."

 

이 기술은 기본적으로 1951년의 호교목의 기술을 계승했다. 다만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하나는 주은래가 제1위에 놓였을 뿐아니라, 더더욱 그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주덕등과 두 등급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유백승이 가입되었다. 군사적으로 말하자면, 이 서술이 비교적 완전하고 역사의 원모습에 가깝다. 다만 여전히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군사에서만 보았지 당의 각도에서 보지 않았다. 주은래와 하룡, 섭정이 서로 다른 등급에 속하는가? 둘째, 주덕은 명의상 군대의 주요지휘관의 각도에서 보자면 유백승의 앞에 놓여도 된다. 다만 하룡, 섭정보다 앞에 놓여야 하는가?

 

그러나, 어찌되었건, 군대측의 남창의거지도장 대한 서술방식은 상대적으로 완전하다. 지금까지 가장 유행하는 기술방식이 된다. 단지 사람들은 주은래를 두드러지게 뽑아내어 주덕, 하룡, 섭정, 유백승과 서로 다른 등급이라고까지 보지는 않는다.

 

11. 중공중앙의 "문혁"후의 남창의거 지도자에 관한 기술

 

호교목의 남창의거 지도자에 대한 기술은 해결되지 않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문혁"후 중공중앙은 기술방식을 바꾼다. 대표적인 문건은 1981년 6월 27일 중공11기6차회의에서 통과된 <건국이래 당의 약간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이다. 관련기술은 이렇다: "주은래등 동지가 영도한 남창의거는 국민당반동파에 대한 무장반항의 제일성이다...주덕동지가 영도한 의거부대는 얼마후 정간산으로 가서 회합한다." 이 기술은 아주 모호한 언어로 표현했다. 주은래의 영도는 사람들에게 당의 영도로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군사영도로 이해할 수 있게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주덕을 언급함으로써 주덕을 두드러지게 한다. 이것도 역사사실에 위배되지는 않는다. 비록 주은래의 영도지위는 토론을 해야할 필요가 있지만, 군대혈맥을 보존한 주덕을 언급한 것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지도자에 대한 기술은 중공의 자신이익을 보호하는데 있어서 아주 오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술은 말장난이다. 객관적이지 않다. 전면적으로 역사 자체의 사실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장난은 확실히 호교목이 1951년에 한 말장난보다는 훨씬 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