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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와 진비(珍妃): 고부갈등의 원인은?

by 중은우시 2013. 5. 18.

글: 홍촉(洪燭) 

 

자금성을 산보한다. 내가 가장 잊지 못할 곳은 삼대전(속칭 금란전인 태화전 포함)도 아니고, 건청궁, 곤녕궁같은 것도 아니며, 후화원의 한 말라버린 우물이다. 그것은 자금성의 여러 우물들 중에서 가장 별볼일 없는 것일 것이다. 밋밋하다. 다른 우물들은 대부분 한백옥석으로 난간을 두르고 있으며, 비를 막는 작은 정자도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우물이 가장 유명하다. 바로 진비정(珍妃井). 우수한 한 여인의 장신지지(葬身之地)이다.

 

무술정변이 실패하고, 광서제는 중남해의 영대(瀛臺)에 연금된다. 그의 총애하는 비빈인 진비는 자금성 경기각(景祺閣) 뒤에 있는 집에 갇힌다. 이때부터 서로 떨어져 있게 된다. 다른 비빈과는 달리, 진비는 실제로 광서제의 정치적인 여비서 역할을 했었고, 이것은 새로운 역할이었다. 서태후가 진비를 세불양립의 적으로 취급하고, 그녀를 죽여야만 되겠다고 생각한 것도 이해가 된다. 진비는 냉궁에 들어간지 2년이 지난 시점에, 서안으로 도망갈 준비를 하던 서태후는 그녀를 안순문(安順門) 안의 우물에 밀어넣어 죽여버리도록 명령한다.  

 

서태후가 내놓은 구실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서양인들이 곧 북경성으로 들이닥친다. 병마황란의 시기에 여기에 있다가 만의 하나 오욕이라도 당하면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고, 조상을 뵐 면목이 없어진다."

 

필자의 생각에 진비가 죽기전 가장 큰 바램은 아무런 소식도 없는 광서제와 한번 만나는 것이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녀의 이 마지막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비정은 무한한 유감을 묻고 있다.

 

가이드의 소개에 따르면, 진비의 언니인 근비(瑾妃)는 일찌기 이 우물의 북쪽에 있는 상방에 자그마한 영당(靈堂, 懷遠堂이라고 명명했다 함)을 마련하고 참혹하게 죽은 여동생의 위패를 모셔놓았다고 한다. 자매간에는 정이 깊었다.

 

서태후가 진비를 죽인 것은 마치 원한을 푼 것같다. 그녀는 아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고궁박물원에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되고, 또한 그녀의 잔혹함으로 인하여 구천지하의 진비는 더욱 빙청옥결(氷淸玉潔)이 되었다는 것을. 진비는 중국고대 왕비중 눈에 띄는 여인이다. 민중이 사람을 받는 정도로 따지자면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비슷하다. 진혼곡의 선율속에 보일듯 말듯하다. 그녀의 의외의 참혹한 죽음은 인민의 존경을 불러왔다.

 

신해혁명후, 1913년, 진비의 유해는 서릉 숭릉의 숭비원침으로 모셔진다. 그리고 각순(恪順)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그녀는 여열사로 추봉하는 것이 타당하다. 어떤 사람이 내게 물어본 적이 있다: 북경에 대도 왕오를 제외하고, 추근(秋瑾)과 같은 여협이 나타난 적이 있느냐고? 내 생각에 진비가 그런 여인이다. 단지 그녀는 칼을 들고 있지 않았을 뿐이다.

 

중국근대사상, 진비는 추근과 비견할만한 여성인물이다. 그녀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썩어빠진 봉건통치를 흔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상을 위하여 헌신한다. 남에는 추근이 있고, 북에는 진비가 있다. 부녀들조차 이렇게 각성했고, 용감하게 폭정에 반항했으니, 대청제국의 말일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금성의 광환은 이미 벗겨졌다.

 

사람들은 서태후를 첫째 둘째가는 나쁜 여인이라고 꼽는데 습관이 되어 있다. 다행헤 그녀의 곁에는 좋은 여인이 하나 있었다. 진비. 두 사람간에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진선미(眞善美)와 가추악(假醜惡)이다. 진비의 몸에는 사람들의 미에 대한 상상과 믿음이 남아 있다. 진비의 운명은 미의 비극이다. 비극의 개념 자체는 바로 아름다운 것을 훼멸시켜버리는 것이다.

 

진비는 광서제의 사랑하는 비였다. 그러나 서태후는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이처럼 고부관계가 엉망이 된 것은 일정한 정치적 배경이 있다. 문화수준이 비교적 높았던 명문규수인 진비는 사상관념이 비교적 신식이었다. 개혁을 지지하는 광서제와 금슬상화(琴瑟相和)했다. 이것은 자연히 보수파인 서태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광서제가 그녀의 베갯머리송사에 놀아나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긴다.

 

광서제가 중남해의 영대에 연금된 후,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진비는 계하수(階下囚)로 전락한다. 팔국연합군이 북경성으로 밀려올 때, 서태후는 도망치기 전에, 자신의 숙적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특별히 이연영에게 꽁꽁 묶은 진비를 깊은 우물 속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큰 돌덩이를 몇 개 집어던져 넣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진비는 우물로 떨어지기 전에 서태후에게 정치적견해를 바꿀 것은 계속 권했다고 한다. 그녀는 약한 여자이면서 열성 여자이다. 서방의 잔다르크를 연상시킨다. 이교도로 화형주에서 목숨을 잃은.

 

오늘날 고궁의 어화원내에는 '진비정'이 있다. 우물은 이미 말라버렸다. 황천에서 진비의 영혼은 무탈할 것인가? 여전히 빙청옥결일까?

 

광서제와 진비의 금슬상화는 재자가인의 절묘한 짝이다. 원앙호접파의 그림자도 갖추었다. 그러나 서태후가 가운데서 방해를 했다(서왕모가 은하수로 견우,직녀를 갈라놓은 것처럼). 변법유신을 꿈꾸던 재자(광서)는 중남해 영대에 연금되고, 그의 홍안지기인 진비는 자금성의 한 우물에 던져져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광서와 진비는 비록 봉건적인 색채가 강한 "포판혼인(包辦婚姻)"(처음에는 역시 서태후의 승인을 받았다)이지만 '신식연애'의 단맛도 보았다.

 

광서제는 아주 개명한 황제였고, 변혁을 추구했다. 마침 진비의 사상관념도 아주 앞서갔다. 그래서 힘이 되어줄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꿈꾸던 애인을 만난 것으로 생각하고 좋아했다. 아쉽게도 낭만적인 사랑의 꽃은 날카로운 가을바람을 견뎌내지 못했다. 진비정의 주위에는 꽃잎이 가득 떨어져 있다. 북경역사상 비교적 유명한 사랑이야기중에서 결말이 모두에게 좋은 경우는 드물다. 반대로, 많은 경우는 비극이다. 자신의 비극이든 다른 사람의 비극이든. 이것도 아마 북경에는 풍화설월(風花雪月)이 없다고 하는 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근정전은 남해 북안에 위치한다. 여기서는 호수의 가운데 있는 영대를 볼 수 있다. 광서제는 일찌기 이 작은 섬에서 꼬박 10년간 연금상태로 있었다. 그가 가장 보고싶어했던 사람은 진비이다. 그러나 진비는 자금성내의 냉궁에 들어갔다. 지척이 천애이고, 정천한해(情天恨海)이다. 서로를 보고싶어하던 광서와 진비는 견우직녀의 이야기를 그대로 재연한다. 남해야 남해. 무형중에 은하의 역할을 한다. 이 한 쌍의 원앙을 갈라놓은 것은 서태후이다. 그녀는 심지어 왕모낭낭보다 더욱 잔혹했다. 1900년, 팔국연합군의 총끝을 피하기 위하여, 그녀는 광서를 끌고 서안으로 도망친다. 떠나기 전에 진비를 궁중의 우물에 밀어넣으라고 명령한다. 진비는 죽을 때까지 광서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도 할 수 없었다.

 

임어당은 광서를 철면구를 쓴 후 지하감옥에 갇힌 프랑스 왕자에 비유했다: "그는 그곳에서 썩고, 죽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작은 섬은 바로 프랑스 칸느 바깥의 바다 가운데 있었다." 마찬가지로, "광서제는 그저 이 아름다운 건축군이 점철된 작은 섬안에서만 자유가 있었다. 그는 태감의 엄밀한 감시하에 생활했다. 태감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느냐 여부는 태후의 뜻을 따르느냐여부에 달려있다고. 그들은 자주 사람을 바꾸어 황제를 감시한다. 그래야 황제와 밀모하여 도망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영대에서 발생한 모든 것은 즉시 전횡하던 황태후의 귀로 흘러들어갔다."

 

영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혹은 수준높은) 감옥이다. 젊은 황제는 갇힌 짐승처럼 난간과 건물을 배회했다 아쉽게도 편지하나 보낼 자유가 없었다. 정치적인 실의보다 더욱 그를 괴롭힌 것은 참기 힘든 상사병이었다. 인간봉래(人間蓬萊), 유랑문앵(柳浪聞鶯)은 조금도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또 다른 반쪽에 대한 그리움으로 삼천후궁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진비를 생각했다. 그녀는 달 속의 항아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달은 그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애인의 얼굴은 볼 수가 없다.

 

진비가 우물에 빠진 후 8년이 지나서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날, 광서제도 모살당한다. 기실 이 전에, 그의 마음은 일찌감치 죽어 있었다. 그의 마음은 일찌감치 갈갈이 찢겨져 있었다.

 

이 슬픈 전설때문에 중남해 영대는 내가 보기에, 신기루처럼 허환하다. 그래서 <장한가>의 싯구를 떠올리게 한다: "상궁벽락하황천(上窮碧落下黃泉), 양처망망개불견(兩處茫茫皆不見). 홀문해상유선산(忽聞海上有仙山), 산재허무표묘간(山在虛無缥缈間)....소양전리은애절(昭陽殿裏恩愛絶), 봉래궁중일월장(蓬萊宮中日月長), 회두하망인환처(回頭下望人寰處), 불견장안견진무(不見長安見塵霧)."

 

당현종과 양귀비의 면면장한(綿綿長恨)은 낙극생비(樂極生悲)이다. 광서와 진비의 생사이별은 완전히 대독재자 서태후가 중간에서 방해한 것이다. 원앙을 몽둥이로 때리고, 금슬상화를 일부러 깨트린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동정을 산다. 강권과 폭정의 앞에서, 그들은 약자이다. 약자의 사랑은 뜨거운 눈물과 선혈로 짠다.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사랑이야기 속에는 남녀주인공의 위치가 바뀌었다: <장한가>에는 양귀비가 죽은 후, 향혼이 구름과 안개 속의 봉래선산에 은거한다; 1천여년후, 중남해 영대는 봉래의 상징이 된다. 다만 그는 이미 사랑하는 비를 잃은 광서제가 유금된 곳일 뿐이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상사의 괴로움이다. "칠월칠일장생전(七月七日長生殿), 야반무인사어시(夜半無人私語時)"의 낭만적인 기억(과거의 좋은 시절)은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의 마음이며, 현실의 앞에서 쉽게 무너져 버린다.

 

곧 망할 것같은 위기일발의 청나라는 이미 학습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확실히 쇠로(衰老)했고, 천천히 소멸해갔다. 완고하고 우매한 여인은 이미 철저하고 완전하게 부패되었다. 북경이 함락된 후, 그녀 본인은 서북의 서안으로 도망친다. 이 때 이미 두뇌는 정체되고 눈은 막고, 귀도 닫았다. 그녀는 1902년에 북경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여전히 완고불화(頑固不化)했다. 마음 속에 후회도 없었다. 다시한번 황제를 영대에 연금한다. 중국인의 군주입헌제에 대한 갈망이 10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참을성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다. 1908년 서태후는 마침내 사망한다. 기나긴 비극은 결국 끝이 난다