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초기)

신해혁명과 유언비어

중은우시 2014. 4. 4. 01:43

글: 유흔(劉欣)

 

유언비어는 현재에도 핫이슈이다. 어룡혼잡(魚龍混雜)의 인터넷세계에서, 유언비어는 없는 곳이 없다. 심지어 진화화(秦火火)같은 전문적인 유언비어제조자까지 나타나서 확실히 사람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유언비어'의 '직업화'추세는 갈수록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유언비어는 군중의 혼란을 부추길 것이다. 2010년에 발생한 산시(山西)의 지진유언비어와 마찬가지로, 짧은 몇 시간만에, 산서성 절반지역에 퍼져갔고, 타이위안(太原), 진중(晋中), 창즈(長治), 진청(晋城), 뤼량(呂梁), 양췐(陽泉)의 6곳 수십개 현,시에 사는 사람들은 속속 집에서 빠져나와 차가운 바람 속에서 지진이 오기를 기다렸다. 2011년에는, 일본 핵발전소가 쓰나미로 문제되었을 때, 일시에 소금이 부족하다는 유언비어가 다시 신속히 확산된다. 각 상점의 소금은 모조리 다 팔렸고, 소금가격도 급등한다. 우리집은 내가 강력히 우기는 바람에 소금를 사기 위해 소란을 피우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를 보면 유언비어의 위력을 알 수 있다.

 

인터넷유언비어를 제외하고도 각양각색의 허위뉴스도 유언비어의 죄괴화수(罪魁禍首)이다. 전형적인 종이만두사건을 예로 들면, 발행후 오랜 기간동안 이것을 사실로 생각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적지 않은 유언비어가 심지어 빵으로까지 번져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사람들이 이 일을 잊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보면 유언비어의 위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신해혁명이전에 온나라에는 각양각색의 유언비어가 많이 나돌아다녔다. 이들 유언비어는 신해혁명의 승리에 아주 큰 작용을 한다. 그리고 이들 유언비어를 직접 만든 사람은 바로 당시에 그 이름도 유명한 신혀혁명 원로였다.

 

근대 초성(草聖)으로 불리는 국민당원로 우우임(于右任)은 바로 당시 유언비어제조의 고수였다.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면, 유언비를 만들수 있으면 유언비어를 만들자는 것이다. 다른 것은 없었다. <민립보>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웅이 일을 함에 있어서 목적은 견고해야 하고, 수단은 영활해야 한다. 1백개의 목적이 있다면 1백개의 수단이 있어도 무방하고, 그 수단을 백번 바꾸어도 무방하다."

 

당연히, 이런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민립보>에 유언비어를 싣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유언비어는 만들어도 좀 심한 측면이 있다. 보기에 우스캐처럼 보일 정도이다. 예를 들어:

 

11월 7일, 북평(북경)에서 전보가 왔다. 북경은 이미 대한광복(大漢光復)되었고, 청나라황제는 대사관으로 도망쳐 숨었다.

11월 21일, 남경에서 온 소식: 어떤 살마이 장훈적(張勳賊, 장훈)이 손애 사람의 심장을 들고, 두부가게에서 두부를 사고 있었다. 기름으로 사람심장을 튀겨서, 아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상시 전국의 모든 사람은 세도(世道)가 혼란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청나라정부가 망할지 아닌지에 대하여는 말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태평천국으로부터 의화단까지 수십년간 충분히 어지러웠지만, 청나라정부는 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무너질지 아닐지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확실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뉴스가 나오자 많은 사람들의 오락가락하던 마음은 어느 정도 방향을 잡게 된다.

 

우리가 현재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청황제의 퇴위는 다음해 3월의 일이다. 장훈이 대적을 앞에 두고, 대장군으로서 친히 길거리에 나가서 두부를 하고, 그것도 한 손에 사람의 심장을 들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그저 우스개로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중국의 남방에서 황제가 비록 황궁 안에 있지만, 그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일찌감치 유언비어에 의하여 쫓겨나 있었다.

 

남방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북방도 그에 몾지 않았다. 경매구(景梅九)라는 신해혁명원로가 있는데, 그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비록 그의 유명세는 우우임에 못미치지만, 재기(才氣)는 전혀 못하지 않았다. 그는 7살때 사숙(私塾, 서당)에 들어갔고, 10살때 "오경"을 통했다. 13살때는 부친과 함께 입반(入泮)(학교에 들어가는 것. 이것은 과거제도 하에서 가장 낮은 단계이다. 입반 후에 입사(入士)한다)하고, 청나라 광서23년 태원진양서원(太原晋陽書院). 산서대학당서재(山西大學堂西齋)에서 공부한다. 27년(1901년), 산서의 5명의 학생이 막 성립된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에 입학한다. 그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다음 해 일본유학을 가서, 제국대학 예과에 들어간다. 일본에 있을 때,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동맹회 산서분회 평의부 부장을 맡는다. 일본에 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장래 귀국하면 함께 섬서로 가서, 서북혁명을 도모하겠다."

 

바로 이런 인물이,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혁명을 위하여 유언비어를 퍼트려, 혁명의 성공을 돕는데 적지 않은 노력을 들인다. 그 본인의 마음 속에, 이 일은 항상 염두에 있었고, 조그만치의 기회만 있으면 전혀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1910년, 즉 신해혁명 2년전, 이 시기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이 사건은 아주 재미있다.

 

이 때, 이미 혁명당인이 된 경매구는 서안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하루는 당원들 모임이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이 나서 헤어진다. 그는 친구인 두중복(杜仲伏)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가는 길에 죽을 파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죽을 마셨다. 이때,두중복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는데, 돌현 별똥별이 지나갔다. 그때 영감이 떠 올라서 말이 나오는데로 두 마디를 내뱉는다: "혜성동서현(彗星東西現), 선통이년반(宣統二年半)!". 경매구는 그가 헛소리르 하는 것을 알았지만, 주위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미리 짜둔 것처럼 말한다: "그 동요는 전해진지 아주 오래되었는데, 도대체 무슨 뜻이냐?" 생각지도 못하게 죽을 팔던 사람은 경해구가 이렇게 묻자 즉시 말을 받아 대답한다: "무슨 뜻이라니? 청나라가 곧 망한다는 말이 아니냐. 대명왕조도 이백수십년을 못넘겼는데, 청나라도 이백여년이 되었으니, 망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이 말을 할 때, 곁에 순경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순경은 그들의 말을 막지 않았을 뿐아니라, 찬탄하는 말을 한두미디 내뱉는다.

 

다시 며칠이 지나서, "혜성동서현, 선통이년반"이라는 동요가 신속히 퍼져간다. 대청이 곧 망할 것이라는 "뉴스"는 이렇게 하여 백성들 사이에 퍼져간 것이다. 나중에는 심지어, "불용겹(不用掐), 불용산(不用算), 선통불과이년반(宣統不過二年半)"이라는 버전까지 나온다. 이 말이 신해혁명의 성공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는 계산할 수 없다. 모든 정사는 그 유언비어의 존재를 중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역사를 바꾸었다.

 

무창의거가 발발할 때, 경매구는 이미 북경에 와 있었다. 주요업무는 <국풍일보>를 주재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전보가 있었으므로, 무창의거에 대하여 북경도 금방 알았다. 다만 구체적인 상황은 누구도 잘 몰랐다. 게다가 "선통이년반"등의 유언비어가 만들어낸 심리적인 암시작용도 있어서, 모든 사람은 잠재의식속에 청나라는 곧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친,귀족,대신들이 앞장서서 천진,상해의 조계지역으로 도망친다. 전체 북경성은 혼란에 빠져서 엉망진창이 된다. 이런 큰 배경하에서, 경매구는 다시 또 다른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하루는 경매구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도 고개를 들어서 보았다. 흐릿하게 하늘에 별이 하나 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은 '태백성(太白星)이 아니냐?"고 말했다. 경매구는 돌연 혜성을 이용하여 유언비어를 퍼트렸던 일을 떠올리고, 지혜를 짜내어, 다시 한 마디 유언비어를 만들어 낸다. 사람들 속으로 몇 걸음 걸어가서는 이렇게 외친다: "태백주현(太白晝見), 천하대란(天下大亂)!"(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니, 천하가 대란에 빠질 것이다). 이 한 마디 말은 하룻만에 북경성내에 다 퍼진다. 이는 직접적으로 북경성의 혼란을 불러왔고, 학려풍성(鶴唳風聲)하게 된다.

 

북경성의 모습과 무창의거를 아고 있는 경매구는 <국풍일보>에 이렇게 보도한다: "황극강(黃克强)이 친히 호북에 가서, 혁명운동을 하고, 의거가 발발한 후 금방 이미 무창성을 점거했고, 청나라의 총사령관 서(瑞)는 패주했다." 이 보도는 본질적으로 우우임의 그 북경함락, 선통하야와 완전히 같은 방식이다. 결과를 따지지 않고 그저 유리하다면 유언비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청정부는 유언비어가 너무나 무섭다는 것을 알았고, 계엄을 선포한다. 그리고 신문사에 무창사변에 관한 여하한 소식도 싣지 말도록 명령한다. 이 일은 경매구에게 오히려 기회라고 여기게 만든다.

 

청나라조정의 이런 간섭에 대하여 신문발행에 '예술'적인 재능이 있던 경매구는 직접적으로 <국풍일보>의 전체 1면을 백지로 발행한다. 단지 2호의 큰 글자로 1줄만 적는다: "본 신문이 각 방면에서 얻은 소식은 아주 많다. 경찰의 간섭으로 일률적으로 삭제했으니, 독자들은 양히를 바란다!" 사실은 증명한다. 경매구의 이 방법은 보도내용을 가득 실은 신문보다 더욱 효과적이었다. 예술분석의 눈으로 이 보도를 보면, 그 공백이 독자들에게 남겨주는 상상의 공간은 무한하다.

 

신문을 발행한 후, 독자들은 금방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분명 혁명군이 대승을 거두고, 각성도 모두 호응하고 있구나. 정말 왕조가 교체되겠구나라고 생각한다. 각양각색의 유언비어가 북경성에 돌아다니게 된다. 직접 정부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어, 조변석개로 신문에서 무창의거에 관한 소식을 싣도록 허용한다. 이렇게 되니 정부의 위신은 바닥에 떨어지고, 경매구의 유언비어 공간은 이전보다 훨씬 넓어졌다. 그리하여 청나라정부를 무너뜨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북방의 혁명당조직은 남방에서 파죽지세라고 얘기하고, 남방의 혁명당조직은 청황제가 이미 퇴위했다고 말한다. 남북이 서로 맞아떨어져서, 서로간에 시너지효과를 올린다. 그렇게 하여 신해혁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청나라정부는 이미 유언비어에 의하여 손과 발이 묶인 꼴이 되었다. 이러니 어째 패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언비어를 만들어낸 혁명원로들 중에, 우우임,경매구 같은 류의 사람들은 더 많이 있었다. 채명택(蔡銘澤) 선생은 <중국국민당당보역사연구>에서 '혁명을 위한 유언비어"라는 작은 장절에 이 일을 전문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를 보면, 유언비어는 신해혁명에 끼친 영향이 아주 크다.

 

풍자유(馮自由) 선생의 <혁명일사>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당시 유언비어의 위력을 아주 잘 보여준다.

 

무한혁명군이 일어나면서, 청나라관리인 장명기, 용제로, 이준등은 처음에 끝까지 항거하고자 생각했다. 그러나, 상해에서 온 전보에 "경함제붕(京陷帝崩, 북경이 함락되고 황제가 죽었다)"는 네 글자가 나오고, 홍콩 마카오등지의 신문에도 속속 이런 소식이 실리자, 무한성의 인사들은 환호작약했다. 장총독은 이미 인심이 기울어, 더 이상 만회할 방법이 없다고 보고, 황급히 도주하기 시작한다. 용, 이 두 사람도 고개를 숙이고 투항을 한다. 광동의 여러 성은 피를 흘리지 않고 광복을 얻었는데, 신문의 힘이 아주 컸다.

 

당시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혁명을 위하여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트린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심지어 이런 말도 했다: "기세를 과장되게 얘기한 것은 군심을 안정시킬 수 있었고,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런 거짓말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런 현상을 볼 때, 반드시 그 현상 뒤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

 

만일 현재 누군가 해방군의 어느 군관이 사람의 심장을 들고 두부가게로 가서 두부를 사고, 주위 사람들이 알아보았다고 한다면, 첫번째 반응은 분명히 거짓말이라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유사한 유언비어가 그 당시에는 진짜라고 사람들이 믿었다. 이를 보면 그 당시 정부는 아직 백성들의 마음 속에 이런 형태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관료사회라 하더라도, 관료 대부분이 개기름이 흐르고 호화사치스럽게 생활하여 백성들에게 주는 인상이 좋지 않다. 이것은 결국 뇌봉이 가죽옷을 입었으므로, 이와 관련하여 여러가지 헛소문들을 만들어 냈다. "뇌봉은 좋은 일을 하고도 이름을 남기지 않았으나, 매일 일기를 썼다"는 주장은 마치 총명하게 보이지만 어렵게 건립한 영용관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유언비어가 널리 전파되는 것은 배후의 큰 환경을 아주 중시해야 한다. 그리고 유언비어를 뿌리뽑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대동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청정부는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국민정부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현재도 아주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눈을 똑바로 뜨고 미래를 본다. 가장 큰 바램은 바로 신해혁명전후의 '유언비어가 중국내에 판을 치는' 상황이 다시 출현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