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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와 치파오(旗袍)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홍촉(洪燭) 

 

 

 

1

 

홍콩,타이완의 여자배우중에서 장만옥(張曼玉)가 치파오에 가장 어울린다. 한때 유행했던 영화 <화양연화>는 여인과 치파오의 가장 경전적이고 가장 완벽한 결합이었다; 장만옥은 금사를 넣은 대홍(大紅)치파오를 입었고, 구상해(舊上海)의 유원소부(幽怨少婦)를 연기했다. 치파오를 장만옥과 같은 몸매를 지닌 여자가 입으면 졸지에 생명을 지니고 영혼을 지닌다. 이 회고정서가 농후한 영화는 부지불식간에 치파오를 광고하게 되었다. 많은 여성들은 치파오를 사랑하게 되고, 하루빨리 나이든 재봉사를 만나 치파오를 만들어 입으려고 서둘렀다. 다른 어떤 옷의 유형이, 치파오보다 적절하게 중국여성의 화양연화를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장만옥은 다시 이 치파오를 입고 프랑스의 영화제에 참가한다. 서양인들이 깜짝 놀란다. 파리는 비록 세계패션의 수도이지만, 동방에서 온 치파오의 앞에 조금도 오만을 드러낼 수 없었다. 장만옥이 치파오를 입고 물만난 고기처럼, 단장전아하면서, 풍정만단했다. 마치 일거에 상해의 번화한 꿈으로 돌아간 것같고, 풍화설월의 시대로 돌아간 것같이 느껴진다.

 

아마도 서양인이 보기에, 치파오는 가장 여성의 곡선미를 드러내는 옷일 것이다. 장만옥이 복숭아뼈까지 내려가는 긴 치파오를 입고 있으면(다리는 양측의 찢은 곳으로 보였다 말았다 한다), 비록 비파를 안고 반쯤 가린 듯하지만, 뉴욕 지하철역입구에서 바람에 짧은 치마를 휘날리는 마릴린 먼로보다 더욱 섹시하다.

 

청나라군대가 산해관을 넘어들어온 후, 북경지구를 지키는 팔기군은 총병력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하물며 장병들은 모두 가족을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방대한 "경기(京旗)"집단이 형성된다. 그들의 후손은 "기인(旗人)"이라고 부른다(혹은 "팔기자제"). 팔기의 부녀들이 입는 민족복장을 "치파오"라고 불렀다.

 

치파오는 처음에 아주 널널한 장포였다(나중처럼 그렇게 꽉끼지 않았다). 방한보난작용을 하면서 말을 타거나 일하기 편리했다.

 

당시 만주부녀가 한족부녀와 가장 큰 차이는 하나가 전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은 치마를 입지 않고 치파오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자신의 전통을 계속 보전했다.

 

2

 

북경과 관련있는 여인을 얘기하자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서태후를 떠올릴 것이다. 그녀는 북경역사상 유명한 여인이다. 북경에 거주하는 당대 스타여배우인 류샤오칭(劉曉慶)은 일찌기 스스로를 돌아보며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여인으로 살기는 어렵다. 독신여성으로 살기는 더욱 어렵다. 유명한 독신여성으로 살기는 어려운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 기실 이 3가지 조건은 1백여년전이 서태후에게 모두 집중되어 있다. 1861년 함풍제가 붕어한 후, 그의 미망인으로서 서태후는 기본적으로 독신여인이다. 수렴청정, 대권독점으로 사실상 대청제국의 여황제가 된다. 조정을 수십년간 통치한 이 여강자와 비교하면, 류샤오칭은 기껏 소무견대무(小巫見大巫)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그녀는 <화소원명원>등 청나라극에서 서태후를 연기하면서 성공을 거둔다. 그녀는 정말 서태후의 여인으로서의 난점을 느꼈단 말인가?

 

서태후의 옛날 사진을 보면, 청나라때 치파오에 대한 직관적인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내가 손에 하나 들고 있다. 아마도 그녀가 60세 생일때 이화원에서 찍은 것일 것이다. 치파오를 입은 에허나라씨는 화양연화때 일국의 군주 함품제를 홀린 적이 있다. 영화 <화소원명원>에서 류샤오칭은 서태후로 분장하여 정대누각에서 몰래 추파를 던졌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도 늙는 법이다. 서태후의 만년 이미지는 여전히 옹용화귀(雍容華貴)하다. 그녀의 치파오는 남다르다. 복잡한 꽃과 새의 도안을 자수로 넣었고, 금을 상감했다. 소매입구와 아래는 모두 나팔모양이다. 서태후는 비록 무측천처럼 직접 황제를 칭하지 않았지만, 정권을 48년간이나 장악했다. 실제로는 여황(혹은 여태상황)에 상당했다.

 

그녀가 수렴청정할 때 입은 이 예복은 아마도 모든 치파오 중에서 가장 존귀한 것일 것이다. 어느 정도 "용포"의 성격을 지닌다. 그 풍운변환의 반세기동안, 대청의 강산은 치파오에 지배당했다. 치파오야 치파오야. 일찌기 손을 뒤집으면 구름이 되고, 손을 덮으면 비가 되었다.

 

외국인 블랜드와 백하우스는 <여황치하의 중국인>이라는 책을 썼고, 서태후는 서양에서도 유명해진다. 유명도와 지위로 따진다면, 그녀는 고금중국여인중 일류라 할 것이다. 아마도 무측천만이 그녀와 맞상대할 만할 것이다. 단지 그녀의 명성은 너무 좋지 않았고, 후세인들의 욕을 얻어 먹게 된다.

 

임어당이 그녀를 평가할 때 약간의 체면을 봐주었다: "당대의 빅토리아 여왕은 일찌기 정치무대를 반세기나 통제했다. 비교하자면, 서태후는 정치적 예지, 강인한 성격, 과감한 결단의 재능과 정권을 공고히 장악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녀는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형적인 여성의 매력을 지녔다....그러나 어떻게 말하더라도, 그녀는 우매하고 완고한 여인이다. 중국의 그 생사존망의 위기에, 서방의 도전에 직면한 그 반세기동안 그녀는 중국의 발전을 저해했다."

 

3

 

서태후가 함풍제의 마음을 꽉 잡을 수 있었던 것은(양귀비가 당명황 즉 당현종의 마음을 잡은 것처럼), 한편으로 그녀가 꽃병같은 여인이 아니기 때문이고 심계가 깊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화장을 잘 했고, 항상 새롭게 하여, 궁중에서 보기 드문 '모던여성'이었다. 삼천궁녀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녀는 심지어 머리모양과 머리장식에도 변혁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유행의 흐름을 이끌었다. "효흠황후때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고, 이전 때보다 머리카락이 더욱 높았다; 만주부녀가 모두 따라했다." 황태후의 보좌에 오른 이후, 복식에 대한 요구는 더욱 까다로워진다: "자주 옷을 황단포로 했고, 위에 분홍색 모란화를 크게 수놓았다." 그리고 "바깥은 삼천오백개의 진주를 그물모양으로 묶어서 어깨에 덮었고, 머리에는 항상 몇 송이의 큰 꽃을 놓았다. 다시 각종 주보를 두어, 풍류의 끝을 보여준다. 이는 궁중의 일대 기담이었다."(원홍기의 말)

 

아마도 영국의 빅토리아여왕 및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2세도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낭비하고 사치하진 않았을 것이다. 청나라 내무부 당안기록을 보면, 광서10년 십월 초십일, "황태후의 오순 만수(생일)에, 신등은 평상시처럼 생일축하인사를 했다: 홍주(紅綢)구구건, 음식구구합...." 이것은 추가적인 것이다. 서태후는 매년 비단 160필을 누렸다 그러나 항상 '기준을 넘어섰다'. 이렇게 많은 비단으로 무엇을 하였는가? 치파오를 만들었다. 서태후는 제국의 가장 좋은 디자이너와 재봉사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권세있는 여인으로서, 서태후는 북경성내에서 위세를 부리고 복을 누렸다. 이화원은 그녀가 명령하여 지은 것이다. 한때 그녀의 개인화원으로 썼다. 여기에만 2400만냥백은의 해군경비를 전용했다. 곤명호의 가에는 이층높이의 석방을 만들어, 태후가 호수와 정원을 감상하는데 쓰게 했다. 마치 대청제국의 해군을 시찰하는 것처럼. 이것 자체는 절묘한 풍자이다. 왜냐하면 이 편제외의 거선은 영원히 그 자리에서 명을 기다리는 것이다. 바깥의 바다로 나갈 수가 없다. 열강의 견고한 전함과 날카로운 대포와 맞서싸울 수가 없다. 이화원의 그 호화로운 석방은 필자가 보기에 중국 최후 봉건왕조의 타이타닉이다. 서태후는 직무유기한 여선장이다.

 

서태후는 평생 치파오를 입는다. 유일하게 한번 평민화된 한족복장으로 갈아입은 적이 있다. 그것은 1900년, 팔국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아주 화급하여 서태후는 농부(農婦, 추격병에게 발각될까봐 걱정하여)로 변장하여 서안으로 황급히 도망친다. 도망길은 처량하고 고생이었다. 서태후는 늙은 솜옷을 입었을 뿐아니라, 와와두(窩窩頭)를 먹었다. 그때 산해진미에 질린 '노불야'(老佛爺, 서태후를 부르는 말)는 와와두가 천하에 가장 맛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나중에 환궁하고나서 어선방에 와와두를 만들라고 한다. 그녀가 도망길에 입었던 낡은 솜옷이 궁정의 황단포보다 더욱 실용적이고 더욱 따뜻하다는 것은 느끼지 못했을까?

 

4

 

치파오 자체의 가치는 이로 인하여 저하되지 않았다. 아마도 서태후가 입었으므로 그것에 감추어진 것은 황실기풍, 왕자지기일 것이다. 혹은 귀족의 격조일 것이다. 이것들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은 일찌기 한 왕조의 여인들이 모두 입었다. 서태후 외에도 진비가 있다. 그리고 자금성내에 이름없는 삼천궁녀가 있다. 그리고 크고 작은 푸진(福晋, 왕야의 처), 명부(命婦, 봉호를 받은 관리의 처), 거거(格格, 황족여자의 칭호)가 있다.

 

아마도 새금화같은 창기들도 치파오를 입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시인 유반농(劉半農)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중국에는 두 개의 "보배"가 있다. 서태후와 새금화이다. 하나는 재조에 있고, 하나는 재야에 있다. 하나는 나라를 팔아먹었고, 하나는 체면을 다 떨어뜨렸다." 당연히, 우리는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그가 말한 "보배"에는 인용부호가 있다. '난세활보(亂世活寶)'의 뜻이다. 서태후와 비교하면, 새금화의 경력은 더욱 난세가인의 분위기가 있다. 최소한 동정할 점이 있다. 서태후는 서양인의 총이 두려워, 서안으로 피난갔다. 연화여인으로서, 새금화는 홍진에 남아서 버텨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모든 북경시민들과 같이, 목숨을 아까워하던 태후에게 버림받았다.

 

함풍은 한가지 실수를 한다. 마누라를 잘못 얻은 것이다. 그는 서태후를 비로 삼지 말았어야 한다. 서태후는 남편의 관을 승덕에서 북경으로 들고온 후, 정변을 일으킨다. 수렴청정이 48년에 이른다. 대청왕조가 진정 음성양쇠(陰盛陽衰, 음기가 성하고 양기가 쇠한다. 여자들이 득세하고 남자들이 몰락한다)의 경지로 접어들어, 사상유례없는 난감한 처지에 빠진다: 계속하여 배상금을 물고, 계속하여 영토흘 할양하고, 계속하여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다. 서태후는 국방을 진작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선과 대포를 살 해군경비로 별장(이화원)을 지었다. 이 여인이 엉뚱한 짓을 한 결과는 수도가 다시 한번 무너지는 것으로 끝난다. 광서26년(1900년), 팔국연합군이 중남해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태화전에서 왈츠를 춘다.....

 

필자는 가끔 쓸데없는 가설을 해보곤 한다: 도광의 의발을 이어받은 사람이 함풍이 아니라, 비범한 공친황 혁흔이었다면 역사는 바뀌지 않았을까? 설사 국가의 운명이 완전히 황제 본인의 성격에 좌우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예허나라씨는 무대에 올라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더더구나 동란시대에 악명이 자자한 여주인공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태후의 만청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중국인들이 깊이 반성하는 반면교재이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다. 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가 없다.

 

5

 

청나라가 망한 후, 치파오는 즉시 사라지지 않는다. 초백청(肖伯靑)은 1924년의 원소절에 고루전대가로 가서 화등을 보았는데, 적지 않은 기인부녀들이 "긴 치파오를 입고, 대판두(大板頭)로 머리를 빗고, 연지분을 얼굴에 마르고, 큰 키로 서서 단정하고 우아하게 사람들 틈에서 화등을 보고 있었다. 이때는 신해혁명으로부터 십여년이 지난 때였는데, 기인부녀들이 치파오를 입는 풍속은 여전히 민간에 남아 있었다."

 

기인부녀들은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녀들은 치파오를 입는다. 그리고 아래는 전족하지 않은 발이고, 위에는 항상 대판두로 머리를 빚는다. 마치 <사랑탐모>에서 철경공주같은 류의 머리모양이다. 혹은 혹은 뒷머리에 두 개의 흑단자호의 판으로 빗어서, 마치 매미날개같이 하는 것이다. 특히 왕공, 명부 집안의 부녀들은 외출할 때, 항상 분을 발랐고, 화려한 옷을 입었다."

 

1924년 11월 5일, 풍옥상 장군이 퇴위한 부의를 자금성에서 축출한다. "이 날부터, 전 북경의 길거리에는 다시는 대판두로 머리를 빗은 부녀를 볼 수 없었다...북경 수백년동안 기인부녀의 대판두로 머리를 빗는 풍속은 이때 근본적으로 끝이 난다. 기이하기는 하지만, 북경의 길거리에 대판두는 보이지 않게 된다. 목두저화(木頭底靴)도 보이지 않게 된다. 기인부녀가 입던 치파오는 조용히 북경시민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다. 금방 북경에서 흘러나가, 20년대 중반부터, 부녀들이 치파오를 입는 것은 전국에서 유행한다. 각 대도시 부녀들이 치마를 입는 것은 적었고, 모두 치파오를 입었다. 시골부녀도 치파오를 입었다."

 

치파오의 생명력은 아주 강했다. 백거이가 쓴 글에서 쓴 것처럼 '리리원상초(離離原上草), 야화소부진(野火燒不盡), 춘풍취우생(春風吹又生)"이었다. 그리고 갈수록 더 심해졌다.

 

필자의 상상 속에 "5.4"운동을 전후하여 북평의 여대생들은 통상 인단트렌염료(청색염료)로 물들인 옷감으로 만든 단식의 치파오를 입고, 하얀 모선 목도리를 두르고, 가벼운 흑포혜(黑布鞋)를 신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신이 그리워하던 유화진(劉和珍) 군 그리고 그의 제자 허광평, 또한 사후에 도연정에 묻힌 재녀 석평해(石評海), 그리고 양말(楊沫)소설 <청춘지가>의 임도정은 모두 이런 복장이다. 그녀들은 어떤 때는 장안가에서 전단을 뿌렸고, 어떤 때는 책을 끼고 인력거에 앉아 있거나, 수업하러 가거나 혹은 자유연애를 했다. 그것은 초봄 이월이었다. 필자는 연말의 딱딱이 소리에서 이러한 신여성의 청순한 모습을 환각처럼 본다. 그녀들은 치파오를 소박하게 바꾸었고, 더욱 사상적으로 바꾼다.

 

나중에 신월파 여시인 임휘인 그리고 귀부인 육소만은 모두 이렇게 '개량'된 치파오를 입었다. 풍류재자 서지마(당대의 당백호)가 그녀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치파오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임매매"(임휘인)는 일찌기 서비마와 함께 북경을 방문한 인도시인 타고르를 만나 같이 사진찍는다. 임휘인의 치파오는 이미 중국의 새로운 시사(詩史)에 들어간다.

 

치라오는 한때 노북경의 특색이었다. 1930-40년대의 상해에서 그것은 크게 유행한다. 상해의 유행을 선도하는 여성들은 교묘하게 치파오의 품격을 바꾼다. 국수를 보존하면서 서양분위기가 충분히 드러나게 하였다.

 

치파오는 마치 진정 자신의 '화양연화'를 맞이한 것같다. 자금성을 정복한 후, 십리양장(상해의 와이탄)을 휩쓴다.

 

장애령의 소설을 읽으면, 작자의 서명을 지우더라도,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은 절대로 신식 치파오를 입은 상해소여인이 쓴 것이라는 것을. 뜻의 화려함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문자마저도 치파오의 침각처럼 세밀하고 주상(周詳)하다.

 

필자는 장애령이 치파오를 입은 사진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상해의 일대명원이 치파오를 입은 모습은 장만옥보다 손색이 없었을 것이라고. 최소한 그녀는 치파오를 더욱 문화적으로 보이게 하였을 것이다.

 

경파(京派, 북경)의 치파오, 해파(海派, 상해)의 치파오는 구분된다. 전통의 치파오, 개량주의의 치파오는 구분된다.

 

6

 

초백청이 묘사한 치파오의 흥성과 쇠락은 이러하다: "20년대중엽에서 1949년까지 근 30년간 복장디자이너들은 옷의 스타일을 자주 바꾸었다.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한다. 만변불리기종(萬變不離其宗, 아무리 바뀌어도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치파오의 깃을 높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고(높을 때는 하악골까지 올라가서 목을 돌리는 것도 힘들 정도였고, 낮을 때는 그저 손가락 한 개정도로 깃이 있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소매를 길게 자르기도 하고 짧게 자르기도 하고(소매가 길대는 손등을 덮고, 소매가 짧을 때는 팔꿈치만 가렸다. 더 짧을 때는 양쪽 겨드랑이만 가렸다) 길이도 길게 자르기도 하고 짧게 자르기도 했다(길 때는 발등에 닿았고, 짧을 때는 무릎까지 갔다) 옆을 트는 것을 높게도 하고 낮게도 했다(높을 때는 무명골까지 올리고, 낮을 때는 무릎까지 내려갔다 걸을 때 걷기도 힘들 정도가 된다). 그들의 새로운 설계는 치파오의 깃, 트임의 고저, 소매 길이의 장단으로 변화무쌍했고, 서로 경쟁했다. 어쨌든 치파오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 기풍은 1949년 10월 신중국이 성립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후에는 점점 쇠락한다."

 

그는 특히 10년동란시기를 언급한다. 치파오와 치마를 모두 사구(四舊)로 본 시절이다. 사람들이 타도할 대상이 되었다. "길거리의 행인중에 치파오를 입은 사람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치파오는 다시 불새처럼 부활한다. 치파오의 회광반조는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일종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 일종의 전아하고 장중한 전통여성미를 대표한다. 치파오를 입고 꽃사이를 거닐면, 그림 속의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뒤돌아보며 한번 웃어주면, 마치 역사의 연운이 꽃가에 상감되는 것같다. 맑은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고 물보라가 인다. 치파오는 하늘거리면서,지나간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당창리운빈(當窓理雲鬓), 대경첩황(對鏡帖黃)", 여전한 것은 추수이인(秋水伊人)이다.

 

근년들어 패션쇼, 미인선발대회가 많아지고 있다. 치파오는 국수로, 그 온고지신의 심미작용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화려한 많은 옷들 중에서 기치가 선명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여성의 체형을 돋보이는 방면에서, 치파오는 수영복(설사 비키니라 하더라도)의 출신입화의 점이 있다. 반은 가리고 반은 드러내며, 오히려 약간의 몽롱한 시의, 함축의 미감을 드러낸다. 치하오는 고귀하고 초범탈속하다.

 

필자는 천단부근에서 한 치파오를 주제로한 전문행사를 본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이 복장의 탄생, 발전과 변혁을 전시했다. 이는 고색고향의 이야기를 시로 읽는 것과 같았다. 경성의 한 유명모델이 머리를 올리고, 가볍게 부채를 흔들며, 모란을 자수한 대홍치파오를 입고 서서히 등장했다. 음악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고, 조식이 쓴 "능파미보, 나말생진(凌波微步, 羅襪生塵)"의 낙신이 졸지에 나의 머리에서 떠 올랐다. 화산수수(畵山繡水)의 사이에서, 그 맛이 유원(悠遠)했다. 치파오의 기품은 여전했다. 일종이 문화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일종의 고전문화. 시대가 달라졌지만, 나의 상상과 축복에서 그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치파오는 여전히 펄럭인다....

 

나는 친구가 있는데 강풍(姜豊)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텔레비전 MC였다. 그녀는 일본에 가서 프로그램을 찍은 적이 있는데, 화복(和服, 기모노)와 논쟁을 벌였다: "화복은 두 가지 완전히 서로 다른 풍격이다; 극소아(極素雅), 극청담(極淸淡)의 것과 극명염(極明艶), 극농울(極濃鬱)의 것이 있다. 다만 입으면 마찬가지로 온량(溫良)하고 마찬가지로 무미(嫵媚)하다. 화복은 바로 이런 매력이 있다. 어떤 성격의 여자라도 그것을 입으면 어쩔 수 없이 온유하고 현숙해진다. 누가 와서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두 발을 나란히 하고 두 손을 모으고, 눈은 공손하게 내리깔며, 웃음을 먹므게 된다.한마디로, 온량공검(溫良恭儉)이 모두 생각난다."

 

기실, 치파오도 그렇지 않은가? 치파오도 두 가지 완전히 다른 풍격이 있다. 그러나 같은 효과를 낸다.

 

일본에 화복이 있지만, 중국에는 치파오가 있다. 이것은 여인의 전통이다.

 

중국여인의 내심 깊은 곳에는 아마도 그림자같은 치파오가 진열되어 있을 것이다. 상자 바닥에 깊이 쳐박아두어 위치를 찾지 못할지라도. 어쨌든 그것은 보일듯 말듯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